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잘만 만들면 손님이 무한정 많아요”
“물건을 잘만 만들면 손님이 무한정 많아요”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2.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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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곳곳에는 다 빈치 노트가 숨어 있다
교수가 된 대장장이, 오십 년 흘러도 배운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모래내 너머 수색역 앞 형제대장간(2)

어김없이 아침 7시 30분에 <형제대장간> 문을 연 동생 류상남은 장작을 가져다 화목난로에 불을 지핀 뒤 화덕에 괴탄을 그러모아 불을 피운다. 그사이 마른 몸에 키는 대나무처럼 쭉 자란 검은 테 안경을 쓴 청년이 들어선다. 이경지다. 이 친구는 중학교 다닐 적 어머니 손을 잡고 <형제대장간>을 처음 찾았다. 류상준 대장장이 밑에서 일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거다. 류상준은 “대학을 마치고도 대장일을 배우고 싶으면 그때 찾아와라. 그럼 가르쳐 주겠다”며 중학생 이경지를 돌려보냈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대장간에 온 청년들

이경지는 어릴 때부터 대장간의 매력에 푹 빠졌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 걸지라도 대장간을 향한 욕망을 자신의 꿈으로 설계한 거다. 고등학교를 마친 이경지는 대학 진학 대신 <형제대장간>을 다시 찾았고, 그때 류상준은 이 청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군복무를 마치고도 대장장이의 꿈을 여전히 간직한 이경지는 제대하자마자 다시 이곳을 찾아 일을 배우고 있다. 쇠를 달궈 류상준에게 넘기는 일도, 모루에서 큰 해머로 메질을 하는 일도 이경지의 몫이다.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이경지는 류상남과 내게 커피를 한 잔 타서 꺼낸 뒤 공장 바닥을 비질을 한다. 잠시 뒤 류상준이 들어선다. 그의 키는 이경지의 목 아래서 멈췄다. “조그만 할 때부터 일을 해서 그런지 키가 안 크네요.” 일 미터 육십 센티가 되지 않은 류상준이지만 가슴은 딱 벌어졌고, 어깨는 근육으로 아름다운 선을 그린다. 그는 키와 달리 거인의 손이다. 마디마디가 어찌나 굵은지 오십년 대장일이 손가락에 나이테를 새긴 듯하다.

류상준은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형제대장간> 대신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문화교육원에 간다. 그는 그곳에서 객원교수로 대장일을 가르친다. 물론 실습교육이다. 열일곱, 열여덟 한창 메질을 할 때는 겨울에도 ‘런닝구’ 바람으로 일해도 땀이 쉼 없이 흐르는 고된 노동의 시간이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않는 그를 박사학위를 지녀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수의 직함을 안겼다. 그야말로 프로페셔널한 류상준이 프로페서(professor)가 됐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 직책 앞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그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취재를 간 날도 옻칠할 때 쓸 끌과 같은 전통 도구를 만들고 있었다. 단청, 옻칠, 소목, 배첩, 모사 등 전통방식으로 문화재를 보존하고 복구할 때 전통 공구가 반드시 필요한데, 쇠로 만든 전통 공구는 류상준의 손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수업만이 아니라 다른 과정의 교수나 학생들도 류상준을 찾는 일이 많다.

류상준은 출근하자마자 스프링 해머의 전원을 올리고, 기계에 윤활유를 친다. 전날 기본 형상을 만들어 둔 쇠를 화덕 앞에 류상준이 올리자 이경지는 타고 있는 탄 속에 묻어 달군다. 말없이 몸으로 척척 공정이 진행된다. 류상준은 쉬는 참이 없다. 마치 일을 하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출근과 동시에 웃옷을 벗어버리고 작업 시작이다. 내게는 잠시 눈길을 준 게 다다. 리처드 세넷의 말이 떠오른다.

장인정신은 면면히 이어지는 인간의 기본적인 충동이며, 일 자체를 위해 일을 잘 해내려는 욕구다.

조금 있으니 <형제대장간> 네 번째 주인공인 한 청년이 들어선다. 그의 집은 남양주 마석에서 30분은 더 들어가는 축령산 인근이다. 그곳에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면 빠르면 두 시간을 조금 넘기고, 혹여 차 시간이 어긋나면 길게는 세 시간을 길에 바친 끝에 대장간에 들어선다. 그는 중앙대학교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에서야 자신의 욕망을 찾아 쇠를 만지기 시작했다.

학사학위를 지니고 대장간에 들어선 청년은 박현준이다. 올해로 서른이다. 그의 욕망은 과학자였다. 그게 자신의 욕망인 줄 알았다. 중학교 시절 그의 목표는 과학고 입학이었다. 하지만 낙방했다. 한순간 목표가 사라졌고, 멍해졌다. “떨어지니까 멍해졌어요.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게 없더라고요.” 공부는 나름 했으니 여느 청년처럼 대학에 들어갔고, 졸업을 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삶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목표가 없는데 공부를 하려니” 당연히 신이 나지 않았을 게다. 그 혼란기를 거치며 ‘과학자’가 자신의 꿈이었나, 의문을 품었다. 자신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이 좋아 과학자라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했고, 그게 눈앞에서 과학고 입학이 좌절되자 욕망 자체가 사라졌던 것이다. 어려서 과학자가 되고 싶은 욕구가 너무도 컸기에 상실감도 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깊었으리라. 그 상처가 욕망이 사라진 방황으로 이어진 셈이다. 어느 날 한 디자이너의 강의를 듣는 순간, 자신의 꿈이 과학자가 아니라 ‘호모파베르(homo faber, 공작인)’라는, 자신의 참 욕망을 깨쳤다. 그래 칼을 만들자. 그는 칼을 만드는 장인이 자신이 꿈꾼 과학자라는 걸 대학을 마치고서야 알았다.

집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칼 명장을 찾아가 다짜고짜 일을 배우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연마를 하며 칼을 익혔다. 하지만 칼 만드는 법만을 배워서는 그의 성이 차지 않았다. 칼의 원재료인 쇠를 익히려 대장간을 찾았다. “천천히 가더라도 실패는 하면 안 되잖아요.” 그는 전국의 대장간을 뒤졌고 제대로 된 스승이 이곳 <형제대장간>에 있다는 걸 알았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기술문명이 쫓지 못한 기술

요즘 운영하는 대장간은 대부분 한두 명이서 일한다. 전기 동력을 사용하면서 풀무꾼, 메질꾼을 따로 두지 않아도 일할 수 있게 된 까닭도 있지만 공장에서 싼 공구들이 쏟아지고, 중국산들이 밀고 들어와 여럿이 일해서는 타산을 맞추기가 힘들어서다. 하지만 <형제대장간>에는 중학교 때부터 찾아온 청년, 학사학위를 받고 나와서 찾아온 청년이 있다. 류상준의 복이기도 하지만 그의 장인 정신이 청년들에게 타인의 욕망으로 퍼져 유혹한 듯싶다.

<형제대장간>은 일감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자동화되고, 대규모화된 공장도 <형제대장간>의 상대가 아니라고 류상준은 생각한다. 인간이 쇠와 함께 인류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간과 공존한 대장간은 근대 기술문명이 몰아치고, 신자유주의가 밀려들어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형제대장간>은 번창한다. 기술과 기계가 발전해도 따라올 수 없는, 침범할 수 없는 눈과 손을 류상준이 지녔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오랜 시간 쇠를 만져온 이들이 반발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고스란히 옮긴다.

“물건을 잘만 만들면 손님이 무한정 많아요. 그런데 물건을 잘 못 만드니까 일거리가 없고 그러는 거지. 이런 거는 솔직히 일반 대장간 가서는 만들 수가 없어요. 이게 용접한 게 아니고 그냥 두들겨서 만든 거거든요. 다른 데는 이거 따로 만들고 이거 따로 만들어 붙이죠.”

그는 엿장수가 쓰는 가위를 내게 보여주며 말한다. 손잡이까지 한 몸이다. 용접 부위가 없다. 가위의 양 날도 볼트가 아니라 쇠로 고리를 만들었다. 영화나 드라마 사극에 나오는 창과 같은 무기를 비롯해 다양한 소품들도 류상준의 손을 거친 게 많다. 전통방식을 복원해 만든 거다. <대장금>, <주몽>, <태왕사신기>에 류상준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만든 소품들이 출연해 그를 대신했다. 문화재청이나 박물관에서도 그에게 주문한다. 요즘은 명나라 시절 창을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가 만든 물건은 이미 상품을 넘어 예술작품이다. 가격 경쟁력도 있다. 중국산 싸구려와 맞선 가격 경쟁력이 아니다.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스티브 잡스가 펼친 위력과 같은 경쟁력이다. 장연학은 살아남은 대장간의 공통점을 기록했다.

대장장이와 손님 사이에는 단골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손에 익숙한 연장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손님들은 자신의 연장을 잘 벼려주는 대장장이를 찾고, 연장을 잘 벼릴 줄 모르는 대장장이는 자연스레 도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일정한 지역에서 한 명의 대장장이가 주민들과 단골관계를 형성한다. 가령 충청도 청양 대장장이는 인근 대천, 서산 등지에, 이천의 대장장이는 충북 음성, 충남 천안, 공주까지 단골을 두고 있을 정도이다.

류상남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칼을 꺼내 보여주며 이건 포항에서 재료를 보내 만들어 달라는 칼이라고 한다. 쇠가 좋아도 제대로 된 대장장이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형제대장간>의 단골은 전국에 널려 있다. 바다 건너 제주도에서도 주문이 심심찮다.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쇠 울림의 오케스트라

물론 여기까지 온 류상준의 길은 쉽지 않았으리라. 한때는 아침 일곱 시에 메를 들면 밤 일곱 시까지 점심 먹을 때 잠깐 빼고 하루 12시간 동안 메질을 했다. “메가 땅에 떨어질 시간이 없었어요. 하루 종일 했어요. 지금은 일하는 것도 아니죠.” 스프링 해머 덕에 예전처럼 종일 서서 메질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계로 할 수 없는 메질은 여전히 있다. 그리고 남에게 시킬 수 없는 메질이 모든 작품의 마지막에 반드시 필요하다. 스프링 해머의 속도는 엄청나다. 초당 몇 번까지 칠 수 있는지 너무 빨라 정확히 셀 수는 없었지만, 일 초에 빠를 땐 열 번 가까이 해머 질을 할 성싶다. 그 십 분의 일초 동안 류상준은 집게로 단조할 쇠를 앞으로 밀고 뒤로 댕기고, 뒤집고를 하니 그 기술은 쇼팽의 피아노곡을 연주하던 조성진의 손놀림보다 빠르고 아름답다. 화덕에 바람을 넣는 팬 소리, 석탄이 타며 뿜어내는 불길 소리, 메질 소리가 스프링 해머의 빠른 장단과 어울리고, 때론 담금질 순간에 치이익 열차 기적처럼 퍼지는 소리는 언뜻 어지러운 소음을 내뱉는 듯 들리지만, 사람들아! 이보다 아름다운 노동의 오케스트라가 어디 있겠는가. 아침 7시 30분부터 낮 2시 30분까지 내 녹음기에 담긴 소리는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대장간의 오케스트라가 대부분이었다.

열 평 남짓한 대장간이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다섯 평도 안 되는 듯싶다. 화덕이 있고, 스프링 해머, 프레스기, 연마기, 탁상드릴과 담금질할 때 쓰는 물통과 기름통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스프링 해머 옆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갖춘 집게들이 백여 개가 걸려 있다. 제품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쓰는 집게의 모양이 달라서도 그렇겠지만 그의 반백년 대장장이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 걸려 있어서 그럴 성싶다. 화덕 왼쪽에도 삼십여 개의 집게가 줄줄이 걸려 있다.

 집게는 크기에 따라 종류가 20가지도 넘는데, 집게는 잡는 쇠의 크기에 따라 달리 쓰인다. 가령 벼리는 쇠가 얇은 경우에는 작은 집게를 사용하고, 큰 집게는 쇠를 절단하는데 주로쓰인다. 대표적인 집게로 마루집게(둥그런 쇠를 잡을 때 사용), 노미집게(정 잡을 때 사용), 곡괭이 집게(낫 날 같은 것 고정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고정 장치가 있음), 평집게 등이 있다. -「한국의 대장간 문화」

모루는 일제강점기부터 쓰기 시작한 서양에서 들어온 모루로 한 쪽에 소뿔이 달린 듯하다. 쇠의 각도 잡고, 곡선도 잡는 작업이 이 모루에서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정연학은 대장장이가 가장 아끼는 게 모루라고 했는데, 류상준에게는 물을 짬이 없었다. ‘됐죠?’하며 자석처럼 쇠로 달려가니 그를 돌려 세울 용기가 없었다. 그의 뒷모습만 징하게 마주했다.
 

대장장이가 가장 아끼는 것은 모루이다. 모루의 생김새는 배의 모양처럼 앞쪽이 삼각형이고 뒤쪽은 직사각형 모양이다. 모루 뒤쪽 부분에는 두 개의 홈이 파져 있는데, 홈에 연장을 넣어 쇠의 구멍을 뚫거나 절단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모루의 앞쪽은 쇠를 둥글게 만드는데 이용되고 양쪽 가장자리는 쇠를 직각으로 구부리는 데 쓴다. 이 모루를 ‘양모루’ ‘거북모루’라고 부르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드러왔다. 우리나라 전통 모루는 원형이나 사각형, 팔각형의 모루이나, 다양한 기능을 가진 양모루가 들어오면서 사용빈도가 적어졌다. -「한국의 대장간 문화」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노동의 손이 빚은 것은 예술이다

대장간에서 만드는 제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대장간이 있는 장소에 따라서도 다르다. 어촌에는 어부들, 농촌에는 농부들의 연장이 주를 이룬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대장간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던 농기구는 점차 줄었다. 1990년대를 거친 뒤에는 철로 만든 인테리어 제품이 늘었다. 요즘 <형제대장간>은 전통 도구를 비롯한 문화재 복원이나 연극, 영상 작업에 쓰이는 소품, 무속용품 등을 많이 제작한다. 바뀌지 않은 것은 쇠다. 그리고 그 쇠를 단조해서 온갖 사람들이 요구하는 물품을 만든다는 사실. 대장간에서 무엇을 만드느냐는 그 시대의 산업과 문화를 읽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끊임없이 신소재를 개발하지만 여전히 쇠는 인간 가까이에 있다. 쇠의 종말이 오지 않는 한 대장간은 만드는 물건은 달라질지라도 인류 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하지 않을까.

대장장이 류상준의 손에 새겨진 쇠의 역사는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제 그를 ‘교수님’이라 부르듯, 그가 겪어온 쇠의 역사는 과거의 문화와 산업의 역사까지 오늘날에 되살린다. 그는 글이라면 몸에서 두드러기가 난다. ‘공부는 안 해요. 워낙 글 같은 걸, 책 보는 거 자체를 워낙 싫어해서’라고 말하는 류상준. 하지만 글자로 새겨진 공부는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지만 자신은 늘 공부하며 오늘도 대장일을 한다고 말한다.

“지금 내가 50년을 (대장일을) 했지만 지금도 일하면서 나도 배워요. 일하면서 이거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되겠구나. 교수들도 마찬가지 듯이, 교수들도 공부 안하면 안 되잖아요. 학생들한테 뒤지면 안 되잖아요. 이것(대장일)도 똑같아요. 나도 하면서 배운 게 많고, 색다른 것도 나오고 하다보니까.”

그는 책으로 하는 공부는 하지 않지만 쉼 없이 쇠를 두들기며 새로운 것을 연구하며, 더 나은 기술을 위해 고민한다. 장인이란 어느 분야에서 완성된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아니라 어느 분야의 최고라는 한계를 깨부수려고 쉼 없이 노력하고, 공부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일 성싶다. 그래서 그는 쇠를 대할 때 최고 기술자라는 오만보다는 어린 날 풀무질하며 스승의 대장일을 어깨너머로 배우듯 진지한 눈빛, 맑디맑은 소년의 눈으로 예순셋 오늘도 쇠를 벼린다. 그런 그에게 스프링 해머의 분당 회전수나 달궈진 쇠의 온도, 낫이 나오기까지 공정을 묻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어떤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수치도 그의 눈에 새겨진 불꽃의 빛깔보다 정확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손놀림보다 명확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배운 대로 해도 형상이 나오지 않는데, 교수님 손에만 가면 어떻게 순식간에 제대로 만들어지느냐고, 정말 ‘요술 손’이라고 말한다. 뛰어난 예술인의 조각이 신의 솜씨 같고 요술처럼 여겨지듯 류상준의 작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류상준의 손은 신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손도 인간의 손이듯. 단지 자신의 일에 임하는 자세와 작업에 바치는 땀이, 조각하는 손, 노동하는 손을 신의 손처럼 여겨지게 했을 뿐이다. 다 빈치의 빼곡하게 적힌 노트나 이러 저리 모양을 바꾼 스케치처럼 류상준은 대장간 곳곳에, 모루에, 집게에, 망치에 숱한 연구와 도면과 시방서를 쇳가루로 적어뒀다. <형제대장간>에 이틀 동안 대여섯 시간 머무는 동안 인터뷰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대장간 곳곳에 숨은 류상준의 비밀노트를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비밀노트를 해독할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스무 살 청년일 적 성수공단 작은 공장에서 손바닥이 얼얼해지도록 그라인더를 하루 종일 하면서 언젠가 나도 선반공이 되어 저 기계 앞에 서고, 언젠가 나도 용접공이 되어 용접 홀더를 잡으리라 다짐할 때, 내게 위로가 된 글귀가 있다. 나보다 먼저 이 공장을 다녀갔을 ‘꼬마(견습공)’이 비뚤비뚤 담벼락에 쓴 글. ‘배고팠던 날을 생각하자.’ 일이 고되어 도망치고 싶을 때 그 글자를 벽에 새기고 버텼을 꼬마. 열세 살 어린 나이, 팔 남매의 넷째 류상준은 ‘소발굽쟁이’ 아버지의 고된 노동의 그림자를 보며 또 다른 ‘생각하자’를 다짐했으리라.

동태찌개 2인분과 오징어볶음 1인분을 식당에 시켜 공장 바닥에 상을 펴고 4명의 대장장이 혹은 미래의 대장장이가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포장된 밥과 라면을 뜯어 3인분의 식탁을 진수성찬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순간 밥, 밥을 위한 노동보다 빛나는 아름다움이 어디 있으랴, 하는 값싸고 후질지 모른 감상에 젖는다. 하지만 아름다운 걸 어쩌랴. 밥의 욕망이 노동이다. 그 노동이 예술을 만들고, 인류의 역사를 이끌지 않았던가. 한겨울인 내일도 어김없이 지펴질 화덕의 불길이 돌아서는 내 발길을 따사롭게, 밝게 앞서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