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어렵게 살고 그러니까 풀칠하면 돈 안 받아요
나도 어렵게 살고 그러니까 풀칠하면 돈 안 받아요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3.22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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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월급의 열 배 몸값 받던 구두장이의 봄날은 갔다
구둣방 꾸리고, 집 사고… 뭐든 어려워 무조건 노력했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서촌 코리아나 화점(2)

정연수는 충남 논산이 고향이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 들어간 중학교를 한 해 다니고 그만뒀다. 공부보다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다섯 살에 친구 아버지가 하는 공장에 들어가 구두 짓는 기술을 익혔다.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온갖 잔심부름을 하며 “막 맞아가면서” 배웠다. 가죽을 오리고, 구멍을 뚫어 꿰매고 하는 일을 해야 하니 송곳이나 칼에 다치기 일쑤다. 지금 수제화를 만들 줄 아는 구두장이들은 대부분 정연수처럼 눈물겨운 시간을 보냈으리라.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laborplus.co.kr

구두 한 켤레가 6개월 임금

일반적으로, 구두를 제작하는 기술은 일반 공산품과 달리 기술을 표준화하거나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는 구두의 제작기술이 장인적인 ‘도제(徒弟)시스템’을 통해 암묵지(Tacit Knowledge)의 형태로 기술자들에게 전수되고 학습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제품의 특성상 매우 세밀하고 정교한 기술투입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산 공정을 나누기 어렵고, 하나의 제품을 한 명의 기술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제작하여 완결 짓는 장인적 생산방식이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 박래현, 「서울시 제화산업의 지역 특성 및 혁신환경 분석」

수제화는 작은 작업장에서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우고 전수하는 방식이 오래 전부터 이어왔다.

“어렸을 때 배울 때는 막 맞아가면서 배웠어요. (기술자가 자신을) 막 망치로 때리고, (다쳐서) 손도 피가 나고, 여기 (자신의 손등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내보이며) 빵꾸나고, 송곳질 하다 칼질 하다 이렇게 나가는 거. 구두 만드는 이 칼로 면도도, (턱을 매만지며, 수염이) 싹 깎아져요. 잘 드니까 가죽도 쓱쓱 나가.”

공장에서 처음 하는 일은 완성된 구두에 광내기다. “그래서 내 손이 억세. 구두약을 바르니까 손이 억세졌어요. 휘발유 종류니까.” 중간 중간에 기술자들이 부르면 달려가 온갖 심부름을 한다. “그러다 배우는 거지.” 본드 칠하기며 구두를 꿰매는 일을 차츰 차지한다. 하지만 구두를 혼자 만들 수 있도록 전체 기술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기술을 완전히 배우면 독립을 하거나 다른 공장으로 옮기기 때문이다.

“직접 발 재어가지고 갑피해서 맨들고, 갑피만 있으면 뽄 내가지고. 이 가다(틀, 라스트)만 있으면 다 되요. 서울 시내 구두 (제대로) 만드는 사람 몇 명 안 돼요. 다 사다 팔아요. 수선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칼질을 못해. 저는 꼼꼼하게 배워가지고, 얻어 터져 가면서 배워가지고 한 번 하면 제대로 하지.”

수제화는 말 그대로 대부분의 공정이 손으로 이뤄진다. 만들 제품의 디자인과 크기가 정해지면 신발 모양의 틀인 라스트를 이용해 패턴 조각을 뜬다. 그 패턴을 이용해 구두의 외피와 내피를 재단한다. 이 재단된 조각을 디자인에 맞게 꿰매고 붙이는 조립 작업을 하는데 이 과정을 ‘제갑’이라한다. 이때 구두의 앞코와 뒤축의 모양을 잡아주는 선심과 원형을 삽입한다. 제갑한 구두의 상부에 창을 달기 위해 라스트에 씌운다. 이때 구두의 형태를 잡으며 창과 굽을 부착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게 ‘저부(밑바닥이 되는 부분)’ 공정이다. 이 과정에서 기술자의 손끝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구두의 품질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굽에 못질만 한 것과 본드 칠을 함께 한 제품은 겉으로는 눈치 챌 수 없다. 한 켤레의 구두가 만들어지기까지 삼백 차례의 장인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니, 손이 이제껏 겪어온 기억과 그 손이 한 켤레의 구두에서 움직인 동선과 머문 행적이 가치를 좌우한다.

“공장 제도하에서는 신발 한 켤레를 만드는 일에 값비싼 기계의 도움을 받는 60명 정도의 사람이 협력한다. 그런데 60명 가운데 어느 누구도 신발 한 켤레를 혼자서 만들 수는 없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말이다. 구두장이라 불리려면 제작의 처음부터 마지막 공정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물론 요즘은 맞춤 구두를 주문하는 손님이 많지 않다. <코리아나 화점>에도 기성화가 있고, 이를 판다. 하지만 자신의 발 치수를 재어 만든 정연수의 구두를 신어본 사람은 아직도 맞춤 구두를 고집한다. 기성화의 치수와 디자인이 다양해졌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러 신발 가운데 자신의 발에 ‘가장 잘 맞는’ 신발을 고르는 일은 될 수 있을지언정 내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찾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이제 맞춰 신는 사람 몇 명 안 돼요. 그런데 아는 사람은 계속 와서 맞추지. 용인에서도 오고, 포항에서도 오고 그래요. 미국에서도 오고. 미국에서 와서는 두 개씩 맞춰 가. 일본에서도 오고.”

정연수는 구두약에 거칠어진 손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외국에서요?”

아니 수출을 한다는 말인가 하는 의아함이 들었다.

“여기 살다 떠난 사람이지.”

‘효자동네’를 떠나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오래된 이웃들이 정연수는 고맙다.
“요즘 기성화가 다양하게 잘 나오는데 굳이 맞추는 까닭이 뭘까요?”

내 물음에 정연수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신어 보면 발이 편하다고. 기성화 사이즈하고 자기 발을 재면 딱 안 맞아요. 그 사람에 맞춰 굽도 조정하고, 사이즈도 맞추고 해서 만들지.”

최근에 제갑공정과 같은 단순공정은 기계화나 하청의 방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핵심적 공정이라 할 수 있는 저부공정의 경우에는 여전히 기계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기술자의 수작업보다 생산제품의 질이 낮아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 박래현, 「서울시 제화산업의 지역 특성 및 혁신환경 분석」

열다섯 살 정연수가 첫 일터에서 육 개월 동안 맞고, 다치고, 일해서 받은 임금은 구두 한 켤레가 전부였다. 당시 구두 한 켤레 가격은 천오백 원. 하지만 이것도 큰돈이었다. 결혼식 때 구두 한 켤레를 마련하지 못해 “남의 구두를 빌려서 장가가는 사람도” 꽤 있던 시절이다. 논산에서 “두 군데 더” 일터를 옮기며 기술을 쌓아 열아홉 살 “중간 기술자”쯤 되던 해에 정연수는 상경을 결심한다. 그때 손에 쥔 돈은 이천 원이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공무원 월급 열 배 받다

1974년 정월 설을 쇤 정연수는 논산역에서 “역마다 다 서는, 있잖아? 그 완행열차”를 탔다. 자신이 지닌 천 원과 “엄마에게 천 원 달라”해서 받은 돈을 호주머니에 담고 내린 서울은 낯설었다. 이천 원과 구두를 만드는 기술이 전 재산이었다. 서울은 정연수를 반기는 이는커녕 어디 하룻밤 신세를 질 사람도 없었다. 우선 먹고 자는 걸 해결해야 했다. 망우리 근처에 구두 공장이 있다는 말만 믿고, 무작정 망우리로 갔다. 지금의 상봉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의 한 공장이었다. 임금이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해가 지기 전 어떻게든 일자리를 잡아야 했다.

“밥 먹고 일 좀 하자니까 그냥 사장이 일하라고 그러데. 일이 많으니까.”

밥 먹고 잠 잘 곳을 마련했다는 마음에, 그리고 어머니께 “달라” 한 천 원을 갚기 위해 정연수는 군소리 없이 일을 시작했다.

“열심히 하니까 십만 원 주돼. 십만 원이면 굉장해. 경찰 봉급이 옛날에 만 원이요. 밥 먹고 그냥 주야간 하니까 십만 원 주돼.”

정연수는 자신이 “공무원 월급이 만 원할 때” 그 열 배가 되는 임금을 손에 쥐자 굵은 눈물이 심장에 뚝뚝 떨어졌을 것이다.

“주야로 일을 해요?”

“어, 아침 여섯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일한 거. 엄청 했지. 스무 시간 일해.”

“쉬는 날은요?”

“긍게 육 일 근무하고 하루 쉬죠.”

구두장이들이 한참 잘 나갈 때였다. 수작업에 의존해 소량 주문 생산을 하던 제화 산업이 전국적 유통망을 갖춘 대형 기업들이 들어서며 생산량이 급속히 늘던 때다. 손작업이 필요한 작업은 대형 구두 브랜드 공장이 아니라 영세한 하청업체에서 도맡았다.

고된 엿새의 노동을 하고 맞이하는 쉬는 날에는 술을 마시며 보내는 동료들이 많았다. 구두장이 몸값이 높은 때라 호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스무 시간 고된 노동의 보상을 술로 찾은 셈이다. 하지만 정연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육 개월 동안은 단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그 돈으로 “달마다 고향에 소 한 마리씩”을 사드렸다. 고향 집에는 어느덧 소 열 마리가 외양간에 자리했다. 어머니에게 꿔서 올라온 일천 원짜리 지폐가 소 열 마리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돈이 생겨도 따로 방을 얻지 않고 공장에서 생활했다.

“다락방에서 자고 땅바닥에서 자고. 설움도 많이 당했어. 텃세가, 공장에 호남 사람이 많았어. 난 충청도니…….”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기 싫은지 말꼬리를 흐린다.

“그만 두고 고향으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그런 이야기 (고향엔) 안 했어요. 그런 이야기 하면 빨리 내려오라고 하지. 내가 열심히 살고, 피곤해도 참고 견디자. 눈물을 흘리면서 참고 견디자.”

술을 먹지 않고 일만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정연수가 술을 좋아하는 공장 동료들에겐 밉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술 먹다 발로 (나를) 차 버리고” (……, 여기는 잠시 정연수의 말을 숨긴다.) 기술이 있으니 일자리 걱정은 없었다. 임금도 공장을 옮길 때마다 팍팍 올랐다. 성실하고 손재주 좋은 정연수, 거기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고 결근 없이 일만 하니 사장들은 정연수를 아꼈다. 당시 사장들은 “일 년에 집 한 채씩”을 살 정도로 돈을 벌었단다.

“내가 내 몸으로 노력해서 내 기술로 열심히 하면 되겠다. 그 생각으로 (일했지). 오로지 기술이 천직이라고. 그래서 딴 것은 안 하고 오로지 구두만 했어요.”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굽 삼천 원, 창 만 원

정연수는 “남의 집 살이” 육 년 만에 효자동네에 자신의 구둣방을 차린다. 소 열 마리 값을 제하고는 하루 스무 시간 씩 그야말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한 결과다.

구둣방을 차리자마자 일거리가 몰려들었다. 이웃들의 구두만 밀려든 게 아니었다. 가게를 연 1980년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군인들의 목소리가 클 때였고, 효자동네와 가까운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의 기세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수방사 군인들은 보급품 군화 대신 정연수를 찾아와 ‘사제’ 군화를 맞춰 신었다. 정연수가 하루 꼬박 꿰매고 풀칠해야 두 켤레를 지을 수 있으니, 밀린 주문을 따라잡지 못해 일거리는 늘 대기 중이었다. 자기 구둣방을 냈음에도 정연수는 새벽에 일을 시작해 오밤중까지 일했다. 하루 열다섯 시간은 기본이다.

“여기 수방사들, 하루 두 개씩 만들었어요. 전두환 때는 잘 됐어. (전두환이) 군 출신이니까 (군화의 불편함을) 잘 알지. 그래 발 편한 거 신어라, 그래서 사제 워커들 신었지. 김영삼 대통령 들어와 가지고 워커를 사제를 신지 말고 군인 것만 신어라, 그랬지.”

1980년대 후반, 구두 시장은 고급 싸롱화와 저가구두 시장으로 나뉜다. 고급 싸롱화는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수입된 고가품이다. 또 한편에선 중국의 값싼 구두들이 대량으로 유통되며 기존의 시장을 위협했다. 또한 1987년 민주화 이후 복장이 자유로워지며 정장과 구두 중심의 스타일이 운동화 중심의 캐주얼로 바뀐다. 그러다 아이엠에프 금융위기 전후에 한국 제화산업은 급격히 사양 산업으로 전락한다. 1995년을 정점으로 <코리아나 화점>에서도 맞춤 구두를 만드는 일이 뜸해졌다. 그 무렵 효자동네도 변화를 거치며, 서촌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정연수와 떡과 막걸리를 나누던 이웃은 줄어들고, 낯선 이들이 찾아든다. 낡은 한옥이 무너진 자리에 번듯하고 커다란 건물이 들어서니 “좋았던 효자동네 인심”은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정연수는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남의 집 살이 육 년’은 그야말로 객지 생활이었지만 <코리아나 화점>과 함께 한 효자동네는 객지가 아니라 고향, 자신의 제2의 고향이기에.

“여기서 1983년에 결혼했고, 딸 둘 낳고, 아들 낳았으니까. 두 딸은 시집들 잘 갔어요.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반이야.”

정연수는 지금의 삶이 다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다.

“연애결혼 하셨어요?”

“형님이 대전 사는데, 거기에 사는 사촌 언니가 중매해서 만났지.”

“대전이면 먼데, 데이트는 좀 하셨어요?”

“데이트는 뭐. 8월 달에 처음 만나고 11월에 결혼했죠. 데이트는 못했죠. 신혼여행은 경주 불국사 다녀왔는데, 뭐 그렇고. 부암동에 방 한 칸짜리에 신혼살림 차리고. 셋집 살 땐 애들 있다고, 운다고 방도 안 주고 해서 어려웠지.”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구두장이 정연수는 톨스토이의 글에 나오는 구두장이 세몬이나 마틴처럼 어렵게 살진 않는다. 집도 샀고, 막내 교육비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벌었다. 하지만 쉽게 번 돈은 없다. 구두장이 마흔일곱 해, 그동안 여행 한 번 가지 않고 삼백예순날을 구두와 함께 해 “어려워”하며 일군 거다.

“(결혼하고) 삼십 년 동안 꼼짝 안 했어. 가게 운영하기 어려워. 집 장만하기도 어려워. 뭐든지 할라고 노력을 해야. 무조건 노력을.”

역사학자인 제리 멀러는 이런 말을 했다. “한 때 ‘사치품’이었던 것이 이제는 ‘일상용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상용품’은 ‘필수품’이 되었다.” 사치품이었던 구두가 일상용품이 되어 필수품처럼 사람들이 지닐 때 구두장이가 되었던 정연수. 이제 그 필수품을 만들고 팔던 구둣방을 찾는 손님이 뜨문뜨문하지만 정연수의 삶과 망치로 “막 맞으며” 배운 기술은 여전히 영국신사들의 구두코처럼 빛난다. 찾는 이 없어도 구두장이 마틴처럼 오늘도 창 너머로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의 다리를 바라보는 정연수는 영원히 ‘효자동네 구두장이’로 남고 싶은 꿈을 피우고 있다.

“굽 삼천 원, 딴 데는 오천 원 받아요. 창은 만 원, 딴 데는 이만 원 받아. 여기 떠난 사람이 아직도 찾아와. 시골 같은 (내) 마음이 안 변하면 돼요. 내가 어르신들 오면 돈도 안 받아요. 그냥 가시라고. 나도 어렵게 살고 그러니까 풀칠하면 돈 안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