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노총, 기득권 노린 내부분열 계속
대한노총, 기득권 노린 내부분열 계속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7.1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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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평 와해 이후 이승만 정권 꼭두서니로 전락
단독정부 수립 기여한 대한노총, 사실상 노정통합체제
[왠 노동?]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7)

대한민국 단독 정부 수립에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전평은 역사의 수면 위에서 사라졌다. 대한노총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유일한 노동조합 대표 조직으로 군림하게 됐다. 전평이 단독 정부 수립에 최대의 걸림돌이었다면 대한노총은 단독 정부 출범의 최대 기여세력임이 분명하다. 앞에서 살폈듯이 대한노총 위원장인 전진한이 사회부장관을 겸임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평 와해 이후 대한노총

전평의 와해와 단독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한노총이 합법적이며 유일한 전국적 노동조합 조직일지 모르지만 노동조합의 ‘대표성’을 지녔는가의 질문에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1946년 11월에 전평과 대한노총 두 조직의 조합원 수는 30만 명에 달했다. 전평은 1946년 9월 총파업 이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음에도 그해 11월 24만 명이 넘는 조합원을 지녔다. 당시 대한노총 조합원은 5만 7천 명이었다.

전평이 와해됐으니,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대한노총 조합원은 급격히 늘어나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1948년 9월에도 대한노총 조합원은 4만 6천 명에 불과했다. 두 해 전보다 오히려 조합원이 1만 명 이상 줄었다.

송종래가 대표 집필한 『한국노동운동사4』(지식마당)에 따르면 대한노총은 ‘노동대중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1946년 9월 총파업 이후 전평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전평 조합원의 대한노총 가입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해방시기 노동운동에 참여했던 총 노동조합원 중 대한노총소속 조합원은 불과 15%에 그쳤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대한노총은 그의 지지기반이 약했고, 노동대중을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1949년 6월에는 683개 노동조합, 12만 8천 명이 대한노총에 가입했다. 이들 노동조합 가운데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조는 단 2곳에 불과했다. 단독 정부 수립의 최대 기여세력으로 활동하고, 초대 사회부장관을 대한노총 위원장이 맡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 견주어 대한노총의 활동은 보잘 것 없었다. 대한노총은 반탁과 단독 정부 수립에만 열을 올렸고, 노동자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부패로 물든 대한노총

단독 정부 수립 직후인 8월 26일부터 이틀간 대한노총은 제3회 전국임시대의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대한독립촉성총동맹이었던 기존 명칭을 대한노동총연맹으로 바꾸고, 강령과 규약을 수정했다. ‘노자간 친선을 기함’, ‘자유노동과 총력발휘로 건국에 헌신함’처럼 노동운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던 출범 당시 강령을 ‘노동대중의 복리와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한다’로 바꿨다.


대한노총 강령
1. 우리는 노동대중의 복리와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한다.
2. 우리는 국민경제 재건과 만민공생의 균등사회 건설을 기한다.
3. 우리는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로서 세계평화에 공헌함을 기한다.


수정된 강령에 대해 송종래의 입장은 비판적이다.

그러나 이 목표들은 우선순위도 없이 나열됐을 뿐이고 또한 이들을 실현시킬 행동강령도 제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의원 대회의 이 같은 결의는 앞으로 조합의 우선적 정책목표, 과제 및 수단의 선정에서 대한노총 파벌간의 입장 차이에 따른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이날 대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진다. 강령과 규약을 수정한 뒤 위원장 유임 문제가 상정됐다. 전진한 위원장이 유임해야 한다는 측과 새 위원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측이 맞붙은 것이다. 이 문제는 치열한 논쟁 끝에 난투극으로 이어져 첫 날 대회가 유회됐다.

송종래는 전재한 위원장의 장관 겸임은 대한노총 총재를 겸임한 대통령 이승만의 ‘노정통합체제’의 첫 신호로 봤다. “그(이승만)의 통합체제 도입 첫 신호가 이승만이 대통령자격으로서 동시에 대한노총 총재직을 겸직하고, 반면 전진한을 대한노총 위원장으로서 초대 사회부장관을 겸직하도록 교차인사를 한 것이다. 이 교차인사는 독립된 사회 압력단체인 대한노총을 행정부 수장인 대통령이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다음날 대한노총 다수파를 차지한 유임 지지파는 회의를 강행해 전진한 위원장의 유임 결정과 함께 전날 새 위원장 선출을 요구하며 퇴장한 대의원을 제명하는 결의를 채택한다. 대한노총 총재로는 대통령인 이승만을 선출했다. 이에 맞서 위원장 유임을 반대한 세력들은 대한노총전국혁신위원회를 꾸려 혁신선언과 혁신요강을 발표하며 맞섰다.

안재성은 『한국노동운동사 2』에서 다음처럼 기록했다. “그런데 전진한이 노총위원장직을 유지하면서 새 정부의 사회부장관으로 임명되어 문제가 됩니다. 노동문제를 통제하는 사회부장관이 노동조합의 대표를 맡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평을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세력의 한 파벌이던 김구(항일운동가 김구와 동명이인)를 중심으로 구성된 반대파는, 주류인 전진한 파에 반대해 전국혁신위원회를 결성해 대립했습니다.”

대한노총의 혁신을 명분으로 내세운 세력들의 혁신요강에는 ‘사용 조합적 또는 관제 조합적 성격을 청산하고 자율적 노동조합 건설’, ‘비민주적 조합 운영방침을 개선하여 노동조합의 역원 및 상임위원회를 비밀투표, 기타 민주적 방침으로 선출함으로써 조합운영의 민주화를 도모’, ‘무책임한 조합재정 운영방침을 개선하고 노동조합의 회계를 공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요강을 통해 당시 대한노총의 관제성, 비민주성, 불투명성 등 부패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노총 50년사』(한국노총)는 다음처럼 기록했다. “이 혁신요강이라는 것이 대한노총 지도부의 내부 알력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당시 대한노총이 지니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었다.”

난투극과 셀프 위원장

전진한은 1948년 12월 장관직을 사임하고, 이듬해인 3월에 열린 대한노총 위원장 선거에 출마한다. 전진한이 대한노총 위원장직이 아닌 장관직을 사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결별’했다는 판단은 섣부를 수 있다. 정치적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이승만의 경우 전평 와해와 단독정부 수립에 큰 기여를 했던 대한노총이 정권 유지에도 여전히 중요한 세력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노동자들을 관리 통제하는 ‘노정통합체제’를 실현하려면 정권이 대한노총을 수중에 쥐고 있어야 했다.

위원장 선거가 열린 1949년 3월 대한노총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전진한은 낙선하고, 혁신파인 유기태가 선출됐다. 유기한은 219표, 전진한은 198표를 얻었다. 이대로 대한노총을 빼앗길 수 없었던 전진한은 4월에 별도의 대회를 열어 자신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셀프 위원장’이 된 셈이다. 결국 대한노총은 분열한다. 위원장이 선출된 달을 기준으로 유기한 측을 3월파, 전진한 측은 4월파로 불렸다. 서로 자신이 합법적 위원장임을 주장하며 갈등을 빌었고, 대한노총 사무실이 있는 동일빌딩을 차지하려고 각목을 들고 패싸움을 벌였다. 결국 경찰이 나서 양 측 모두 사무실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이해 열린 노동절 행사도 양쪽의 난투극으로 엉망이 되었다.

4월파로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정대천은 훗날 회고(<<매일경제>> 1969.12.23.)에서 전진한이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대한노총 사무실로 복귀했다고 한다.

“이 혁신파는 다음해 1949년 3월 25일 시천교당에서 서울시련, 경기, 경남, 해상, 철도 일부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원 5백50명이 모여 대회를 열고 위원장에 유기태, 부위원장에 송종필, 김구, 안병성, 감찰위원장 박중정, 부위원장 송원도, 박진 씨를 선출하고 동일빌딩의 대한노총 사무실을 점거했다.

이때 사회부장관을 물러난 전진한 씨는 안국동 현 신민당 당사 하층에 자리를 잡았다. 4월 22일 강원 충북, 경북, 전남북, 철도, 경전 출신 대의원이 규합해 대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3월 대회를 부정하는 동시 위원장에 전진한, 부위원장 김중렬, 김용태, 감찰위원장 조광섭, 부위원장 정대천이 선출되어 다시 대한노총 사무실로 복귀했다.”

장관과 위원장을 겸직시켜 정권의 통제 아래 두려했던 이승만의 꼼수가 자멸하는 결과를 나은 셈이다. 이 모든 책임의 중심에는 대통령직과 대한노총 총재직을 겸임한 이승만이 있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결국 이승만이 직접 나선다. 이승만은 7월 19일 3월파와 4월파의 대표들을 불렀다. 이승만은 위원장제를 최고위원제로 개정하여 두 계파에서 5명씩의 최고위원을 선출해 운영하도록 했다. 다음 날인 7월 20일 3월파와 4월파 최고위원들은 <합동서약서>에 서명 뒤 공포한다.

3월파는 혁신을 원했을까

최고위원제로 파벌 싸움은 종결된 듯하다. 하지만 이는 ‘역시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고, 그 뒤에도 오랫동안 여파가 번져갔다’고 『한국노총 50년사』는 기록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기로 한다. 안재성은 합동서약서 이후 이승만 정권의 충실한 산하 단체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합동서약서
대한노총이 두 부분에 갈리면 노동사회 전체에 타격일뿐더러 건국초기에 위기를 조성할 것이므로 이에 참석한 3월대회, 4월대회 양측 대표들은 총재와 사회부 장관 앞에서 협의한 결과로 노총의 분열을 피하고 국가에 공헌키 위하여 양측의 의견과 관계를 초월하고 진심으로 합동해서 노총을 더 진전시키어 민생의 발전을 도모키로 서로 맹세하고 총재의 지휘를 받아 우리와 우리 동지들도 다 합동해서 다시는 이에 대하여 이의나 쟁논이 없이 정신과 조직적 통일을 완성하기로 공동 협정하고 이에 공포한다.

1949년 7월 20일
3월파 최고위원 : 유기태, 주종필, 안병성, 박중정, 김구
4월파 최고위원 : 전진한, 조광섭, 김중련, 신동권, 김태용


일단 갈등이 미봉된 대한노총은 이승만 정부의 충실한 산하 단체로 역할을 다합니다. 이해 10월에는 반공전선 구축이라는 명분으로 전투기를 사서 헌납하는 애국기 헌납운동을 벌입니다. 공휴일에 일을 하여 받은 하루치 임금을 12월 25일까지 기부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이듬해 2월에는 서울운동장에 3000명을 동원해 ‘국부 이 대통령 각하 영도 하에 일치단결하여 방공태서의 완벽을 기하며 국헌 수호를 엄숙히’ 맹세합니다.
-안재성, 『한국노동운동사 2』

1950년 3월, 3월파와 4월파의 최고위원들로 운영되었던 집단지도체제를 폐지하고, 다시 위원장제로 복귀한다. 전진한은 3월 10일과 11일에 열린 제4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409명 가운데 322명의 지지를 얻어 다시 위원장에 선출된다. 1년 만에 집권파인 전진한이 3월파를 압도적으로 따돌리고 위원장에 당선된 까닭은 무엇일까. 선뜻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국노총은 그 이유를 다음처럼 말한다.

이렇게 전진한이 다시 위원장으로 추대될 수 있었던 것은 비록 4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제헌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노동자들을 위해 입법 활동을 많이 했다는 점과 함께 1949년의 철도연맹의 대 교통부투쟁이나 전업노조 결성을 위한 대 상공부 투쟁에 있어 수행한 역할이 인정받은데 따른 것이다.
- 『한국노총 50년사』

3월파는 어떠한 혁신도 하지 못한 채 물러섰다. 송종래는 집단지도체제가 3월파의 기세를 잠재우려했던 술수로 바라봤다. 3월파가 요구했던 내용은 조합주의를 지향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이승만 정권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이승만은 정권의 꼭두서니로 대한노총의 존재를 필요했지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요구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비행기 헌납’에서 알 수 있듯이 방공의 돌격대로서 대한노총을 움직이려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송종래의 입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전진한 체제로의 전환에 대해 한국노총의 앞의 분석보다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정통합체제를 둘러싼 수구파〔4월파〕와 혁신파〔3월파〕간의 사생결단의 대립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위원장 제를 폐지하고 두 대립된 계파대표로 구성된 최고위원제를 도입함으로써 일단 냉각기로 들어섰다. 기세등등했던 혁신파는 아무런 개혁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의 의도는 집단지도체제인 최고위원제를 도입함으로서 혁신파의 기세를 꺾으려는 것이었다. 혁신파가 지향하는 조합주의는 그의 통합체제에 대치될 뿐만 아니라, 그와 정치이념을 공유하고 인맥관계까지 형성된 남북협상파가 5.30선거에 국회에 진출함에 따라 이승만은 이를 그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혁신파의 득세를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대한노총 3월파는 4월파에 비해 민주적이었는가, 조합주의 지향이 분명했는가, 노동조합의 개혁을 바랐는가, 이에 대해 대한노총의 개혁이나 혁신의 열망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들을 혁신파라고 명명한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반 전진한파, 혹은 3월파나 비주류로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비주류였기에 다수 집권 주류파에 도전하기 위해서 혁신을 내세웠지만 이들이 대한노총의 혁신을 바랐는지는 불명확하다. 곧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했기에 3월파의 더 이상의 행보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대한노총 내의 계파로서 지속적인 자리매김과 활동이 한국전쟁 기간과 휴전 이후에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