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중 영업손실, 노동자가 배상해야?
파업 중 영업손실, 노동자가 배상해야?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6.09.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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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법조인들의 모의재판 도전… 판례를 넘어서자
[사건]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

“두산이 해도 너무 한다. 해고자 18명, 징계자 90명 정도. 재산가압류 급여가압류 노동조합말살 악랄한 정책으로 우리가 여기서 밀려난다면 전 사원의 고용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 이제 이틀 후면 급여 받는 날이다. 약 6개월 이상 급여 받은 적이 없지만 이틀 후 역시 나에게 들어오는 돈 없을 것이다. (…)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내가 먼저 평온한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것이다 동지들이여 끝가지 투쟁해서 승리해주기 바란다.”

2003년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 조합원 배달호 씨가 경남 창원 두산중공업 공장에서 분신하며 남긴 유서다. 열사의 죽음 이후 노동자를 향한 손해배상 청구의 잔혹성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회사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는 파업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그러던 2014년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이하 ‘손잡고’)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당시 손잡고의 ‘노란봉투캠페인’은 방송인 이효리 씨와 촘스키 MIT 교수 등 유명인사들의 참여가 이어지며 112일 동안 후원금으로 14억 7천만 원을 모금하기도 했다. 손잡고와 양대 노총은 지난 달 20일 서울대학교 우천법학관에서 ‘노란봉투법 모의법정 경연대회’를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대회 본선에는 9개 대학 로스쿨 재학생이 총 8개의 팀을 이뤄 참가했다. 

ⓒ 손잡고

‘한국자동차(주)’가 제기한 160억 손배

이날 재판은 가상의 완성차 업체인 ‘한국자동차주식회사’에 사내하청 노동조합인 ‘손잡고비정규직노동조합’이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쟁의에 돌입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사실관계는 2010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과, 회사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과정이 배경이다. 참가자들은 4개 조로 편성돼 각각 원고(회사) 측 변호인의 역할과 피고(노조) 측 변호인의 역할을 맡았다.

<사실관계>

• 한국자동차주식회사(이하 ‘회사’라고 함)는 울산광역시에서 자동차 생산공장(이하 ‘울산공장’이라고 함)을 운영하면서 자동차 제조·판매업 등을 영위하는 회사이고, ‘손잡고 비정규직 노동조합’(이하 ‘노동조합’이라고 함)은 위 회사의 사내하청업체들 소속 근로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이다.

• 노동조합 소속 조합원들은 회사와 업무도급계약을 체결한 사내하청업체들에 소속되어 울산공장에서 길게는 20여 년, 짧게는 수개월 계속 근무하여 온 근로자들이다.

• 2015년 2월 26일 대법원은 회사의 의장(도어라인, 생산차 내외관 검사공정 등), 엔진(엔진조립, 엔진테스트 공정 등), 차체(무빙공정 등), 엔진 서브라인에서 근무한 사내하청 근로자 7명이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회사의 사내하청 근로자 사용관계는 불법파견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 노동조합은 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자 2015년 3월 4일 회사에 대하여 사내하청업체들 소속 근로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요구하면서 단체교섭을 요청하였고, 회사는 노동조합의 단체교섭을 거부하였다. 노동조합은 매주 수요일 단체교섭을 요청하였으나 2015년 5월말까지 회사는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 노동조합은 회사에 대하여 성실히 단체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하면서 2015년 6월 1일부터 6월말까지 주·야간 각 1일 2시간 연장근무를 거부하였다. 2015년 6월말까지도 회사가 단체교섭을 거부하자, 노동조합은 연장근무 거부를 지속하는 한편, 2015년 7월 1일자로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노동쟁의조정신청서를 제출하였다.

• 부산지방노동위원회는 2015년 7월 15일 위 노동쟁의조정신청 사건은 노동관계 당사자 간의 노동쟁의라고 할 수 없어 조정대상이 아니라는 결정을 하였다.

• 노동조합은 2015년 7월 16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전체 조합원 과반수가 쟁의행위에 찬성함에 따라(찬성률 76%), 2015년 7월 20일부로 전면파업에 돌입하였다.

• 회사는 노동조합의 파업에 참여한 근로자들의 담당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2015년 8월 1일부터 신규채용한 일용직/파트타임 근로자들을 대체투입하여 공장을 가동하였다.

• 노동조합 위원장 박길동은 회사의 대체근로자 투입에 항의하면서 2015년 8월 2일부터 공장 정문 앞에 설치한 농성 천막에서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 노동조합 위원장의 단식투쟁이 1주일 넘게 계속됨에도 회사가 아랑곳하지 않자 조합원 200여 명은 2015년 8월 10일 공장 안으로 들어가 대체투입된 근로자들의 업무수행을 막고 생산라인을 점거하여, 이후부터 9월 30일까지 생산라인의 가동이 중단되었다.

• 2015년 8월 10일 이전까지는 조합원들이 공장 안으로 들어가 생산라인을 점거한 적은 없고, 단식 중이던 박길동 위원장이 생산라인 점거를 직접 지시한 사실은 없다.

• 회사는 이 사건 쟁의행위로 인하여 위 영업손실액 상당의 손해를 입었다면서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의 위원장을 상대로 16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려고 하고 있으며, 노동조합 측은 회사의 손해배상 청구에 적극 응소할 예정이다.

쟁의행위 적법성 쟁점으로… “판례 넘어선 새로운 주장 필요”

흔히 영화나 TV 드라마는 “재판관님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격론을 이어가는 재판을 그려내지만, 현실의 재판은 대체로 매우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가상의 사건을 다룬 모의법정 역시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모의법정 203호실에서 마주한 원고 측 변호인과 피고 측 변호인은 각자가 준비한 변론의 요지를 조목조목 풀어냈다.

양측 변호인들은 ▲ 사내하청노동자가 단체교섭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 파업, 직장 점거 등의 쟁의행위가 정당한지 ▲ 160억 원의 손해배상청구액이 적정한지 ▲ 노동권의 관점에서 개인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한 것이 정당한지 등의 여부를 놓고 다퉜다. 가장 핵심 쟁점은 사내하청노동자와 원청업체 사업주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쟁의행위의 적법성 여부다.

원고 측 변호인을 맡은 2002번 팀은 “원고와 하청업체가 작성한 업무위탁계약서를 보면 원고는 근로자들에 대하여 실질적 지배력을 갖지 않음을 알 수 있다”며 한국자동차(주)와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어 ‘법원 판결에 의해 정규직 전환이 확정된 회사의 사례가 곧바로 확장되지 않는다’는 판례 해석을 통해 “원고는 단체교섭의 상대방이 아니므로 피고 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대한 불응은 정당하며, 이를 이유로 한 쟁의행위는 주체의 정당성이 결여되어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 참여와혁신

반면 피고 측 변호인을 맡은 2008번 팀은 “대법원이 불법파견을 인정하였고, 사용사업주인 원고는 파견법에 따라 조합원 6천 명 등 모두를 직접고용할 의무가 있다”면서 “가까운 장래에 원고가 근로계약서상 사용자가 될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원고와 피고 노조가 단체교섭을 할 법률상, 사실상 이익이 존재한다”고 맞받았다. 또 원고가 사내하청근로자의 작업량, 작업방법, 작업시간을 결정하고 구체적인 지휘명령권을 행사한 점에 근거해 “원고는 조합원들의 근로조건에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로서 단체교섭의 상대방인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최우수상(국회의장상)은 이화여대 로스쿨 2학년 재학생으로 이루어진 2008번 팀이 수상했다. 2008번 팀의 김가은 씨는 “작년에 ‘개별적 노동관계법’이라는 수업을 들으면서 노동법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모의법정 대회도 알게 됐다”며 참가 계기를 밝혔다. 같은 팀의 박소정 씨는 “평소에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기는 했지만, 실제 변론을 준비하면서 현장에 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대체로 “이번 대회를 통해 판례로 봤을 때 노동자들의 쟁의행위가 법률의 보호를 받기 어려운 조건인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김선수 변호사는 “법률가의 입장에서 보면 해석의 한계가 있다”면서 “법원의 판례나 헌재의 결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평했다. 그는 “법조인의 길을 갈 여러분들이 새롭게 주장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모의법정에서의 재판은 각 조당 1시간 정도로 짤막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현실의 재판은 짧게는 1~2년에서 길게는 4~5년 동안 지난하게 이어진다.

ⓒ 참여와혁신

20대 국회, ‘노란봉투법’ 논의될까

손해배상의 규모는 훨씬 더 살벌하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2016년 8월 현재 누적 손배청구액은 무려 1,521억 원에 달한다. 파악된 사업장 수만 20개이고, 건수로는 57건이다. 2002년 6월 345억 원이던 손배 청구금액은 2011년 5월 1,582억 7천만 원으로 급격하게 뛰었다. 9년 만에 무려 다섯 배나 뛴 것이다.

손잡고 측이 밝힌 몇 가지 손해배상 청구 사유를 살펴보면, “소송 남용을 넘어 치졸하다”는 당사자들의 비판이 괜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쟁의방식에 따라 불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물론 정당한 쟁의의 목적을 좁게 규정해 불법 딱지를 붙이거나, 공권력 투입에 따른 피해조차 노동조합이나 조합원 개인에 덧씌운다. 심지어 하청노조의 경우 원청업체의 이름이 노조 명칭에 들어갔다며 ‘이름값 소송’을 당했다.

이에 비하면 이번 모의법정에서 ‘한국자동차(주)’가 영업손실에 따라 제기한 손배소는 신사적인 편이다. 무분별한 손배소 탓에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이 심각하게 제약된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손배·가압류는 2003년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가 남긴 유서의 내용처럼 노동자들의 삶을 파괴한다.

손배소로 인해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이 과도하게 침해되는 일을 막기 위해 손잡고는 ‘노란봉투법’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개정해 ‘파업=불법=손배’라는 고리를 끊겠다는 취지다. 손잡고가 밝힌 노란봉투법의 핵심 내용은 ▲ 합법적 노조활동 범위의 확대 ▲ 노동자 개인과 가족, 신원보증인에게 손배 청구 금지 ▲ 법원 결정에 필요한 손배 기준 및 상한액 제시 등이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노조법 개정안은 지난 19대 국회에서 시민 1만 2,500여 명의 입법청원을 통해, 은수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발의했으나 입법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손잡고와 한국노총 및 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살인적 규모의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소해 국민기본권과 생존권을 지켜달라는 시민사회와 노동계의 요구에 20대 국회가 적극 응답해야 할 차례”라며, 20대 국회에서만큼은 노란봉투법 입법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