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만 원 하던 세가 백오십만 원인데, 긍게 문 닫고 나가죠
삼십만 원 하던 세가 백오십만 원인데, 긍게 문 닫고 나가죠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3.2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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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에서 이천 원 지니고 상경해 효자동네에 터 잡은 구두장이
서촌이라 불리며 하잘것없지만 잊히지 않은 풍경은 사라져 간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서촌 코리아나 화점(1

“어느 작은 마을에 마틴이라는 구두장이가 살았습니다. 마틴은 창문이 하나 있는 지하 방에 살았는데, 그 창문으로만 거리를 내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틴은 신발만 보아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의 신발은 거의 다 마틴이 고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친근한 이웃, 구두장이

러시아 출신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구두장이 마틴』은 이렇게 시작한다. 톨스토이는 『사람이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도 구두장이 세몬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톨스토이에게 구두장이는 서민을 대표하는 직업이자 당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비친 듯싶다. 그림 형제의 동화 가운데도 『양복장이와 구두장이』,『구두장이요정』이 있다. 그만큼 구두를 만들거나 고치는 사람은 우리 가까이에 친근한 존재였기에 문학의 단골 주인공이 되지 않았을까. 아 참, 덴마크 출신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두장이’였다. (그래서일까. 내겐 구두장이라는 표현이 친근해 제화공이나 제화기술자 대신 이 단어를 계속 쓴다. 제화점이나 구두점 대신 구둣방이 정겹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구두장이는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한 인간의 직업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오육천 년 전인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신은 샌들이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발이다. 고대 이집트 시대라면 인간이 원시의 삶을 벗어나 수메르에 이어 갓 문명을 싹 틔우던 때가 아닌가. 유목에서 벗어나 나일 강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으며 정착 생활을 했을 것이고, 남녀의 역할이 나눠지고, 계급이 생겨 왕조가 들어서고, 노예도 있지 않았는가. 누군가는 농기구나 무기를 만드는 대장 일이 뛰어나 대장장이라 불렸을 것이고, 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무두질하는 이는 무두장이라 불리고, 그 가죽으로 신발 만드는 재주가 특출 난 이가 있어 구두장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내 짐작이다.

지금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신발은 BC 3300년경의 이집트의 샌들 형태의 신발이라고 한다. 이집트(BC 3400~525)는 기후 조건상 열대지방의 열사(熱沙)로부터 발바닥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면과 발을 분리시키는 한 장의 나무판을 발바닥에 대고 끈으로 고정시킨 간단한 구조의 샌들을 신었다. 이러한 샌들의 어원은 그 생김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널판지’라는 뜻의 라틴어 샌들리움(sandalium), 또는 고대 그리스어 샌들리온(sandalion)에서 비롯되었다. 이집트인들의 신발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똑같은 것을 신었고, 일부 상류층에서만 이용되었다. 한편 앗시리아(BC 1200~540)인들은 메소포타미아 고원지대에 살던 산악 유목민으로 잦은 전쟁을 위해 남자용 샌들을 특별히 제작해서 신었고, 동부의 고원 산악지대에 흩어져 살았던 페르시아(BC 600~300)인들은 추운 기후에 대처하기 위해 구두창이 없이 부드러운 가죽으로 발목을 감싸는 모카신(moccasin)을 신었다. 크레타(BC 3000~1100)인들은 외출할 때는 샌들이나 굽이 있는 신발, 긴 부츠 등을 신었으며, 이러한 신발의 형태는 장식적이기보다는 기능적이었다.

고대 그리스(BC 1200~146)인들은 초기에는 모두 맨발이었으나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샌들, 부츠, 구두 등의 다양한 신발이 등장하였고 발의 형태에 따라 신발의 좌?우 구분이 생겼다. 에트루니아(BC 800~300)인들의 신발은 가장 단순한 슬리퍼형에서 샌들, 부츠형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슬리퍼는 한 장의 펠트나 천으로 간단히 발바닥과 발 위를 감싸는 형태였다. 로마 시대(BC750~476)의 신발은 그리스와 비슷하나 정교함이 더해졌다. 실크로 만든 슬리퍼에서 가죽을 소재로 한 부츠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고 그 중 샌들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엮는 끈의 모양이 그리스 때보다 더욱 복잡해져 로마 신발의 특징을 나타낸다. - 김은영?이미숙,「패션 컬렉션의 신발 디자인 연구」

패션의 완성은 구두라고 말한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의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했고, 18세기 로코코 시대에는 구두장이가 ‘예술가로서 높은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될 정도로 구두와 부츠는 복장과 예의를 중시하는 귀족에게 절대적으로 올바르게 유지해해야 할 목록 중 상위를 차지’했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하잘것없는 풍경

마흔일곱 해를 구두장이로 살아가는 정연수를 만난 건 설을 열흘 남짓 앞두고 한파가 매섭게 밀어닥치던 날이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잘것없는 것인데도 잊혀지지 않는 풍경인 것이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글이다. 내가 구두장이를 찾아 나선 까닭도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잊히지 않는 풍경이 내 발길을 이끌었기 때문은 아닐까. 어느 순간 밑창이 떨어져 혀처럼 날름거리는 신발이나 팔자걸음으로 바깥쪽만 사정없이 닳아진 굽을 갈기 위해 찾아가던 구둣방. 입학했다고, 취업했다고 부모님이 자식 손을 잡고 찾던 제화점. 이젠 찾기가 힘들다. 닳거나 떨어지면 버리면 그만이고, 언제든 백화점이나 상가에 가서 규격화된 사이즈 가운데 가장 잘 맞는 신발을 다양한 디자인 가운데 골라서 돈을 지불하면 그만이다. 얼마 전에 시장 떨이 판에서 새 것인 듯 중고 같은 운동화를 만 원을 주고 골랐는데, 이틀 만에 밑창이 분리가 됐다. 자세히 살피니 아직은 붙어 있는 다른 쪽 밑창도 조만간 해체될 위기다. 운동화 값이 만 원인데, 수선하는데 이보다 더 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지만 급한 김에 수선 집을 찾아 헤맸다. 크고 작은 재래시장이 두 곳이나 있는 동네인데도 신발을 고쳐주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좀 더 번화한 거리까지 가기에는 간신히 달랑거리며 달려 있는 밑창이 허락하지 않을 성싶었다. 별 수 없이 동네 철물점에서 접착제를 사서 대충 붙였다.

동네에서 구두장이를 찾기는 힘들어도 서울에서 구두장이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서 성수역으로 가라. 성수역사 이곳저곳에는 구두 관련 다양한 전시물이 있어 수제화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1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면 커다란 청동 부츠 위에 빨강 원피스를 입은 고양이가 새빨간 구두를 신고 앉아 있는 ‘고양이의 빨간 꿈’ 상이 있다. 수제화의 고향이자 중심지로 성수동을 일구려는 구두장이들이 이곳에 땀을 모아 꿈을 펼치고 있음을 빨간 고양이가 들려준다. 하지만 이곳에선 톨스토이가 소개한 구두장이 마틴을 만날 수 없어 애석하다. 동네 한 구석에 자리하고, 그 창 너머로 동네 사람들의 다리와 신발을 보며 누구인지를 아는 마틴, 마틴과 같은 구두장이를 만나려면 별 수 없이 오래된 동네를 어슬렁거려야 한다. 내로라하는, 구두 명장과 구두점이 이곳에 밀집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성수수제화타운>을 찾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왠지 전문 수제화 거리에서는 마틴을 찾기가 어려울 거라는 편견이다.

성수역 대신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왔다. 골목길을 따라 금천시장을 지나 통인시장 방향으로 걸으며 마틴과 같은 구두장이를 찾는다. 동네에 살며 이웃 사람들의 신발을 짓거나 고쳐주는 사람, 그런 가게. 물론 도심 큰길가에 가면 낮고 조그마한 컨테이너 안에서 구두를 닦거나 창갈이를 해주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주민이 아닌 외지인이 찾고, 먹을거리를 찾아온 유목인들을 맞이할 거라는 또 하나의 ‘편견’이 나를 골목길으로 이끈다. ‘일터는 예전 동네와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낯선 이방인들이 스쳐 지나가는 간이역처럼 되어버렸다’는 리처드 세넷의 말이 떠올라서일까. 팔 차선 도로 곁의 구둣방은 왠지 감옥처럼 여겨져, 이 철창 안에는 마틴이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 내 작은 소망 때문인지 모르겠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떠나는 이웃들

언제부턴가 서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행정구역으로 청운효자동이라 부르는 경복궁 왼쪽에 자리한 서촌은 인왕산의 너른 자락이 내려앉은 효자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창성동, 옥인동 일대다. 창성동과 효자동의 경계가 어딘지, 통인동과 누하동의 경계가 어딘지……, 지도를 보고서는 좀체 찾기 어렵다. 직접 찾아가면 더욱 헷갈린다. 골목과 골목으로 얽히고설켜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 골목에 들어서면 통인동인데, 골목을 꺾어 돌면 누하동인 식이다. 경복궁 오른쪽에 자리한 북촌에는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아 한옥이 으리으리하다면, 서촌은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 대갓집 풍취는 찾을 수 없다. 대신 서민의 정취가 깃들어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나지막한 처마 밑을 지나면 다듬이질 소리나 절구 찧는 소리가 담 너머로 스멀스멀 새어나올 듯하다.

서촌이라 부른다 해서 한옥 마을처럼 황톳길과 돌담길이 이어진 풍경을 기대한다면 실망이다. 서촌의 한옥들은 조선총독부가 들어선 1910년에 주택 계획에 따라 대규모로 지어졌는데, 전통 한옥을 개량한 주택이다. 북촌에서 본 한옥이 아니라 서민들의 살림집이라는 말이다. 청와대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옛집을 허물고 높은 집을 짓지 못해 오래된 동네 자취를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1990년께부터 이곳의 건축 규제가 느슨해지자 다세대 주택이나 상가 건물들이 야금야금 점령하기 시작했다. 차츰 한옥들이 사라져가던 2010년에 서울시는 서촌을 한옥 보존 구역으로 지정했다. 한옥 지정 구역은 한옥만 지을 수 있고, 한옥 권장 지역은 한옥 이외의 건물을 지을 수 있지만 전통 양식의 담장을 세워야 한다는 규정을 담았다. 북촌에 이어 서촌도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거리, ‘관광 상품’으로 떠올랐다. 미국의 기자 출신으로 도시 계획에 대해 독창적인 글을 쓴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 나온 말에서 서울시가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도시의 가로가 흥미롭게 보인다면, 그 도시는 흥미롭다. 가로가 따분해 보인다면, 그 도시는 따분하다.”

서울시의 보존 대책은 한옥과 전통 담장으로 도시를 흥미롭게 만드는 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일본의 건축가 쿠마 켄고의 말 앞에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연스러운 건축은 그것이 지어지는 장소와 행복한 관계를 가지는 건축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있으면 아름다운 동네가 된다. 아무리 멋있는 건물과 풍광이 있어도 그곳을 꾸리는 사람이 아름답지 않으면 불쾌한 마을로 기억된다. 아름답다고 알려진 관광지를 찾았다가 실망하며 돌아서는 여행객은 사람에 상처를 받지 자연이나 건축물에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다.

서른여섯 해째 <코리아나 화점>을 지키며 서촌 구두장이를 떠맡은 정연수는 서촌으로 알려진 이후로 가게 문을 닫고 하나둘 떠나야만 하는 이웃들을 말한다.

“지금은 서촌인데, 서촌이 아니여. 서촌은 무슨 서촌. 여기 작년에 많이 떠났어요. 올해도 많이 가. 가게 세에 못 견뎌요. 없는 사람들은 내기가 어렵지. 봐봐. 삼십만 원 하던 세가 백오십만 원인데, 어떻게 내냐고, 못 내죠. 긍게 문 닫고 나가죠.”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효자동네에 오다

정연수는 1980년에 서촌에 왔다. 정확히 말하면 효자동을 찾아 온 것인데, 구둣방은 누하동에 열었다. 열아홉 살에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서울로 온 정연수가 객지 생활 여섯 해 만에 자신이 주인인 첫 가게를 연 동네다. 이곳저곳 가게를 알아보러 다니다 효자동이라는 말에 맘이 꽂혔으리라. 정연수는 이곳에는 효자들만 살 것 같았다. 객지 생활에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져서 이곳에서부모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일하고 싶었을 게다. 그래선지 정연수는 이곳을 말할 때마다 ‘효자동네’라 부른다.

자하문로에 있는 통인시장 입구로 들어서 줄줄이 늘어선 가게를 살피며 끝까지 가면 시장 바깥에 정자와 자그마한 광장이 나온다. 이 정자를 끼고 있는 골목길을 따라 열댓 걸음 내려가면 <코리아나 화점>이 있다. 처음 구두점을 연 곳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지금의 <가정식당> 자리다. 이때 이름은 <서울 화점>이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이 식당 바로 밑에는 ‘고추간짜장’으로 알려진 오십오 년 된 중국집 <영화루>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칠십 년 된 <대오서점>이 있다. 함께 떡을 나눠 먹고 막걸리 잔을 돌리던 유서 깊은 이웃 가게다.

“여기 올 때 참 좋았어요. 옛날에는 인심이 참 좋았어요. 떡 하면 같이 노놔(나눠) 먹고, 술도 같이 노놔 먹었는데.”

지금은 책을 사거나 팔지도 않은 채 오래된 책과 함께 늙어가는 <대오서점> 간판을 이고 있는 한옥처럼 이 골목에는 나지막한 집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하나둘 네모반듯하고 높다란 건물들이 들어서며 한옥과 함께 이 거리를 지키며 ‘장소와 행복한 관계를 가지던’ 이들이 어디론가 떠났다.

“사람들이 저 위 옥인아파트에서 시장배기로 해서 여기 걸어 다녔어요. 아침에도 걸어 다니고 저녁에도 걸어오고 그러니, 그때 그 시절에는 일 끝나고 와서 여기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 먹어요. 술 한 잔 먹다보면 가게 들려 신발도 사 가고. 그때 그 시절엔.”

오래된 이웃이 떠나는 모습이 안타까워선지 정연수는 ‘그때 그 시절’이라는 말과 함께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쉼 없이 잇는다. 그때 그 시절 일 잘 하는 머슴은 한 해 삯이 쌀 여덟 가마요, 쟁기질 못하는 머슴은 쌀 네 가마 준 이야기며, 그 때 그 시절 버스 기사 한 달 월급이 일만 이천 원이었고, 영업용 택시 기사 임금이 삼만 원인 것도 잊지 못하고, 마을버스가 하루 여섯 번 다닌 그때 그 시절도 기억하며, 울퉁불퉁한 길에 리어카가 다니던 이야기를 유리창 너머 골목길을 바라보며 되뇌는 정연수, 세를 감당하지 못해 이 달(2016년 1월) 말까지 가게를 비워야 하는 미용실 이야기도 빼먹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부터 이 골목에 있던 이발소는 이미 떠났고, 다음 달이면 미용실도 그때 그 시절에 낀다. 남들은 ‘하잘것없는 것인데도 잊히지 않는 풍경’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정연수에게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여기 ‘효자동네’에 있기에 날마다 신발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오늘도 구둣방을 지키는지 모른다.

서촌이 ‘흥미롭게’ 보이려면 한옥과 돌담만으론 불가능하다. 서촌을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이 존중받고 존재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용케 맘씨 넉넉한 건물 주인을 만나 손님도 드문드문한 서촌에서 구둣방을 서른여섯 해 지키고 있는 정연수. 어찌 생각하면 한옥이 아니라 그가 있기에 서촌은 보존되고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정연수도 서촌 역사의 한 부분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