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도 죽을 병’
‘감기도 죽을 병’
  • 백민호_파이뉴스 기자
  • 승인 2006.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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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혈로 사는 ‘바람개비 소녀’

백민호 파이뉴스 기자 mino100@pimedia.co.kr

꼬마는 매일 꿈을 꾼다. 양 손에 바람개비를 쥐고 뜀박질이라도 하려는 걸까. 그러면 하늘 높이 날 수 있으려나. 숨이 차도록 달리고 싶다. 아이는 바람개비를 거실에 있는 화분에 식물처럼 꽂아둔다.

보경(11)이는 충남 태안에 산다. 3주에 한 번씩 혈소판 수혈을 받기 위해 수원 아주대학교병원을 찾는다. 아침에 집을 나서야 오후에 병원에 도착한다. 4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 수혈을 받고 돌아간다. 지쳐 늘어진 아이는 핏기 없는 얼굴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나…고칠 수 없는 거야?”
5년 전, 보경이는 병원에서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휘어진 엄지를 수술하러 간 자리였다. ‘재생불량성빈혈’. 혈액 세포를 만드는 골수에 문제가 있어 피를 전혀 만들지 못하는 병이다. 골격계 장애를 유발하는 이 몹쓸 병 때문에 아이의 엄지가 기형이 됐고, 달팽이관이 없어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보경이는 2.1kg의 저체중아로 태어났다. 한 살 때 심장봉합수술을 받았다. 심장에 있는 동맥관이 생후 1~2주가 지나도 자연적으로 덮이지 않았다. 얼굴색이 노랗게 떠있는 보경이는 조금만 추워도 입술이 시퍼렇다. 멍 자체가 몸 안에 생기는 출혈인지라 마음껏 뛰놀 수가 없다. 보경이에게 감기는 ‘죽을병’이다. 고열에 폐렴으로 번진다.

▲ 백민호 파이뉴스 기자 mino100@pimedia.co.kr
도화지 속에서 만나는 세상
보경이는 방바닥에 누워서 그림을 그린다. 색연필을 움켜쥔 오른손에서 얼룩말, 사자, 코끼리가 튀어나온다. 도화지 위에 아프리카 초원에서 볼 수 있는 야생동물이 뛰어다닌다. 계단이 절벽인 아이는 초원을 달리고 있었다. “여긴 북극”이라며 갈색 곰을 보여주는 보경이는 이어 “여긴 남극”이라며 펭귄을 그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그 먼 얼음 땅에 볼이 발그레한 자신을 그려 넣는다.

아이는 방바닥에 한 봉지 가득 공기돌을 풀어 놓는다. ‘공기돌 부자’인 아이는 쉬지 않고 공기를 가지고 논다. 금방 다섯 살을 먹더니 벌써 열 살이란다. 스무 살도 성큼 지나버렸다. 공기를 하면서 먹은 나이만큼 보경이에게 주어진 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지만 아이의 내일은 불확실하다.

아주대병원 박준은 담당의사는 “보경이는 지금 조혈모세포 이식을 해야 살 수 있다”며 “더 이상 놔두면 감염이나 출혈로 매우 심각한 상황까지 다다른다.”고 전했다.
국내 조혈모세포 기증자는 1994년부터 현재까지 8만8천여 명. 매년 기증자가 늘어나는 추세지만 미국, 일본, 대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해외에서 조혈모세포를 공수하는 경우가 대부분.

수술비 위해 두 집 가사도우미 뛰는 엄마
보경이는 일본에서 세 사람의 골수 일치자를 찾았다. 하지만 이들 모두 거절했다. 아이에게 남은 시간은 앞으로 1년. 차선책으로 제대혈 이식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번의 수술로 아이의 병이 완치된다는 보장이 없다. 엄마 심금옥(35)씨는 “임대아파트 보증금을 빼서라도 수술을 시키겠다”고는 하나 수천만이 드는 병원비에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제대혈 이식을 받으면 보경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요. 아이가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죠. 보경이가 건강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보증금 3천만원에 월 2만5천원 임대아파트에 사는 보경이네. 수술비만 5천만원이 든다. 하청업체 사무원으로 일하는 아빠는 한 달에 쉬는 날이 딱 두 번. 엄마는 인근 아파트에서 가사 도우미로 일을 시작했다. 두 집을 돌며 일 욕심을 부리다 몸살이 났다.

새벽에 끙끙거리는 아내가 남의 집에서 청소를 한다는 걸 뒤늦게 안 남편은 “미련한 사람아, 무슨 일을 그렇게 해…”라며 아내의 여린 등에 파스를 붙여줄 뿐 일을 관두라고 말할 순 없었다.

보경이의 수술이 결정되면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보경이는 3개월 여 엄마와 함께 병원에서 지내고, 두 살 아래 동생은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이모 댁으로 보내진다. 아빠는 일터가 있는 충남 태안에 남아있어야 한다.

보경이는 선물 받은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는 좁은 방에서 ‘쿵쿵’거린다. 이럴 땐 영락없는 열한 살 말괄량이 소녀다. 아직, “아이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엄마는 아침 저녁으로 보경이의 체온을 잰다. “엄마, 나…, 고칠 수 없는 거야?” 아이의 물음이 엄마의 귓전에서 떠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