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막는 것이 우선
죽음을 막는 것이 우선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6.06.15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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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화권이든 가장 중한 범죄로 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의이든, 고의가 아니었든 말입니다. 이처럼 전 세계 인류가 공감대를 갖고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처럼 다양한 목적과 동기를 갖고, 동종을 많이 죽여온 생물도 드물 것입니다.

인종이나 이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구성원을 절멸시키려는 행위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런 행위에 이름도 붙였습니다. 그리스어로 인종을 가리키는 ‘genos’와 살인을 가리키는 ‘cide’를 합성해 새로운 용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는 1944년 법률학자 라파엘 렘킨이 국제법에서 집단학살을 범죄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만든 용어입니다.

제노사이드가 공식적으로 범죄로 인정된 것은 1945년 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나치의 전범을 기소하면서부터 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이런 대량학살은 인류의 문명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베트남에서, 캄보디아에서, 코소보에서, 한반도에서, 전쟁과 분쟁을 겪었던 땅이라면 어디든 끔찍한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세대를 넘어선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삼국지’는 다양한 콘텐츠로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재일교포 스토리 작가 이학인이 참여한 ‘창천항로’라는 만화도 인기가 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 악역으로 낙인 찍힌 조조를 재해석한 이 작품 이후, 조조 중심의 삼국지 해석이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원작과는 다른 내용이지만, 조조의 남하 정책에 맞서 연합군을 구성해 이를 막고, 종국엔 천하삼분지계를 완성시키려는 제갈량은 동오의 책사들과 설전을 벌입니다. 여기서 제갈량은 조조의 악행에 대한 근거로 ‘조조 세력의 융성 이후 중국의 인구는 격감일로에 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생물학적인 본성에도 어긋난 행위라는 주장인데요. 전쟁을 앞두고 군사들이 논하긴 다소 구름에 뜬 얘기 같지만, 이는 193년부터 194년 사이 서주 침공 당시 조조군이 10만 명에 달하는 서주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비판이기도 합니다.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니까요.

끔찍한 이야기거리를 꺼낸 이유는 세월호와 광주의 죽음에 대한 아픔을 상기하고 있을 무렵, 유난히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죽음들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책임에 대한 시비로 불거지는 게 못마땅해서입니다. 구의역에서, 남양주 지하철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들의 소식은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며 보냅니다. 일이, 일터가 삶의 기반입니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거기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일터’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이고, 그 길에 ‘동반자’가 되는 것이 <참여와혁신>의 미션입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가, 일터에서 사람들이 다치고 죽습니다. 행복한 일터와 거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 반대의 극점에 있는 현실들에 무얼 갖고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고의성이 없었기 때문에 책임이 경감된다든지, 혹은 아예 책임의 주체가 불명확하다든지, 그래서 결국엔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자조가 들리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든든한 안전장치를 갖춰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