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평에 대항해 대한노총 결성
전평에 대항해 대한노총 결성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2.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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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의 지원과 비호 아래 조직 확장 통해 전평과 맞서
유일한 목표는 노동자들을 정당한 노동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왠 노동? 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 (2)

전평이 만들어진 지 넉 달이 지난 1946년 3월 10일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출범했다. 대한노총 결성식은 서울 시천교당에서 열렸다. 대한노총의 모체는 1945년 11월 21일 꾸려진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독청)>이다. 독청은 해방 후 우익세력의 집결체다. 이승만이 총재, 김구가 부총재를 맡은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익단체 독청 노동부에서 출범

독청은 산하에 노동부를 꾸려 좌익세력이 장악한 전평에 맞서 노동자 대중의 지지기반 확보에 나섰다. 『한국노총 50년사』(한국노총, 2002)에 기록된 당시 독청 노동부의 조직 활동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전진한은 독청내에 노동부를 신설하고 홍윤옥을 부장으로 하여 용산제작소, 조선피혁회사를 비롯한 영등포의 각 공장과 경전 전차직장 등에 조직적 침투를 전개하게 되었는데 용산제작소에서는 1945년 말에 공장내의 김재희, 김제성 등이 독청의 배창우, 김구(金龜) 등과 연결되어 독청 용산공작소 지부연맹을 조직하는데 성공했으며 1946년 초에는 경전과 영등포 일대의 각 공장에도 침투하게 되었다.『한국노총50년사』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

1945년 11월 21일 서울 천도교 대강당에서 43개 청년단체들이 모여 결성했다. 상록회, 만주동지회, 건국청년회, 애국청년회, 국민당청년부, 불교청년회, 대한혁신청년회, 북한청년회, 정의청년회, 대동단결본부, 고려청년회, 조선청년회, 기독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광복청년회 등이 참가했다.

이원보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에 따르면, 독청 청년부차장 홍윤옥의 권고로 김구라는 청년이 용산역 부근에 있는 우마차 노동자들을 모아 <우마차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김구는 자기 아버지가 경영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자주관리를 요구하자 상담차 미군정청 노동부를 찾아갔다가 미군정청 간부의 권유와 지도를 받아 노조를 결성한 것이었죠.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이 말은 미군정과 독청, 그리고 이후 결성된 대한노총 사이의 긴밀도를 엿볼 수 있다. 이원보는 대한노총도 ‘미군정청과 협의 속에 전평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을 결성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대한노총의 결성은 노동자의 권익 이전에 좌익 중심으로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얻어가는 전평에 맞서는 세력이 절실했기에 꾸려졌다. 『한국노총50년사』도 이 점을 분명히 밝히며, 대한노총을 반공투쟁 과정으로 봤다.

해방 직후 좌익 노동조직 전평의 확대강화를 저지하고 반공투쟁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민족진영의 청년과 노동자들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조직했다. 그런데 대한노총은 전평처럼 이미 조직된 전국적 산별 단위노조를 기반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지방 노동조합의 기반은 없는 상태에서 우익 민족진영의 청년단체 및 정당관계 인사들에 의해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었다. 대한노총이 참다운 의미에서 전국적인 노동조합을 총괄하는 조직으로 되는 과정은 이미 산별 조직에 뿌리를 박고 있었던 전평 산하 노조를 분쇄.축출하는 반공투쟁과정과 일치하는 것이다. 『한국노총50년사』

안재성은 독촉에 뿌리를 둔 대한노총이 ‘노동자를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님은 출범할 때부터 명확’했다고 『한국노동운동사』(삶이보이는창, 2008)에서 밝혔다. 우익 폭련단이며, 조선인 친일재벌의 자금을 받고, 경찰이 후원한 조직이라고 비판한다.

독청은 전국에 흩어진 우익청년조직 40여 개를 통합한 폭력단으로, 불교청년회와 기독교청년회, 천도교청년회 등 종교의 이름을 빌린 반공단체와 광복청년회, 북선청년회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조선인 친일재벌들은 이 단체에 막대한 자금을 공급했고 경찰은 뒤에서 이를 후원했습니다. 이미 해방 한 달 후부터 경찰의 지원 아래 곳곳에서 좌익계열 운동가들에게 폭력테러를 가하고 있던 청년단체들의 통합체인 독촉은 이승만을 총재로 선출하고 윤보선, 유진산, 김산 등의 지도를 받는 한편, 산하에 노동부를 만들어 전진한을 책임자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철도와 전기의 일부 노동자를 조직해 이듬해 3월에 대한노총을 만든 것입니다. 『한국노동운동사2』

노동자 48명이 참석한 출범식

전평 결성대회와 대한노총 결성대회에 참여한 조직과 노동자들을 보면 위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에서 봤듯이 전평 결성대회는 전국 1,194개 노동조합 소속 30만 노동자를 대표한 505명이 참석했고, 김삼룡이 영등포와 인천 등에서 조직 동원한 노동자 800명이 참석했다. 반면 서울 시천교당에서 열린 대한노총 결성대회는 용산공작소, 경성철도공장, 경성전기회사 등 15개 직장 48명이 참석했다. 이 48명도 노동조합을 대표하는 이는 아니었다. 노동문제연구소가 펴낸 『노동공론』(1971년 12월호)은 “사실상 노동자가 참석했다기 보다 청년운동하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대한노총은 노동자의 대표조직이기보다는 전평의 영향력을 ‘분쇄, 축출’하려는 우익 대항 조직의 성격이 강하다. 대한노총 결성대회에는 우익을 대표하는 지도자 김구,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등이 참석했다.

대한노총 선언문

일제의 기반과 질곡 속에서 민주광복의 정기를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견골열혈로 우리 노동자들은 해방된 단일민족으로서의 공존동생권을 갈망하며 회천의 위업을 달성코자 총궐기하여 자주독립을 지향하면서 환희작약하였다. 이에 우리는 모든 번잡한 이론을 타파하고 민주정치하에 만민이 갈망하는 균등사회를 건설코자 전국적으로 이를 발휘하도록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을 결성하여 일로 매진할 것을 선언한다.

대한노총 강령을 살펴보면 노동조합의 대표성을 띈 조직이라기에는 미흡하다. 전평이 최저임금제, 8시간 노동제, 동일노동 동일임금, 산전 산후 휴가제처럼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행동 강령인데 반해, 대한노총은 ‘심신을 연마하여 진실한 노동자로서 국제 수준의 질적 향상 도모’, ‘노자간 친선을 기함’처럼 노동자 대표 조직의 강령으로는 모호한 내용이 많다.

대한노총 강령

1. 우리는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주의 원칙으로 건국을 기함.
1. 우리는 완전독립을 기하고자 자유노동과 총력발휘로     건국에 헌신함.
1. 우리는 심신을 연마하여 진실한 노동자로서 국제 수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함.
1. 우리는 혈한불석으로 노자간 친선을 기함.
1. 우리는 전국 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함.

『한국노동운동사』(삶이보이는창, 2008)를 쓴 안재성은 대한노총에 대한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대한노총의 강령은 실로 노동운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자본적이었습니다.” 안재성의 대한노총의 선언문과 강령에 대한 비판을 조금 더 듣자.

모든 번잡한 이론을 타파한다는 것은 곧 사회주의를 거부한다는 뜻이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친선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리자는 말은 스스로 어용임을 밝히는 행위였습니다. 총력을 다해 건국에 헌신하겠다는 말은 있으나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총력 투쟁하겠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국노동운동사2』

뉴라이트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박지향은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2』(책세상, 2006)에 실린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 1045~1950」을 통해 대한노총의 성격을 규명할  내용을 보여준다. “조합원들에게서 회비는 거두지 않은 채 정치인 및 기업주들한테 재정 지원을 받아왔고, 사용자와 교섭을 벌인 증거도 없다는 점”을 들었고, 대한노총은 주로 감독이나 십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노동 대중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았다. 부산의 한 방직회사에서는 사장이 노조위원장이면서 회사 청년단 단장이라는 희극적인 사례도 있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전평의 대체물로 인정

미군정청의 경우 전평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결집하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으로 파악된다. 1946년 6월 2일 미군정은 의해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연합군 사령관의 노동정책과 노동문제 고문을 파견해달라고 요구한다. (<노동관계조사 사계권위자착경> 동아일보 기사 참조.)

노동관계조사 사계권위자 착경

상무부 노동국장 이대위 씨 발표에 의하면 군정청 요청에 의하여 재일본연합군사령관의 노동정책, 노동문제 고문으로 있는 노동고문 사절단 중 2명이 지난 2일 경성에 도착하였다. 즉 이 2명은 전시동원사무국에서 노동력 노동문제 상담역으로 있는 파울 스탠치필드 단장과 국립전시노동위원회 조선위원장으로 있는 윌리암 H. 맥퍼슨 박사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노동계의 제반문제 특히 노무관계, 노동자 보호 제도 제정에 중점을 두고 조사할 것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6.6.14

이들은 ‘한국 소위원회(Korean Subcommittee)를 꾸려 조사에 들어갔다. 이 조사의 결과는 미군정청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나왔다. 스탠치필드 등이 작성한 보고서는 6개 항으로 이뤄졌다. 대한노총을 면담한 뒤 작성된 이 보고서 내용을 안재성은 이렇게 정리했다. 대한노총은 회원 노조가 경영 측과 단체교섭을 맺는 것을 부적절한 처사로 보고 있다. 경영 측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다.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 임금인상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주당 작업시간을 제한해서는 안 되고 필요할 경우 하루 24시간이라도 노동해야 한다. 현재의 임금수준이 전체적으로 생계비를 충당하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지향은 한국 소위원회가 전평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고 서술한다.

이들은 “전평에 가입하지 않은 진정한 노동조합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며 그 정통성을 인정했다. (…) 결론적으로 전평 지도부는 좌파지만 공산당원은 아니며, “조선의 노동조합은 좌익이다. 조선에서의 유일한 좌익은 공산주의자들이다. 따라서 모든 조합은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통제된다”는 CIC의 공식은 위험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소위원회는 보았다.「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 1045~1950」

한국 소위원회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대한노총을 반조합주의적 단체라 규정하고 활동을 금지하라는 요구서를 미군정청에 제출한다. 박지향의 글에 따르면, 소위원회는 대한노총의 “유일한 목표는 노동자들을 정당한 노동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대한노총이 실상 정치 단체”라며 정당 등록을 강제하는 군정 법령 제55호 위반 여부 조사를 촉구하며, “사이비 단체의 성립을 저지하는 보호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군정청은 이 요구에 반한 행동을 이어간다.

이들의 보고에 따라, 미국 전시노동위원회는 대한노총이 반조합주의적 단체이니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켜야 한다는 요구서를 미군정에 제출합니다. 물론 미군정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한노총을 남한의 유일한 노동단체로 만들기 위해 지원을 강화합니다. 『한국노동운동사2』

한국 소위원회의 보고서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청의 지원을 받은 대한노총은 점차 세력을 넓혀간다. 1946년 철도 경성공장지부 건설은 전평에 맞선 공격적 조직 확대의 출발이었다. 대한노총은 9월까지 경성공장 3,700명 노동자 가운데 800명을 조합원으로 확보한다.

대한노총이 조직화 사업에 나갔으나 주된 힘은 노동자가 아니라 우익 청년단 소속이었다. 우익 청년단원이 대한노총에 가입해 활동했는데, ‘서북청년단 출신 이찬혁이 철도노조 조합장이 되고 민족청년단(족청) 출신 최용수가 전력노조 조합장으로 군림하는 식’이었다고 안재성은 밝혔다.

전평과 대한노총이 각각 개최한 1946년 메이데이 행사에 전평은 노동자 10만 명이 모인 가운데 진행했고, 대한노총은 이에 한참 뒤진 1,000명이 모였다. 대한노총이 노동조합을 장악해나가지만 실제 현장 노동자를 조직하는데 그리 관심이 없고, 전평이 노동조합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막는데 집중한 결과다. 곧 조합원이 노동조합의 주인으로 결집하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실천하는 데에는 대한노총은 관심이 없었다. 이원보는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절대적인 지원과 우익세력의 비호 아래 조직을 늘리면서 전평의 투쟁과 활동을 분쇄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고 밝혔다. 박지향은 ‘그럼에도 대한노총을 전평의 대체물로 인정한 미국은 그 체질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해방 직후 노동운동, 노동조합 활동은 전평과 대한노총의 설립과 초기 활동에서 보이듯이 당시 좌우익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대립한 정치상황과 밀접하다. 일례로 전평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지지로, 대한노총은 반탁 운동이 맞붙었다. 해방은 분단이었다. 소련이 진주한 이북과 미국이 장악한 이남은 삼팔선으로 갈라졌고, 이 삼팔선은 위도 상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한반도 방방곡곡 구성원들의 마음을 재단했다. 그 아픔은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전평과 대한노총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거나 평가하는 게 옳지 않다고 한다.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이 펴낸 『한국현대사 1』(풀빛, 1991)은 전평을 해방 직후 노동자의 유일한 조직으로 봤고, 대한노총은 관제 테러단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끝으로 살펴볼 문제는 해방 직후 노동운동의 전개에서 대한노총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존 여러 연구에서 대한노총을 전평과 질적으로 동일한 차원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심지어 대한노총이 조합주의적 이념에 바탕하여 노동자 대중의 일상이익을 옹호함으로써 좌익세력의 외곽단체로서 정치적 동원조직으로 일관한 전평을 대치하였다는 주장까지 제출되었다. 또한 전평=좌익, 대한노총=우익이라는 도식에 입각한 논의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평과 대한노총은 결코 동일한 질적 차원에서 병렬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전평은 해방 직후 노동자계급의 유일한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열기와 헌신을 바탕으로 결성된 혁명운동의 핵심적 토대였음에 반해 대한노총은 미군정의 교활한 분열책동을 바탕으로 급조된 사이비 노동집단이며 관제 테러단체에 불과한 것이었다. 부분적으로 몇 사람의 면면을 들어 대한노총을 조합주의를 바탕으로 한 노동자조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한국현대사 1』

대한노총이 미군정과 밀접하고 우익 세력과 테러를 일삼던 청년단들이 주도해 만들어졌고 활동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마저도 대한민국 노동조합운동이자 역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부끄러움의 역사를 깨끗이 씻고 이 땅에서 사라졌다고 할 수도 없다. 이보다 더 지독하게 부끄러운 역사를 다시 쓸 수도 있다. 2016년 새삼 대한민국 노동운동 역사를 다시 적는 까닭도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다. 혹 지금도 그 부끄러움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서 있지 않은지……. 대한노총인가 전평인가라는 소속 조직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어느 조직의 명찰을 차고 완장을 달았든 과연 노동운동가로서, 노동조합 활동가로서 부끄럽지 않은 지 이천만 노동자의 땀 앞에 성찰할 시간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