구로공단 마지막 ‘전노협’ 사업장, 이대로 문 닫나
구로공단 마지막 ‘전노협’ 사업장, 이대로 문 닫나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2.1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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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텍 구로공장 기습 이전
28년간 지켜온 터전 잃은 사람들
[사건]하이텍알씨디코리아 장기투쟁

지금은 유리로 덮인 고층빌딩들이 즐비하지만 여전히 서울 서남쪽 끄트머리 가리봉동 일대를 구로공단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철’ 가리봉역이 1·7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고 지역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구로공단 시절 소규모 공장들이 남아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하이텍) 구로공장도 그중 하나이다. 무선조종장치를 생산하는 이 업체는 1973년에 설립됐다. 이 회사는 구로공단의 마지막 남은 ‘전노협’ 사업장으로 알려져 있다. 하이텍 노동자들은 1988년 태광하이텍노동조합(현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회 하이텍알씨디코리아분회) 설립 이후 28년 동안 자리를 지켜왔지만, 구로공장 폐쇄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될 처지에 놓였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작지만 없는 게 없는 새 공장

연말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지난해 12월 10일 구자현 전국금속노동조합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장과 신애자 하이텍알씨디코리아분회장이 지상 5층 높이의 철탑을 쌓고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이미 계절은 겨울로 들어섰지만, 두 사람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철탑을 올랐다.

신애자 분회장은 87년에 하이텍에 입사해 남은 조합원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일했다. 그리고 구자현 지회장은 비록 하이텍에 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옛 구로공단에는 상당수의 사업장이 있으며 대부분 노동조합이 없어 하이텍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두 사람을 비롯한 하이텍분회 조합원들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공장이 아예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5년 9월 14일 하이텍 사측은 공장 부지가 매각되었다며 일부 공간을 임대해 사용하던 업체들에게 12월 10일까지 나가달라고 요구한다. 하이텍 노동자들에게는 이보다 하루 늦은 9월 15일 이 소식이 전해진다. 이틀 뒤인 17일 사측은 10월 12일 자로 공장을 이전한다고 통보해 왔다. 새 공장은 기존 공장으로부터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ㄷ’ 타워 5층이었다.

하이텍 분회 조합원들은 새 공장 답사에 나선다. 사측에서 통보한 이전 예정지의 주소로 등기부등본을 열람한 결과, 기존 공장(건물면적 약 68평)보다 작았다(건물면적 약 38평). 기존 공장보다 서류상 면적이 줄어들긴 했지만, 실제로 새 공장을 둘러본 조합원들은 더욱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존 공장의 반 정도 밖에 안 되는 공간에 생산라인, 공장장 사무실, 노동조합 사무실 등이 비좁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합원들이 실소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던 건 ‘휴게실 겸 식당’이었다. 공장 한 귀퉁이에 테이블 하나 놓인 것이 휴게실이자 식당의 실체였다. 이토록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된 데 대해 김혜진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역지회 부지회장은 “공장 내 식당 및 휴게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단협 조항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새 공장에서는 도저히 작업이 불가하다고 판단한 하이텍분회 조합원들은 충북 청주 오창읍에 소재한 본사로 기습 항의방문을 했다. 그리고 하이텍 실소유주인 박천서 회장과 마주쳤다. 공장의 급작스러운 매각과 구색만 겨우 맞춰놓은 새 공장에 대해 조합원들이 항의했다.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박천서 회장은 “너희들과는 할 말 없다”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하이텍분회 조합원들의 항의방문 다음 날 진행된 단체교섭에서도 사측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조합원들은 9월 23일 공장 내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사측이 공장을 이전하라며 통보한 날인 10월 12일 하이텍분회는 무기한 전면파업에 나선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공장 폐쇄 둘러싼 진실게임의 시작

하이텍분회 조합원들은 사측이 구로공장을 폐쇄하기 위해 일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이텍 사측은 이러한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이텍 관계자는 구로공장을 폐쇄하거나 생산라인을 국내에서 철수시킬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 둘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구로공장이 하이텍 국내 생산시설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하이텍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상주하는 임직원 수는 파업 중인 조합원 7명을 포함해 54명이다. 하이텍분회 조합원 7명과 ‘ㄷ’ 타워 5층으로 이전한 공장에 홀로 근무 중인 공장장까지 모두 8명을 뺀 나머지 46명은 오창에 있는 본사 인력이다. 또한 하이텍분회 조합원 7명이 국내에 남은 생산직 노동자의 전부이다.

그런데 몇 가지 사실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6년 6월, 당시 태광하이텍은 필리핀 현지에 법인을 설립하고 공장을 짓는다. 그리고 1년 후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친다. 이로 인해 1998년 국내 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정리해고제가 도입되는데, 하이텍도 대규모 정리해고를 시도한다. 박천서 회장은 정리해고를 시행하기에 앞서 “회사가 바람 앞의 등불이다”라는 내용의 대자보까지 붙이며 경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1998년 11월 외부 감사결과가 발표되면서 하이텍이 창사 이래 최대의 흑자를 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이텍은 거의 전적으로 수출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외환부족 사태로 원-달러 환율이 달러 당 2천 원 선에 육박하면서 오히려 환차익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고 태광하이텍노동조합은 1년간의 투쟁 끝에 노동조건의 일부 후퇴를 받아들이는 대신 노동자들의 고용을 지켜냈다. 이후 몇 년 간은 후퇴됐던 임금·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퍼즐의 마지막 조각

그러나 2002년 하이텍 사측과 노동조합의 갈등은 다시 시작된다. 노조 탄압, 산재승인, 부당해고 등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지다 2005년 12월 생산설비만 구로공장에 남겨둔 채 돌연 본사와 사내 연구소를 현재 소재지인 충북 청주 오창과학산업단지로 옮긴다.

그리고 2007년 8월 사측은 생산부문 인력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고, 노동자들에게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그해 11월 생산부문을 하이텍 법인으로부터 분리해 신규 법인을 만들어 운영하겠다는 공고문이 붙는다. 당시 생산직 노동자는 60여 명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들 중 일부는 희망퇴직을 하고,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새 법인으로 소속을 옮겼다.

이때에도 13명의 조합원들은 전적을 거부했다. 이들은 일련의 사건들이 최종적으로 구로공장을 폐쇄하고 필리핀 현지 공장으로 모든 물량을 빼내려는 과정으로 봤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법인이 분리된 지 1년 만에 소속을 옮겼던 30여 명의 노동자 전원에 대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법인을 청산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해당 법인의 자본금이 5천만 원에 불과해 자본금 대비 부채 비율을 쉽게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공장을 설립한 뒤 창사 이래 최대 흑자에도 불구하고 정리해고를 감행했다. 이후 생산부문 법인을 따로 설립해 노동자들을 전직 조치했다가 이들을 내보낸 뒤 법인을 청산했다. 그리고 기존 공장의 절반 크기의 새 공장으로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텍 관계자는 “국내 생산라인 철수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노동조합에서 일방적으로 교섭을 거부한 채 파업을 벌이고 있어 90평 규모의 새 공장에는 공장장 1명만이 근무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 공장이 있는 서울 가산동 ‘ㄷ’ 타워 5층으로 직접 가서 확인한 결과 공장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공장이라는 곳에서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는커녕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출입문 위에 ‘(주)하이텍알씨디코리아’라는 표시가 있는 것을 빼면, 그곳은 폐쇄된 창고쯤으로 여길 정도였다.

아울러 하이텍 관계자가 말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생산직 신규채용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구로공장 폐쇄와 국내 생산라인 철수 계획은 없지만, 생산직 신규채용 계획도 없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조합원들의 연령은 낮아야 40대 초반이고 높게는 50대 중반에 달한다.

ⓒ 성상영 기자 syseong@laborplus.co.kr
청춘 바쳐 일한 회사 이대로는 못 떠난다

사건의 진행과정과 하이텍 관계자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일단 공장 폐쇄를 둘러싼 진실게임은 하이텍분회의 주장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사측은 “노조와의 대화 의지는 있다”면서도 조합원들의 파업과 두 명의 천막농성을 사실상 지켜보고만 있다. 그러는 동안 하이텍분회가 파업에 돌입한 지는 넉 달이 됐고, 구 지회장과 신 분회장이 철탑에 오른 지는 두 달이 됐다.

지난 1월 8일에는 조합원들이 농성 중인 공장의 전기조차 끊겼다. 전기가 끊기기 이전까지는 철탑으로 전선을 끌어와 전열 기구를 사용해 그나마 추위를 피할 수 있었다. 공장의 전기가 끊긴 그 날 서울의 기온은 영하 7도까지 떨어졌다.

하이텍분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날의 단전 사태와 유사한 사례로 2013년 11월 콜트악기 대법원 확정판결을 인용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업무방해”라고 주장했다. 사측의 공장 이전 통보가 일방적이었고, 조합원들이 기존 노동조합 사무실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당시 판결의 요지는 “노동조합의 업무가 절차상 다소 하자가 있더라도 그것이 반사회적이지 않은 이상 업무방해죄의 보호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전기가 끊기고 추위에 수도도 얼었지만 마지막 남은 7명의 조합원들은 “청춘 바쳐 일한 공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2009년 무렵까지 남아있던 13명의 조합원 중 몇몇은 개인사정으로 현장을 떠났고, 또 몇몇은 정년을 넘기게 돼 현장을 떠났다.

이들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에 걸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을 갓 넘긴 때에 하이텍에 자리를 잡은 ‘여공’들이다. 이 여공들은 하이텍에 들어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웠다. 한 조합원의 자녀는 어느덧 그녀가 하이텍에 입사할 무렵의 나이가 되었다. 만약 이들이 구로공단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대학에 들어갔다면, 지금보다는 안정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이텍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으며 2, 30년을 일해 온 동안, 7, 80년대 구로공단 부지제공, 세제혜택 등의 정부 특혜가 없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던 작은 전자회사는 전 그룹사 매출액 1,650억 원(2015년)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이텍은 현재 세계 80개 나라에 제품을 수출하고, 미국·독일·일본·중국 등 해외 판매법인만 4곳에 달한다.

28년 전 박승순 명예회장(2012년 작고)은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잘 되면 자기 주머니에만 이익을 챙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고 하이텍분회 조합원들은 이야기한다. 그 아들인 박천서 회장은 기업을 물려받았지만, 부친이 노동자들에게 했던 약속은 물려받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