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해서 10년 이상, 노력 안 하면 20년도 해도 못하죠.”
“노력해서 10년 이상, 노력 안 하면 20년도 해도 못하죠.”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2.16 15:41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반백년, 달구고 메질하고 담금질하고 벼리고
열세 살 소년, 주어진 삶을 벼려 자신의 꿈을 펼치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모래내 너머 수색역 앞 형제대장간(1)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다.’ 2016년 새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다. 어디서 읽었는지, 누구에게 들었는지 좀체 생각나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를 뒤지니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자크 라캉의 책을 읽은 기억도, 그가 누군지조차 기억이 전혀 없다. 프로이트나 니체도 ‘타인의 욕망’을 말했으니 언젠가 어디선가 읽었을 텐데, ‘타인의 욕망’ 뒤에 라캉처럼 ‘욕망하다’가 함께 떠오른 까닭은 왜일까?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욕망의 완성은 한없이 쫓는 과정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다’는 문장을 가슴에 담고 대장간을 찾아간다. 수색역 앞에서 버스를 내려야 하지만 모래내에서 내려 사천교와 가재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경의선 철로를 따라 대장간으로 향한다. 겨울이라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 7시 30분. 마치 알람이 울리듯 수색역 앞 <형제대장간> 철문이 드르륵 찬 공기를 들추며 열린다. 이곳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시작해 반백년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이가 화덕에 불을 지펴 달군 쇠를 모루에 올려 메질하고, 담금질을 하는 곳이다. 1996년에 이 자리에 화덕에 처음 불을 지폈으니 <형제대장간>은 올해로 20주년이다. 그 세월동안 어김없이 7시 30분 대장간 문이 열리고, 화덕에 불길이 피어난다.

열세 살 나이로 대장간에서 풀무질부터 익힌 소년에게 꿈, 욕망 이런 게 있었을까. 그냥 주어진 삶은 아니었을까. 그 주어진 삶을 ‘천직’으로 ‘여기고’ 반백년을 살아왔을 게다. 여기서 ‘여기고’는 수동이나 강요가 아니다. 풀무질을 시작한 게 주어진 삶이었다면, 대장장이로 50년을 살아온 것은 ‘견디다(감내)’ 차원의 ‘여기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을 달구고 메로 친 뒤 담금질한 ‘벼리다’의 ‘여기고’가 아닐까. 주어진 삶을 벼려 자신의 삶, 자신의 꿈을 찾아 이뤄낸 이를 <형제대장간>에서 만난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다’를 품고 대장간을 찾은 까닭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 딸 때문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잘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 길이 제 노력만으론 쉽지 않아선지 고민이 깊다. 꿈은 자신이 마주한 어떤 사람이나 무언가에 필(?)이 꽂혀서 생기기 마련이다. 타인의 삶이 자신의 꿈 혹은 바라는 직업이 되는 셈이다. 그게 자신의 꿈인지, 아니면 타인이 이룬 꿈이 아름답거나 부러워서 자신의 꿈으로 여기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욕망은 자신의 몸에서 자생한 무엇이 아니라 자신의 몸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의 씨앗이나 가지를 받아 자신의 몸에 심어 싹튼 게 아닐까. 딸의 진로 고민을 문자메시지로 주고받으며 말했다. 지금 자신의 꿈이 진정 자신의 꿈인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인지 너무 걱정 말라고. 타인의 욕망을 욕구하지 않는 (딸은 이게 진정 자신의 꿈인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자신의 몸이 욕망하는 진짜 꿈은 무수한 도전과 실패를 맛보며 찾을 수 있다고. 그 자생의 욕망을 아동기에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청소년기에, 아니면 삼십대, 사십대, 혹은 육칠십 살에 이르러서 찾을 수도 있다고. 중년에 이르러서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더구나 성공 신화를 썼다고 알려지거나 혹은 자신의 분야에서 명망을 얻었다고 일컫는 이도 그게 진짜 자신의 꿈인지 모르고 사는 경우도 흔하니 말이다. 자신의 욕망이란 실재하지 않는 듯해 영원히 찾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찾는 과정이 어쩌면 인간의 삶인지 모른다. 혹시 욕망은 결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한없이 좇는 과정을 일컫는 건 아닐까.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열세 살 소년의 풀무질

<형제대장간> 대장장이 류상준은 1954년 서울 모래내에서 팔 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결혼한 아버지가 처음 살림을 차린 곳이 모래내다. 아버지가 모래내에 첨 왔을 때는 집이라곤 다섯 채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통에 피난민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했고, 1959년 태풍 사라호로 수재민들이 집단 이주하며 마을이 커졌는데, 그전까지는 온통 논밭뿐이었다.

모래내는 북한산 남장대에서 흘러내린 물이 세검정, 홍제동을 거쳐 한강으로 이르는 홍제천의 끄트머리쯤에 자리한다.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늘 모래 밑으로 흘러 모래내라 불렀다고 한다. 모래내는 연희동과 가재울이라 불리는 남가좌동을 가르는 경계기도 하다. 모래내에 살던 사람은 서울 도심으로 가려면 징검다리로 홍제천을 건너야 했다. 비가 많이 와 물살이 징검다리를 삼키면 하천 위로 놓인 경의선 철도 길로 올라가 내를 건넜다. 철로에서 갑작스레 기차와 마주하면 홍제천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1962년 사천교가 세워지고서야 모래내 너머 사람들이 바짓가랑이에 물을 적시지 않고 서울역으로 신촌으로 종로로 갈 수 있었다. 사천교가 놓이기 전에는 차들이 개천바닥을 가로질러 갔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모래내에 자리 잡은 아버지는 달구지를 끄는 소 발굽에 편자를 박는 일을 했고, 옆집 아저씨는 대장간을 운영했다. 자동차도 드물고, 버스도 신촌까지만 다닐 때라 소달구지는 소중하면서도 ‘흔한’ 운송수단이었다. <형제대장간>의 ‘제’이자 형보다 세 살 어린 류상남은 “그땐 다 운송수단이 달구지지. 짐 실고, 건설현장 모래 실고 다녀” 아버지의 편자 박는 일로만 팔 남매가 굶지 않고 살았다고 말한다. 자신의 농지가 없었던 집의 여성들은 대부분 쓰레기처리장이었던 난지도 인근 상암동 채소밭에 날품을 나가거나 땅콩공장에서 일했는데, 어머니는 집안일만 했다.

밥은 굶지 않았다지만 팔 남매를 일일이 챙기고 교육시킬 여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전쟁으로 황무지가 된 나라에서 팔남매 밥을 먹이자니 그 어려움이 오죽했으랴. 끼니마다 밥공기만 열 개다. 호미질 할 땅 한 뙈기 없는데 열 식구가 굶지 않았으니…… 축복이었으리라.

지금은 가재울 뉴타운이 들어서며 가좌역 주변의 인기가 높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가좌역은 간이역이라 통근열차가 서지 않았고, 열차를 타려면 철도 기지창이 있는 수색역으로 가야했다. 경의선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 사령부가 경성과 의주를 잇는 군용철도의 필요성 때문에 깔린 철로로, 1906년에 정식 개통했고 수색역은 1908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수색역 인근에는 철도관사를 비롯한 적산가옥이 있어 모래내보다 집이나 상가가 더 번창했다. 193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대규모 병영과 일본군 관사가 수색역 인근에 세워졌다. 류상준 형제는 모래내에서 1935년에 연희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연 수색초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류상남은 하굣길에 논길을 따라 집에 오면서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놀았다. 류상준은 초등학교를 마치자 옆집 아저씨이자 <모래내 대장간>을 운영하는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전설적인’ 대장장이 박용신 아래서 일을 배웠다.

스승의 어깨너머로 길을 찾다

대장장이가 되는 길은 쉽지가 않다. 류상준은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고, ‘노력해서 10년은 배워야’ 대장장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어디서든 선생을 잘 만나야 쑥쑥쑥 올라가듯이 이 일도 선생을 잘 만나야 해. 난 어렸을 적에 일하면서 우리 선생님이 이렇게 이렇게 만드니까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우리 선생이 없을 적에 나 혼자 두들겨서 조그맣게 만드는 거죠. 그래도 한 10년을 해도 완전히 습득을 못해요. 10년 이상 배워야 해요. 지가 배우려고 노력하고 10년 이상 있어야. 노력해야 되지 노력 안 하면 20년도 되도 못하죠.”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노동과 예술이 언제부터 갈라졌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노동이든 예술이든 10년 이상을, 그 10년도 노력해서 해야 홀로 일할 수 있다. 류상준 곁에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이가 “보잘 것 없는 돌로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나요”라며 묻자 미켈란젤로는 “그 형상은 처음부터 화강암 속에 있었죠. 나는 단지 불필요한 부분들만 깎아냈을 뿐이요”라고 답했다지 않는가.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른다. 어떤 이는 작업 중인 미켈란젤로를 본 소녀가 왜 힘들게 돌과 씨름하느냐고 묻자 미켈란젤로가 “이 속에는 천사가 들어있단다”로 말했다 한다. 이제 미켈란젤로에서 류상준으로 돌아오자. 검지만한 굵기의 쇠 봉이 화덕과 모루를 오가면 어느 덧 평평해지고, 사각이 되고, 육각이 되고, 곡선이 잡히고, 직각이 잡히고, 날이 서고, 자루가 되는, 도면도 시방서도 없이 이루어지는 류상준의 작업은 그야말로 쇳덩이에 본래 칼의 형상이 있고, 가위의 형상이 있어 망치질로 그 숨겨진 형상을 드러내게 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류상준이 박용신에게 대장일을 배우는 과정도 15세기 스승 밑에서 그림을 배우는 과정과 꼭 닮았다. E. 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문고판)』(예경, 2013, 185쪽)에 나온 이야기다.

그 당시에는 젊은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미술 학교 같은 것은 없었다. 만약에 한 소년이 화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그를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 밑에 견습생으로 보낸다. 그는 보통은 그 거장의 집에서 먹고 자며 주인집의 심부름도 해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는 일꾼으로 성장해야 했다. 견습생이 처음에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스승이 사용할 물감을 개거나 나무 패널이나 캔버스를 준비해두는 것이었다. 점차 그에게는 깃대를 그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이 주어지게 된다. 그런 다음에 어느 날 스승이 몹시 바쁠 때 그는 견습하는 제자에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예를 들어 이미 윤곽을 그려놓은 곳에 색칠을 하거나 그 장면에 나오는 구경꾼들의 옷을 마무리하는 일을 주게 된다. 만약 그때 그가 재능을 보이고 스승의 양식을 완전하게 모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점차로 그에게는 보다 더 중요한 일, 즉 스승의 스케치를 가지고 그의 감독하에 그림 전체를 완성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당시 15세기 ‘회화 유파’들이었다. 이런 유파들은 사실 훌륭한 미술 학교들이었다. -『서양미술사』

어깨너머다. 이론서가 있지도, 세심한 지도가 있지도 않다. 스승이라 하지만 대장간 일을 강의하며 전수하지 않는다. 스승이 일하는 모습, 스승이 만든 물건(작품)을 풀무질을 하며, 메질을 하며 어깨너머로 눈 여겨 보았다가 스승이 없는 참에 홀로 자그맣게 모방하며 기술을 익히는 거다. 배우려고 눈에 불을 켜야 하고, 고된 노동 뒤에 주어지는 잠시 쉴 참에 홀로 메질하며 연마해야 한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류상준은 책으로 대장일을 배우지 않았고, 말로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눈으로 온갖 이론을 배우고 몸으로 익혔기에 누군가가 기술을 배우려고 찾아오면 눈을 틔게 하고, 몸을 열게 한다. ‘에이(A)는 비(B)다’가 없다. 에이를 직접 손으로 들고 비가 될 때까지 눈으로 쇠의 재질과 불의 온도를 깨치게 한다. 이런 식이다.

“불의 온도요? 쇠 자체가 다 틀린데요. 하이스(HSS, High Speed Steel, 스테인리스 계통이고 내마모성이 강함)라는 쇠가 있는데, 그런 거 두들겨 만들면 우선 불을 잘 봐야 돼요. 조금만 덜 달궈져도 안 되고, 더 달궈져도 안 되고. 그러고 담금질 하는 게 우선적으로 쳐주잖아요. 담금질이, 하이스 같은 거는 일반 쇠하고는 달라 가지고 일반 쇠하듯 담금질 하면 안돼요. 아 이거는 담금질을 어떻게 해야 되는 거구나, 이런 거 익혀가면서 하는 거죠. 너무 강하게 들어가면 안 되니까. 너무 강하게 들어가면 부서져버려요. 쇠마다 다 달라요. 어떤 것을 쓰냐면, 이거는 쇠스랑을 만들어야 되고, 이거는 강도가 어느 정도 되니까 칼을 만들어야 되고, 낫을 만들어야 되고. 호미 같은 거는, 호미는 땅 파는 거니까 이거는 무슨 쇠로 만들어야 되고. 어느 정도는 (규정이) 되어 있어요. 그거를 오랫동안 해야지 알 수 있고, 쇠는 다 똑같은데, 우리는 대충 보면 이거는 쇠가 어느 정도 강도가 되고 그런 걸 단박에 알죠.”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진짜 매력 있는 직업이야”

요즘에야 풀무질도 전기로 바람을 불어넣는 팬(fan)을 사용하고, 메질도 크랭크를 이용해 두들기는 스프링 해머를 이용하니 홀로 대장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풀무질도 메질도 오로지 사람 손으로 했던 당시에는 대장간에 네댓 명이 있어야 했다. 풀무질을 하는 이가 있고, 메질을 하는 이가 두세 명, 달궈진 쇠를 화덕에서 집게로 꺼내 이리저리 돌리며 형상을 잡는 대장이 있어야 일이 된다. 조선시대 풍속화가인 김홍도가 그린 <대장간>이란 그림이 있다. 그 그림에 다섯 명이 등장하는데, 화덕 옆에서 발풀무를 하는 어린 아이 한 명과, 번갈아 메질을 하는 두 명, 집게로 쇠를 잡은 대장 한 명, 그리고 옆에서 숫돌에 낫날을 벼리는 이가 한 명. 그 광경은 류상준이 처음 대장일을 배울 때와 다르지 않다. 집게잡이가 따로 있어 화덕에 달궈진 쇠를 모루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정연학의 「한국의 대장간 문화」에 그 역할이 나와 있다.

대장일을 위해 대장장이 1명, 메질꾼 2~3명, 풀무꾼 1명, 집게잡이 2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질을 할 때는 보통은 2명이 하지만, 쇠가 큰 것을 치는 경우에는 3명이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연장의 형태가 대략 만들어지면 2명이 메질을 번갈아 가면서 하고, 대장장이는 망치로 모루를 치면서 강약을 조절한다. 연장의 중요한 날 부분은 대장이 망치로 두들겨서 만드는데, 대장을 보조하는 ‘우측 집게잡이’는 화덕에 연장을 달구는 역할도 한다. -「한국의 대장간 문화」

7세기 오회분 4호묘에 그려진 고구려 벽화에도 대장장이가 등장한다. 오른손엔 망치, 왼손에는 집게로 달궈진 쇠를 잡고 모루 앞에서 메질하는 장면이다. 대장간 풍경이란 고대에서 해방 후, 그리고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하다. 정연학은 이 고구려 벽화를 통해 “고구려 사회에서 철을 다루는 대장장이를 신성한 존재이자 불을 다스리는 신적 존재로 여기었음을 알 수 있다”며, “대장장이는 물론 그들이 사용하는 쇠망치, 모루, 풀무 또한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말한다.

류상준이 대장간에 발을 디딘 계기는 아버지의 ‘욕망’이 작용했을 수 있다. 하지만 또래와 구슬치기의 유혹을 뿌리친 것은 주어진 삶에서 ‘자신의 욕망’을 찾았기 때문은 아닐까. 류상준은 손재주가 좋았고, 자신이 뚝딱거려 무언가를 만들면 즐거웠다.

“몸을 쓰는 일을 하찮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있고, 대장간 일 자체도 워낙 고되니 어릴 적에는 도망가고 싶은 적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잠시도 몸을 쉬지 않는 류상준이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에 내가 물었다. 그는 화덕에서 형광 빛을 띠며 노랗게 이글이글 끓는 괴탄 한 조각을 집게로 꺼내 담뱃불을 붙인다. 이참이 아니면 그에게 말을 건넬 겨를이 없다. 담배에 불이 붙는 순간 그는 스프링 해머 앞에 앉기 때문이다. 절도 있는 메질소리처럼 그의 말도 짧다.

“그런 거 나는 생각을 안 해본 것 같아요. 워낙 이걸 좋아했어요. 만들고 하는 거. 이게요, 직업 자체가 참 재미있는 직업이에요. 쇠를 (화덕에) 집어넣으면 망치로 두들겨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으니까. 재미있는 거죠. 진짜 매력 있는 직업인데, 그렇게 배우려는 사람이 많지가 않아가지고. 너무 배우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답변이) 됐죠?”

‘됐죠?’로 인터뷰 끝이다.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덕에서 꺼낸 달궈진 쇠를 모루에 올리고 집게로 이리저리 뒤집으며 망치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