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5.09 14:51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서방시계’를 아시나요? 빈곤의 시절 멈춘 시계를 되살린 장인들
시계골목은 저물어도 손의 공간에 자리한 기술은 째깍째깍 움직인다
[노동이 머문 오래된 공간을 찾다]경민사(1)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어떤 이미지에 대한 추억은 어느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일 뿐이다.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2 - 스완네 집 쪽으로2』

예지동 시계골목을 찾아간다. 종묘에서 바라보면 세운상가 오른쪽은 장사동이고, 왼쪽이 예지동이다. 시계골목은 광장시장 맞은 편 종로4가 사거리에서 청계천을 향해 한 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골목을 일컫는다. 이백 미터 남짓한 예지동 시계골목에 들어서면 발걸음이 움찔한다. 뭔가가 있는 듯한데, 무엇도 없음직한 분위기다. 생전 처음 여행 간 이국땅에서 길을 찾다가 슬럼가에 접어들었을 때의 느낌이라고 할까. 분명 유리 진열장이 거리에 놓여 있어 영업을 하는 듯 보이는데도 왠지 오래된 흑백사진의 풍경처럼 과거에 멈춘 듯한, 그래서 현재의 공간이 아닌듯한. 마르셀 프루스트가 마주한 이미지처럼. “아!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

예지동 시계골목을 걷다

1950년대 청계천을 따라 시계를 팔던 이들이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자 예지동으로 하나둘 모여 들었다. 골목 좌우로는 1930년대 지어진 한옥이 줄지어 있었고, 담장 앞에는 사과궤짝을 진열대 삼아 고무줄에 시계를 매달아 파는 노점이 늘어나며 예지동 시계골목이 꾸며졌다. 차츰 사과궤짝은 유리 진열장으로 바뀌었고 한옥 뼈대는 놔둔 채 상가로 리모델링됐다. 전국에서 알아주는 시계장이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세상에 나온 온갖 시계들이 이 골목에서 거래됐다. 예지동 시계골목에서 구하지 못할 시계가 없듯이 이 골목에서는 고치지 못하는 시계도 없다. 시계를 생산한 회사가 지구상에서 사라져 부품을 공급하지 않더라도 예지동 시계장이들은 인공심장을 이식하듯 부품을 만들어 멈춘 시계의 생명을 되살렸다. 한때는 고장 나거나 버려진 시계의 부품으로 장기기증을 통해 이식하듯 ‘신상’ 시계를 생산하기도 했다. 이런 시계를 ‘케이스갈이’ 시계라고 불렀고, 때론 ‘이서방 시계’, ‘김서방 시계’식으로 우스꽝스러운 ‘브랜드’가 부쳐져 거래됐다. 풍요의 시절에는 쓰레기를 양산하지만 빈곤의 시절에는 폐기물마저도 새로운 생산물로 변신시킨다. 사과를 담았던 궤짝은 버려지지 않고 진열장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국내 생산이 전혀 없어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사치품인 손목시계는 케이스갈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시계의 실용을 누릴 수 있게 한 셈이다. 그야말로 노동의 위대함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이지 않는가. 예지동 시계골목의 시계장이들은 이처럼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며 정체성을 확립했다.

인간의 노동은 엄청난 생산 자원이다. 또한 창의력 발현의 공간이자 기쁨, 자부심, 인정, 사회적 연대감의 원천이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직업상의 활동은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본질적 요소로 작용한다.

- 요아힘 바우어, 『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 갈까』

공장에서 얼마 사용하지 않아 쓰레기가 될 상품을 만드는 인간의 손과 수명을 다한 물건에 새 생명을 심는 인간의 손은 ‘노동하는 손’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할지라도 그 결과물의 가치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생산물이 시장에서 얼마에 팔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임금이 오르고 물질의 풍요를 누릴수록 일에서 보람을 찾지 못하고 삶의 허기가 깊어지지 않는가. 노동하는 손의 무게가 갈수록 하찮아지기 때문이다. 손만이 아니다. 인간의 지능도 위협받는다. 얼마 전 바둑 대결에서 알파고에 이세돌이 졌을 때 인간은 위협을 느꼈다. 언론과 지식인 들은 인공지능으로 사라질 인간의 노동이 무엇인가를 떠들며 호들갑이다. 가치를 창출한다는 인간의 노동이 자신이 가치를 부여한 생산물에 지배를 당할 것이라는 공포감을 퍼뜨린다. 인간의 지능에 가까운 생산물을 만든 기술(노동)에 찬사 대신 내 일자리를 빼앗을 거라는 적대심을 품어야 한다니! 얼마나 가슴 아프고 화가 치솟는 세상인가. 문제는 알파고가 아니다. 알파고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는다. 지배하려는 욕망도 없다. 인간이 보잘 것 없어질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인간이 인간의 노동을 지배해 왔고, 지배하려고 할 뿐이다. 인간의 노동은 기계보다 못한 존재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해 노동의 가치를 끊임없이 하락 시키려는 세력. 노동을 값어치 있게 여기며 일하는데, 당신의 노동은 가치 없음을 주입시키는 집단. 경쟁력만을 되뇌며 일터에서 사람을 분리하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음모일 뿐이다. 아, 이젠 일에서 기쁨을 얻고 행복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병원 심신상관의학과 교수 요아힘 바우어는 “공명을 경험할 수 없는 곳에서 하는 일은 곧 고통이자 고뇌”라고 말했다. 21세기 노동하는 인간은 ‘공명의 경험Resonanzerfahrung’이 차단된 일터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일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고 기쁨을 만끽하는 곳에서, 또한 하고 있는 일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재인식하는 곳에서, 그리고 한 일에 대해 인정과 존중을 받는 곳에서 일은 ‘공명의 경험Resonanzerfahrung’이 된다. 성찰과 공명의 경험 추구는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기본 동기다. 이는 철학적이며 사회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다. 또한 공명의 경험은 성공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체험이다.
- 요아힘 바우어, 『왜 우리는 행복을 일에서 찾고, 일을 하며 병들어 갈까』

취재 그딴 거 해서 뭐해!

예지동 시계골목에 들어서면 문이 닫힌 점포들이 꽤 있다. 이곳이 시계의 메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시계상이 바글바글 거렸으며 시계수리만을 전문으로 했던 사람들이 이백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무엇이 그들을 이 골목을 떠나게 했을까? 아직도 낡은 건물과 셔터 내린 가게들 사이로 시계를 펼치고 있는 이들은 왜 떠나지 않는 걸까? 시계골목을 걸으며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물음표가 콕콕 찍힌다.

‘각종 시계 수리 전문’이라고 오래 전에 적은 듯한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독서실 책상만한 자그마한 작업대 앞에서 오른쪽 눈에 동그란 확대경(루페)을 낀 채 시계의 내부(무브먼트)를 들여다보며 핀셋과 자그마한 드라이버를 연신 번갈아 가며 일하는 흰머리 가득한 시계장이가 있다.
“선생님, 이곳에서 시계 수리하신 지 오래 되셨나요?”
늙은 시계장이는 한 쪽 눈에 확대경을 낀 채 고개를 들어 누군가 하며 힐끔 쳐다본다.
“왜요?”
퉁명스럽다.
“저, 예지동 시계골목 이야기 좀 듣고 싶어서요.”
“난 그딴 거 안 해요. 취재한다고들 찾아오는데 그딴 거 해서 뭐해.”
딱 잘라 거절하며 고개를 작업대에 고정시킨다.

오십 년 가까이 이곳에서 시계수리를 해왔는데 왜 할 말이 없겠는가. 지금 셔터 내린 가게들이 있는 이 예지동 시계골목을 바라보면 울화통이 터져서가 아닐까. 그의 입이 닫힌 까닭과 분노는 묻지 않아도 알만 하다. 2006년 예지동 시계골목 재개발 계획이 시행되며 이곳에 있던 시계장이들을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는 <세운 스퀘어>로 일부는 길 건너 종묘 옆 봉익동 귀금속거리로 떠났다. 그런데 이 계획이 백지화됐다. <세운 스퀘어>로 간 이들은 예지동에 새 상가가 들어서면 입주할 예정이었는데 오도 가도 못하는 디아스포라 신세가 됐다. 예지동 시계골목은 어정쩡하게 됐다. 이미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아 시계골목의 위상은 무너졌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처 떠나지 못한 이들만이 남아 옛 시계골목의 명성을 지키고 있는 거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알랭 드 보통은 ‘건물은 말을 한다’고 했다. “그것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주제들에 관해 말을 한다. 건물은 민주주의나 귀족주의, 개방성이나 오만, 환영이나 위협, 미래에 대한 공감이나 과거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한다.” 푹푹 분노의 한숨을 내뿜으며 그저 낡아만 갈 수밖에 없는 예지동 시계골목 상가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골목과 함께 늙어가는 시계장이는 ‘과거에 대한 동경’ 때문에 건물을 벗어나지 않는 건 아니리라. 골목으로 꽃샘바람 한 줄기 밀려든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말하지 않겠다던 시계장이는 다짜고짜 빨간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끌어다 옆에 앉자 내쫓지는 않는다. 말을 걸면 “그건 알아서 뭐할라고? 다 소용 없어. 이젠 끝이야. 끝.” 하며 확대경으로 시계만을 들여다본다. 끈덕지게 앉아 그의 손놀림을 지켜봤다. 정성이 갸륵했는지 확대경을 빼고 돌아앉는다. 그동안 쓴 글을 보더니, “여기 티브이에 나왔던 그 대장간 아니야?”하며 관심을 보인다. 그렇게 대화의 문이 열렸으나 끝내 글로 옮겨지는 일은 거부했다. 다 소용없는 일이기에.
“네. 선생님 마음 충분히 알겠습니다.”하며 돌아서는데 그런다. “어 나랑 종씨네.”

미로에서 찾은 시계 수리방

예지동을 떠난 시계 수리 기술자들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는 종묘와 단성사 사이 ‘종로 귀금속거리’로 간다. 좁은 골목이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얽혀 있다. 상점들을 기웃거리며 골목을 어슬렁거리면 어디로 들어왔고, 지금 어디쯤 있고, 다시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귀금속과 시계 상점 틈새로 시계 수리를 하는 가게들이 보인다. 한 명이 일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책상을 일렬로 혹은 기역자로, 혹은 등을 마주하고, 곧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작업대를 놓고 두 명, 혹은 서너 명이 일하는 시계 수리 전문점들. 누구를 취재할 지를 생각하며 골목 이리저리를 헤매다 찜해 둔 곳을 다시 찾아가려면 길을 잃고 망연자실한다. 그러다 그 미로 같은 골목에서 정말 가게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 건물과 건물 사이에 끼여 있는 시계수리 전문점을 찾았다. <경민사> 다시 찾으려면 도저히 찾아올 자신이 없어 무작정 미닫이를 밀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좀 여쭐게 있어 찾아왔습니다.”
우람한 체격만큼이나 환하게 핀 얼굴, 쌍꺼풀이 짙은 사내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아 앉으세요.”
누군지, 왜 찾아왔는지 묻지도 않고 자리부터 권한다. 작업 의자 뒤로 겨우 한 사람 지나갈 간격을 두고 벽을 등받이 삼아, 아래는 수납함으로 이용하는 접대용 의자가 있다. 그간 취재해서 쓴 글들을 보여주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쌍꺼풀이 매력적인 큰 눈을 잠시 출입문 너머에 고정시키고 생각에 잠긴다.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합시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그렇게 <경민사> 김동선과 인터뷰는 봄바람이 매섭다 따사롭다 변덕스러운 삼월에 네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 아홉 살에 첫 공장 생활을 했고, 11살부터 금은시계방에서 일을 배운 김동선. 그와 시계가 얽힌 반세기는 과거가 아닌 오늘의 노동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이 되리라는 기대가 밀려왔다. 역사가만이 역사를 기록하란 법은 없다. 김동선은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역사를 기록한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삶의 전망에 대한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해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현재에 무관심한 이유는 우리가 현재를 통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미래가 두려운 이유는 미래가 뜻밖에 달갑지 않은 시련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생각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안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운명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기억을 꺼내기 힘든 이가 있는가 하면 도저히 말할 수 없을 듯한 과거도 밝게 구술하는 이도 있다. 김동선은 후자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과거를 잊고 싶어 하고, 현재를 외면하려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불안정이 선택이 아닌 운명의 시대기 때문이라고 한다. ‘비정규’와 ‘불안정’, 그리고 ‘특수’하고 ‘임시’의 노동이 난무하는 시절, 가혹한 운명의 시대다.

서울내기~ 맛 좋은 다마내기

충청도 음성에서 태어난 김동선은 어렸을 적 식구들과 함께 이모가 있는 대구로 이사했다. 이모는 만촌동에서 살았는데, 가까이에 있는 금호강자락 동천유원지에서 장사를 했다. 이모네 방 한 칸을 신세지며 살았다. 어머니는 생계방편으로 동촌유원지 보트장 옆에서 뻥튀기와 같은 과자를 파는 노점을 차렸다. (아버지와 형제 남매 관계를 서술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어 이 정도로 갈음한다.)

ⓒ 이현석 객원기자 175studio@gmail.com

어린 김동선에게 대구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만촌동은 집성촌으로 타지에서 온 이들이 없었다. 만촌동 토박이 아이들은 대구말씨를 쓰지 않고 서울말씨를 닮은 충청도 억양을 쓰는 김동선을 놀렸다.
“서울내기 고래내기 맛좋은 다마내기~~”
김동선이 집밖으로 나오면 동네아이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며 쫓아다녔다. 특별한 놀이거리가 없어 따분했던 차에 생전 처음 자신들과 다른 억양의 말을 쓰는 외지 아이가 왔으니 신이 난 거다. 어떤 때는 골목에 숨어 있다가 김동선이 나타나면 발을 걸거나 뒤를 살금살금 쫓아와 뒤통수를 툭 때리기도 했다. 동선은 뒤에서 졸래졸래 따라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피해 뜀박질로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 다니기도 하루 이틀이지 않는가. 놀리고 때리는 아이들이 무섭기도 했지만 이대로 놀림 받으며 살아가야 할 자신의 처지가 더 두렵고 무척이나 서러웠다. 김동선은 주먹을 움켜졌다. 자신을 놀리는 아이가 있으면 옆길로 도망가질 않고 뒤돌아 멈췄다.
“그만 하고 꺼져라!”
동선이 눈썹에 힘을 주고 말했다.
“고마 안하면 우짤래. 우짤낀데. 서울내기 고래내기 맛좋은 다마내기…….”
김동선은 손을 움켜 쥔 채 달려가 노래를 하는아이의 입술을 향해 냅다 주먹을 뻗었다. 피가 터졌다. 주위의 아이들은 놀라서 주춤했다.
“제가 여덟 살 때인가 그런데 따라다니면서 놀려대니까, 서울내기라면서, ‘서울내기 고래내기 맛좋은 다마내기(김동선은 당시 아이들이 불렀던 음과 박자를 살려 부른다)’ 난 겁이 나니까 자꾸 애들을 때린 거예요. 안 맞을라고. 쫓아다니니까 겁이 나지 않습니까. 안 맞으려고 때린 게 자꾸 이 애들 저 애들 때리고 그러니까 동네에서 쫓아내라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려고 한다고 그래서.”
김동선은 그 시절을 희미한 웃음으로 떠올린다.
동천유원지 뙤약볕에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 과자를 팔고 돌아오는 어머니를 동네 아주머니들이 불러 세운다.
“동선이 어매여, 나 잠 보고 가이소. 울 아 얼굴 좀 보란 말이오.”
그때마다 어머니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싹싹 빌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 한다’며 당장 마을에서 떠나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를 때, 어린 동선은 고샅 귀퉁이에 숨어 고개 숙인 어머니의 모습을 서럽게 바라봤다. 자신 때문에 “다 쫓겨나게 된 형편”이었다. “이모가 아무리 커버를 해줘도 안 되는 겁니다.” 고개 숙인 어머니를 보면 아이들과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다음 날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다시 마주치면 저절로 주먹이 나갔다. 김동선 식구들은 달리 집을 옮길 형편이 아니었다. 이모 집에 얹혀살아도 어머니의 과자장사로는 겨우 식구들 목구멍에 풀칠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딴 동네로 옮겨 집을 구할 돈도 없었고, 생계방편이 동천유원지인데 만촌동을 떠나면 새 일거리를 찾아야 할 실정이니, 그야말로 난감했다. 어린 마음에 동선은 생각했다. “에이 이럴 바에는 나만 집 나가면 편하겠다.” 집을 나가 돈을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단한 어머니의 짐을 덜어 살림에 도움도 주고 싶었다. 돈을 벌어 다른 동네에 방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참 철없는 생각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의아하다. “그 시절엔 지금 아이들보다 정신연령이 더 높지 않았습니까.” 김동선의 회고다.

동선은 이모와 함께 대구역 인근 칠성시장에 갔을 때 자신 또래의 아이들이 나무판 위에 땅콩을 올려두고 팔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걔들도 하는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홉 살 동선은 장롱 안에 어머니가 둔 돈을 “홀랑 훔쳐가지고” 집을 나갔다.
“이만한 판대기에 멜빵을 걸어가지고 다니면서 땅콩 파는 걸 봤거든요. 껌도 넣어갖고 파는 거. 이모랑 시장 같이 가서 그걸 한 걸 본 거예요. 그래 바로 대구역으로 가서 사과 궤짝 주워가지고, 못 주워가지고, (나무판을) 만들어가지고, 멜빵 이리 해가지고, 있는 돈으로 땅콩 떼어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