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비호 아래 탄압 받는 조선방직
이승만 대통령 비호 아래 탄압 받는 조선방직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09.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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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투쟁과 오락가락 대한노총
[왠 노동?] 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 ⑨

한국전쟁 중 일어난 조선방직의 쟁의는 ‘민란을 방불케 한 분규’였다. 조선방직 노동자의 운명은 이승만 정권의 정략적 이해에 휘둘렸다. ‘낙하산 사장’이 성장일로에 있던 기업을 어떻게 몰락시키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조선방직이기도 하다. 1951년 당시 조선방직은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고, 군수광목을 생산했기에 그해 순이익이 85억 원에 달했다. 전시에 ‘생산전사’를 자처하며 2교대로 24시간 조업을 했던 노동자들의 피땀눈물의 결과다. 하지만 낙하산 사장의 등장으로 노동자들은 또 다른 피땀눈물을 흘려야 했다.

낙하산 사장 강일매, 친인척 중심으로 회사 장악

하는 당시 국내 최대 방직회사의 사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영화사 사장, 여론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던 강일매는 1949년 동화백화점 관리인이 되었다. 강일매가 동화백화점 관리인이 된 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강일매는 이승만의 양아들임을 공공연하게 말하며 이권에 개입했다는 증언이 4.19혁명 이후 법정에서 나오기도 했다. 아래는 4.19혁명 이후 구속된 강일매의 공소장에 나온 내용을 소개한 신문 기사다.

공소장에 의하면 강씨는 동화백화점 불하를 독점하기 위해서 다른 쟁쟁자를 협박 감금했다는 것이다.

1958년 1월 29일 서울시 관재국에서 동화백화점을 불하할 때 강 씨는 종로 '아오마쓰'파 깡패 약 20명을 40만환에 매수하여 쟁쟁입찰하려는 화신산업심사과장대리 변철수씨를 체포하여 "네 새끼 배때기에는 칼이 안 들어가니"라고 협박한 후 서울 북창동 김복여관에 감금하여 단독입찰함으로써 당시 11억환 상당의 동화백화점을 6억7천만환에 불하매수하여 부정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 <경향신문> 1963.8.27.

이런 인물이 조선방직의 사장이 되었으니 이후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강일매는 사장에 취임하자 처남을 업무부장과 경리부장에 앉혔다. 후생부장은 자신의 동서였다. 이런 식으로 123명을 신규 채용했고, 이들은 수십 년간 조선방직에서 일한 직원들보다 좋은 부서에 배치되고 높은 임금을 받았다. 상공부는 직공급 100%, 사원급 75%, 중역급 50%의 임금 인상을 지시했으나 강일매는 신규 채용을 이유로 임금을 동결하고, 후생복지 차원에서 지급하던 광목도 지급하지 않았다. 또한 일제강점기부터 일해 온 장기근속 노동자 20명을 해고했다. 또한 강일매는 노동조합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다.

강사장은 지도부 선거에서 대한노총조선방직분회(조방노조)에 자기 세력을 심기 위하여 반대세력 간부의 입후보를 단념하도록 강요하였지만 반대파의 노조위원장 당선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그 후부터 노조 신 지도부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신임 지도부가 노사협조를 위한 10여 차례에 걸친 그와의 교섭제의를 뿌리치고 지도부의 중요 인물인 한승룡과 안종우를 12월 13일, 15일에 해고시켰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쟁의 중요일지

▲ 12월 7일 조방노총분회 제4차 대의원대회

▲ 12월 14일 이번 쟁의의 직접 도화선이 되었다고 일반에 알려진 강일매 사장 대 전진한 씨의 대면이 있었으나 결렬

▲ 1월 5일 조방 공장 또는 사옥에 ‘강일매 사장 물러가라’는 벽보를 부치기 시작

▲ 1월 8일 벽보를 더욱 많이 부치기 시작하고 한편 ‘대한노총정화중앙위원회’가 동사 ‘후생과’ 사무실에 들어왔다.

▲ 1월 9일 조방 중역회의를 열고 사장을 비롯한 전 중역의 사의 표명을 결의하였다

▲ 1월 11일 상공부에서 조방 중역 사표를 수리하고 관재위원회에 회부

▲ 1월 12일 북부산경찰서장은 노총 측과 사장 측에 5항목에 걸친 협조건을 제시

▲ 1월 14일 경찰의 강권 발동

▲ 1월 15일 약 30명의 부위원들이 조방 정면에서 일시 소란하였는데 당국의 지시에 의하여 해산

▲ 1월 21일 수백 명의 종업원이 국회에 진정 한편 조방 종업원 사이에 격투

- <경향신문> 1952.1.23

투쟁 돌입과… 대한노총은 분열

조선방직 노동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1952년 12월 15일 쟁의에 들어갔다. 당시 ‘조방쟁의’ 풍경은 조방노조 출신 안종우가 노동문제연구소가 발행한 『노동공론』에 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송종래는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쟁의가 시작되기 전부터 공장의 요소요소에 “폭군 강일매 물러가”라는 벽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경찰은 건물 훼손이라는 죄명으로 벽보 붙인 자를 구속하자 다음에는 벽보를 빨랫줄에 달고, 이것도 철거당하니까 약 20미터 길이의 광목에 같은 구호를 써서 높이 40미터나 되는 굴뚝에 내리 걸었다. 이것도 제재되니 이제는 광목에 쓴 구호를 옷에 꿰매 달고 다녔다. 나중에는 함석판에 구호를 조각하여 여자 종업원은 아예 흰 저고리 등판에 남자 종업원은 작업복 등에 등사 잉크로 밀어 입고 다니기도 했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경찰이 나서서 조선방직 노동자의 저항을 막았지만 그럴수록 노동자들은 더욱 끈질기게 맞서 싸웠다. 강일매는 12월 25일 조방노조위원장 박정태를 해고하며 더욱 강경하게 대응했다.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투쟁 가운데도 대한노총은 분열상을 드러낸다. 1951년 12월 24일 주조필 대한노총 부위원장은 쟁의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는 반대 성명을 내고 조방쟁의정화중앙위원회를 꾸려 분열을 꾀한다. 반면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은 12월 25일 조방쟁의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12월 30일에는 부산 동아극장에서 ‘조방쟁의진상보고대회’가 열렸다. 1952년 1월 1일에는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을 중심으로 꾸려진 조방쟁의대책위원회 차원에서 강일매 사장 파면과 해고노동자 원상 복귀를 요구하는 투쟁 선언을 발표했다.

1월 21일 1천여 명의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개원 중인 국회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전쟁 중이라 당시 국회는 경남도청 안에서 열렸다.

1,000여 명의 종업원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해보려고 국회로 몰려갔다. “강일매 물러가라”는 처절한 절규가 누구의 선도도 없이 터져 나왔다. 경찰병력은 닥치는 대로 곤봉으로 후려쳤으며 기마경찰은 말을 몰아 종업원들에 마구잡이로 뛰어들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같은 오후에는 다시 1,300여 명이 시가행진을 벌인 뒤 되돌아 와서는 사장실을 에워싸고 “강일매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당시 국회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자는 <경향신문> 기자에게 네 가지 요구사항을 설명했다. “노자 투쟁에 있어 국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모였다. 우리의 요구조건은 일, 강인매를 파면시켜라. 이, 노동자의 인권을 옹호하라. 삼, 인사문제 복귀시켜라. 사, 신성한 노동운동을 보호하라 등이다.”

강 씨 파면만이 해결안 조방쟁의에 국회 결의

김정실 의원을 비롯한 5인 조사위원이 조사한 조방쟁의 사건의 진상은 29일 국회에서 보고되어 국회는 산업 민주화를 위하여 강일매 사장을 파면할 것과 노조의 파업을 즉시 중지할 것을 결의하였다. 동 조사 보고 내용에 의하면 강 사장은 30년 이상 근무한 종업원 간부를 비롯하여 16여 명의 종업원을 해고하였고 27명을 신규로 채용하였을 뿐 아니라 종업원을 혹사하고 적대시하고 기타 자기의 세력을 부식하기 위하여 갖은 운동을 하였으며 2월 25일에는 기마대의 호위 아래 출근하는 등 조방 종업원 대부분은 그를 반대하고 있으므로 강 씨 파면만이 동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 <동아일보> 1952.3.1

강일매 유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

국회는 조선방직 진상조사단을 꾸려 파견하기로 한다. 상공부는 강일매 사장을 비롯한 중역의 해임하고, 해고된 노동자들을 즉각 복직시키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조선방직 쟁의는 강일매 사장의 퇴진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경찰은 1월 31일 노동조합 간부 30여 명을 연행해 조방노조위원 등 간부 7명과 여성 노동자 5명을 구속했다. 상공부는 전무와 상무의 사표는 수리했지만 강일매 사장을 유임하기로 결정했다. 강일매는 2월 25일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조선방직에 출근했다.

조선방직 노동자는 강일매가 유임되어 출근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대한노총 조방쟁의대책 위원회는 3월 3일 24시간 시한부 파업을 결의했다.

상공부가 강일매를 유임시킨 이유는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 때문임을 당시 신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작년 12월 15일부터 시작된 조방노조와 간부 사이의 분쟁은 중간에 사회부 노동국의 조정이 성립되지 못한 채 점차 확대되어 사장 강일매 씨의 퇴임을 요구하는 노동조합 측의 태도는 강경하여 쌍방의 성명전과 노조 측의 탄원 및 시위 행동이 계속 되어 왔다. 사태가 어지러워지자 상공부장관은 이 대통령의 의지를 받는 강 사장에 대한 파면 단행이 곤란하였음인지 일시 무마책으로 강 사장을 유직케하고 나머지 4중역으로하여금 운영케하여 오던 바 지난 25일에 이르러 강 사장이 복직하게 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노총 측에서는 사장의 퇴직을 요구하여 24시간 파업을 오는 3일에 단행할 것을 미리 발표하게 된 것이다.

▶ <동아일보> 1952.2.29.

기사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완강히 저항하자 상공부 장관은 사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강일매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사장이 된 인물이다. 강일매를 해임시키는 일은 곧 이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장관은 강일매에게 국회에서 진상조사단을 파견한다고 하고, 여론도 시끄러우니 잠시 휴직을 하고 있으라고 권한다. 그동안 경찰을 동원해 조방노조 핵심 인물을 구속하여 노조의 힘을 약화시킨 뒤 강일매를 복직시켜 출근하도록 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방직 노동자를 희롱한 셈이다.

2월 29일을 국회에서는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듣고 강일매 사장을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촉구하며, 노동자들에게도 파업 자제를 요구했다. 언론에서는 ‘강 씨 파면만이 해결안’이라는 제호의 기사를 썼다.

6천여 총파업 돌입, 그리고 무자비한 탄압

3월 12일 오전 7시 조선방직 노동자 6천여 명은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한다. 공장은 멈췄다. 노동자들은 정문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6,000여 종업원은 정문을 향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포악과 유린과 호소할 길 없는 단절과 소외의 분노가 폭발한 저항의 대행진이었다. 경찰과 어용노조의 깡패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아 피를 흘리며 끌려 다녔다. 그러나 깡패도, 몽둥이도, 총소리도 그리고 개머리판도 종업원들의 자유와 권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라고 뜨겁게 단결된 6,000여의 “넋”을 막을 길이 없었다.

▶ 송종래, 『한국노동운동사4』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은 조선방직 총파업 돌입에 앞서 11일 국회에서 파업 선언과 함께 국제노동단체에 호소할 것을 선언했다.

대한노총위원장 전진한 의원은 11일 국회에서 조방분쟁 사건에 관하여 2월 29일의 국회결의(강 사장 퇴직 파업 정지)를 무시하고 도리어 폭력단을 조직하여 조방 노동자를 구타 압박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헌법에 보장된 노동의 자유권을 찾기 위하여 금 11일 중으로 조방 노총은 총파업(무기한)을 단행하는 동시에 이 실정을 "국제자유노련 유엔노동기구 미국 ASL CIO 영국노동회의 불란서노동총동맹에"에 호소할 것을 선언하였다.

▶ <동아일보> 1952.3.12.

하지만 전진한 위원장은 모진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파업 투쟁을 벌이자 다음날 파업 종결 선언을 한다. 무기한 파업을 24시간 시한부 파업으로, 세계만방에 호소하겠다는 말을 국내 문제로 조용히 하자는 식으로 발뺌을 했다.

한국노총은 조선방직과 관련해 실패였다고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이후 노조간부들이 모조리 구속당하자 노동자들은 더 이상 파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만을 낸 채 3월 14일부터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직장에 복귀함으로써 조선방직파업은 끝을 맺었다.

조선방직쟁의는 대한노총 총재인 이승만 대통령의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당한 채 실패로 끝났다. 이 쟁의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경찰에 연행, 구속되고 혹은 폭력단에 의하여 구타당하였다. 이 쟁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가장 치열하고, 대규모인 쟁의로 한국노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한국노총 50년사』)”

여기서 의문이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에 파업은 깨진 것일까?

왜 노동자들은 복귀할 수밖에 없었을까?

파업 종결 선언

3월 12일 오전 7시부터 시작한 조방 24시간 파업은 금 3월 13일 오전 7시까지 종결하였다. 조방맹원동지는 직장으로 돌아가 증산에 전력하여 생산보국의 충성을 다할 것을 지시하는 동시에 금번 파업이 부득이한 사태에서 실현 된 것이나 국민제위에 대하여 미안한 말씀을 드립니다.

금번 파업에 있어서 경찰의 불법 탄압과 어린 맹원들에게 대한 비인도적인 잔인한 고문에 대하여는 그 불법성을 규탄하는 동시에 법치국가로서 일대 치욕임을 통탄하는 바이다.

우리는 금번 파업을 통하여 노동자의 굳은 결의를 천하에 표명하였다. 이 쟁의를 될 수 있는 대로 국내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적 호소는 일시 보류하고 다시 한 번만 더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도록 정부와 성의 있는 절충을 해볼 작정이다.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

대한노총 위원장 전진한의 파업 중지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들은 이틀 동안 공장을 점거한 채 투쟁을 전개했다. 800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강제 해산당하고야 파업은 끝났다. 파업으로 26명이 구속됐고, 600여 명이 해고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