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평의 9월 총파업①
전평의 9월 총파업①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3.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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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 노동?] 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 (3)

노동자는 언제 파업을 할까? 한반도 역사 이래 최초의 총파업이자 최대 규모의 총파업은 1946년 ‘9월 총파업’이다. 당시 나온 한 선언문은 파업에 들어간 이유를 이처럼 말한다.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아왔지만 이제는 참을 수 없다. 굶어죽기를 기다리든가 생존을 위해 투쟁하든가를 선택할 때가 왔다. 우리들은 투쟁을 선택했다.” 그렇다. 노동자가 파업을 선택할 때는 죽음의 문턱 앞이다. 싸우지 않고서는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순간, 파업을 선택한다. 참다 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유일한 길은 파업이다. 순식간,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진 9월 총파업의 출발점인 철도 노동자 총파업 성명서에도 ‘참다못하여 총파업에 들어갔다’고 밝힌다.

9월 총파업에 수십만의 노동자가 결집하고, 10월 인민항쟁으로 번졌던 배경에는 목숨과 같은 ‘쌀(밥)’이 있었다. 한 노동자는 「직업과 쌀, 나무를 다오」라는 글을 1946년 2월 19일자 <해방일보>에 기고했다. “(8월 15일 해방 이후) 다섯 달이 지난 오늘에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직장은 문을 닫고 쌀과 나무는 금보다도 더 귀해지고 오직 굶주림에 울며 추위에 떨고 있다.” 1945년 쌀 생산량은 이전 해보다 60%가 늘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자유판매제 식량정책은 일부 가진 자들의 매점매석을 부추겼다. 쌀값은 천정부지로 뛰고, 서민들은 쌀 구경하기가 힘든 쌀 파동이 일어났다. 여기다 미군정은 하곡수집령까지 실시해 농민들이 어렵사리 생산한 보리마저 헐값에 빼앗아갔다. 일제강점기에도 없던 하곡 공출 제도는 ‘보릿고개’를 견딜 마지막 밥줄을 앗아간 것과 다르지 않았다. 1946년 4월 서울에서 벌어진 시위의 구호에는 쌀과 죽음을 표출했다. “쌀, 쌀, 쌀을 다오. 쌀이 없으면 죽음을 다오!”

1945년 출범한 전평은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의 생존이 걸린 절규가 ‘파업’으로 흐르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미군정과 부득불 맞설 수밖에 없는 총파업이 미군정에 빌미를 제공해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정부 수립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의 관리인 제도는 앞에서 살폈듯이 전평과 대립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전평은 통일 자주국가 수립이 우선이라고 여겨 미군정과 충돌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쟁의부’를 ‘산업건설부’로 재편했고, ‘산업건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전평은 1946년 6월 13일에는 군정 협력에 관한 지령을 내렸고, 6월 17일 지령에는 파업과 태업은 ‘될 수 있는 대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중석이 쓴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역사비평사, 1997)에 실린 당시 전평의 지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당면의 조선 현실은 경제 부흥에 의한 자주 경제의 수립이 긴급히 요청되고 있으며, 우리 노동자의 생활 향상도 경제 부흥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우리는 경제 부흥과 노동 조건 개선을 병진시키는 투쟁을 전개시켜야 한다. 산업을 고의로 파괴하려는 기업가와 물가 자재를 방매하여 폭리를 취하려는 모리배가 있는 타방, 태업, 파업을 구실로 노조를 파괴하려는 여러 가지 음모가 있고, 기타 여러 가지 정치적 관계로 보아 파업, 태업 등의 전술은 될 수 있는 대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승리를 위하여는 파업이 절대 필요하다 할지라도 이를 분산적으로 무계획하게 기분적으로 단행한다면 승리할 수 없는 것이니, 금후에 있어서의 파업은 상부기관의 지도 없이 파업해서는 안 된다.

전평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동자들은 6월부터 파업 농성 등을 전개하며 미군정과 경찰에 맞섰다. 전평은 자생적인 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자 파업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며 파업 자체를 촉구하며 미국과 소련 군대에 협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안재성의 『한국노동운동사』(삶이보이는창, 2008)를 펼쳐 보자.

이 시기 전평은 나름대로 산업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극좌적이거나 급진적인 투쟁을 자제시키려 애씁니다. 해방 직후 우후죽순으로 터져 나온 노동자에 의한 공장자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이를 일본인 공장이나 친일독점자본에 제한시켰습니다. ‘양심적 민족 자본가나 개인 공장’에 대해서는 공장 관리에 부분적으로만 참여하도록 합니다.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이 노동조합의 경영 참여조차 강력히 제지하는 현실에서 북한과 같은 공장 국유화 정책을 기대할 수는 없으므로 공장 접수나 관리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지침까지 내린 바 있습니다. 1946년 들어 자생적인 파업이 잇달아 일어나자 파업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니 무조건적인 파업을 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미국과 소련 군대에 협조해야 한다는 지침도 내립니다. - 『한국노동운동사 2』

역사는 전평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미군정은 우익 세력과 결탁해 전평과 노동자, 농민들의 자주적인 투쟁에 대대적인 탄압을 벌인다. 미군정과 경찰은 우익 단체들의 테러를 수수방관하거나 부추겼다. 노동운동 세력에 가해진 테러가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는 인천자유노조 위원장을 지낸 이기섭이 한 언론에 증언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기섭이 말한 전평의 위상이다. “전평은 노동자들의 유일한 조직이었고 희망이었지.” 하지만 이기섭은 대한노총을 비롯한 우익 테러단의 폭력 때문에 전평에 가입할 수 없었다. “이들은 40-50명씩 떼를 지어 야밤중에 지붕을 타고 노조간부들 집을 습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 그러니 겁이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협잡군들이 모인 대한노총에는 들어갈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좌도 우도 아닌 그냥 자유노조를 표방하고 활동했지.”

전평도 그냥 맞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군정이 통일 자주국가의 동반자가 아님을 확인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전평의 산업건설운동은 ‘신전술’로 바뀐다. 최규진은 「1946년 9월 총파업」에서 신전술에 따라 9월 총파업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신전술이란 “지금까지 미군정과 그 비호하의 반동들의 테러에 대하여 그저 맞고만 있었으나, 지금부터 맞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정당방위의 역공세로 나가자. 테러는 테러로. 피는 피로서 갚자.”는 것이 그 뼈대였다. 이 전술이 옳은지 그른지는 곱씹어봐야 하겠지만, ‘미소공동위원회’마저 결렬되고 미군정의 탄압이 불어 닥칠 때 전평은 어쩌면 신전술과 총파업 전술을 쓸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46년 9월 총파업」

미군정의 노동정책은 1947년 7월 23일 공포한 법령 제97호 ‘노동문제에 관한 공공정책과 노동부 설치’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미군정은 이 법령에서 ‘노동조합의 발전을 장려한다’가 아니라 ‘민주주의적 노동조합의 발전을 장려한다’고 명시했다. 그럼 ‘민주주의적 노동조합’은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미군정하의 노동부의 답변은 이렇다.

민주주의적 원칙에 입각하여 조직 운영하는 노동조합, 즉 개인의 독단이나 강압으로 조직되지 않고 조합원의 총의로 조직되어 조합원 전체의 지지를 받는 조합원 전체를 위한 조합이다 [가운데 줄임] 노동조합이란 본래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노동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조직되는 단체 또는 그 연합을 말하고, 정치운동을 하는 단체나 그 연합은 그 명칭의 여하를 불문하고 노조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아래 줄임]

한국의 노동조합 정치활동 금지는 미군정의 노동정책에 그 뿌리가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미군정이 말하는 ‘노조로 인정할 수 없는 정치운동’은 우익 집단, 심지어 테러를 공공연히 사용하는 우익 세력이 주도하는 대한노총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전평 소속의 노동조합이다. 9월 총파업 과정에서 이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노총 50년사』는 “미군정이 1946년 7월 발표한 법령 제97호는 ‘민주주의적 노동조합을 장려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전평노선에 대한 공식적인 탄압의 전주곡이었다”고 밝혔다.

미군정 법령 97호와 관련한 뉴라이트 계의 시각은 다르다. 박지향은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 1045~1950」(『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책세상, 2006)에서 미군정이 법령 97호를 통해 ‘처음으로 전평을 상대역으로 인정한 상황에서 전평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린 것’이라고 한다.

그것(미군정 법령 97호)은 관계 개선의 첫걸음이었으며 당시 군정의 강경론자들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양보한 것이었다. 물론 군정 내 의견은 여전히 분열돼 있었지만 군정은 1946년 7월, 분명히 전평을 수용할 의도를 나타냈던 것이다. 후에 그 의도를 바꾸게 만든 것은 전평이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 때문인데, 전평의 입장 변화는 공산당의 ‘신전술’이 개입된 결과였다. 1946년 여름, 노사 관계가 특별히 불편해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군정이 처음으로 전평을 상대역으로 인정한 상황에서 전평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린 것이다. -「한국의 노동운동과 미국, 1045~1950」

이원보는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에서 미군정이 대한노총을 통해 전평의 활동의 투쟁과 활동을 어떻게 탄압했는지를 서술하고 있다.

미군정이 대한노총 조직 확장을 지원하는 방식은 경성전기회사에서 대한노총 경전노조를 유일 합법노조로 인정하기 위해 기명투표를 활용한 데서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전평 산하 조선전기노조 경전지부가 이미 조직돼 있던 경성전기회사에 대한노총 경전지부가 생기가 미군정은 전 종업원에게 전평과 대한노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기명투표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9월 총파업과 3월 총파업(1947년)으로 전평 산하 노조원들이 수천 명씩 검거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선택하라는 것은 바로 대한노총의 경전지부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름 아니었죠.

조합원이 5천 명에 달한 경성전기노동조합(경전노조)은 전평 결성 대회의 핵심조직으로 참가한 곳이다. 경성전기회사에서 벌어진 방법으로 전평 소속 운수부 해원노조, 부두노조 등도 무너졌고, 대한노총 산하 노조가 유일한 합법노조로 인정받았다.

박지향의 글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전평을 분쇄하는 데에는 동양방직의 경우처럼 대한노총을 조직하는 방법과 직접 경찰을 투입하여 전평 지도부를 내쫓아 조직을 와해시키는 방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동양방직 노동자들이 1946년 6월 파업을 시작하니 “(미군정 상무부) 섬유과는 회사측과 음모를 꾸며 8월 3일 대한노총 및 청년단원 700여 명을 동원하여 대한노총을 결성함으로써 전평의 조직기반을 흔들었다.”

경성전기노동조합의 균열의 시초를 안재성은 『한국노동운동사 2』에서 신탁통치 찬반 투쟁에서 찾는다. 해방 정국이라는 특수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념 대립이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씻지 못할 상처를 안긴 이 역사는 가슴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경전노조의 우경화도 반탁시위부터 시작됩니다. 반탁 집회에 참가한 일부 노동자들과 전차과의 정대천을 중심으로 한 중간관리자 14명이 자치위원회를 만들어 전평 소속 경전노조에 대항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에 경전노조는 회사에 압력을 넣어 이들을 해고시켜 버리는데, 해고된 이들은 이승만과 우익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아 1946년 3월 10일 대한노총 결성을 주도하게 됩니다. 대한노총 결성식에 참가한 노동자 48명 중 25명이 경전 노동자였다는 점과 정대천이 나중에 한국노총 위원장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이 해 9월 총파업으로 경전노조가 곤란에 처한 틈을 타서 원직에 복귀한 후 ‘경전자치노동조합’이라는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고 이후 남한의 합법적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70년 전 이야기지만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지속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한 자동차회사에서 대규모 정리해고가 있었다. 옥쇄 파업을 하며 저항했지만 구속과 해고의 칼날은 피할 수 없었다. 이후 7년 동안 노동자와 가족 28명이 세상을 떠났다. 유서도 없이 떠난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정신병원을 찾았다. 옥쇄파업 과정 중에 파업 중인 노동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상처를 준 이는 동료 노동자였다. 새로운 노동조합도 생겼다. 공장에 살아남은 노동자는 어느 노동조합을 선택할 것인가를 강요받았을지 모른다. 2015년 연말, 정리해고 맞선 투쟁을 시작한 지 2,413일 만에 복직과 관련한 합의문이 사용자와 두 노동조합 간에 체결됐다. 하지만 상흔은 지울 수 없을 거다. 물론 해방정국처럼 이념의 대립 때문은 아니었다. 어째든 본래 두 개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하나였던 노동조합이 갈렸기에, 2,413일이라는 숫자가 더 서럽고 아픈지 모르겠다. 뒤늦게나마 합의를 이뤄 위안이다.

민주노총이 최대주주로 참여한 진보정당이 분열되었을 때, 민주노총은 물론 단위 노동조합에 이르기까지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진행 중이기도 하다. 노동자와 정치, 노동조합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정치세력의 분열, 그리고 이념의 차이로 흔들릴 때 현장의 노동자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해방정국 노동조합 이야기를 새롭게 정리하며 노동조합에게 이념이란, 그리고 정치운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는 까닭은 왜일까?

한반도 역사 이래 최초의, 그리고 최대 규모의 그야말로 뻥 파업이 아닌 글자그대로의 총파업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1946년 9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