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관제하 대한노총의 끝없는 추락
자유당 관제하 대한노총의 끝없는 추락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6.10.1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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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개입 본격화, 내부 갈등 계속돼
[왠 노동?]다시 읽는 대한민국 노동조합의 발자취(10)

한국전쟁 중 4개월에 걸쳐 이승만 정권의 낙하산 사장 강일매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한민국 노동관련법 제정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53년 1월 노동조합법, 노동위원회법, 노동쟁의조정법이 만들어졌고, 4월에는 근로기준법이 탄생했다. 노동관계 4법의 제정을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결과물이라는데 큰 이견이 없는 듯하다.

대한노총, 반공에서 금권으로 이합집산

조선방직 투쟁 과정에서 대한노총의 입장이 갈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진한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조방쟁의대책위원회와 주조필 부위원장을 위시한 조방쟁의정화중앙위원회. 이 두 조직은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1951년 12월 자유당이 결성되자 대한노총의 자유당 원내와 원외 파, 그리고 전진한파로 분열된다. 정화중앙위원회는 자유당 부총재 이범석을 배경으로 주종필, 조용기, 조광섭, 이진수, 최용수 등이 중심이었고 원외 자유당파로 구분한다. 대책위원회는 원내 자유당파와 전진한파가 중심이었다. 원내 자유당파는 이갑성 의원을 배경으로 송원도, 우갑린, 박중정, 이진남, 김사욱이 중심인물이었다. 전진한파에는 조경규, 정대천, 임기봉, 김말룡 등이 활동했다. 한국노총은 원내 자유당파와 전진한파를 한 파벌로 보았다. 한국전쟁 이전 혁신파 수구파로 지칭되던 파벌은 전쟁 과정에서 혁신파의 실종으로 귀결되었다.

전진한 담화

지난 8. 9일 양일간에 개최된 소위 노총 통일대회는 관권과 금권에 의하여 강제로 소집된 불법대회이며 대부분이 유령단체의 대표가 날조한 유령 대의원대회다. 나는 앞으로 진정한 노동운동의 정신을 수호하면서 비표면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

송종래는 한국전쟁을 전환점으로 파벌구도가 재편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파벌형성의 촉매역할을 한 것이 이제는 이념이 아니라 속된말을 빌리자면 금권이라는 ‘먹이’이다.” 대한노총의 파벌 쟁투가 이제 반공 이념의 허울을 벗고 더욱 저속해졌다는 말이다. 이후 대한노총은 조합 주도권 장악과 금권 장악을 위한 파벌로 갈라져 싸움을 이어갔다.

주도권 투쟁의 배면에는 금권의 이해관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주도권 경쟁에서의 승자는 자유당의 요직을 차지하고, 공직으로의 진출기회 갖게 되고, 조합내의 권력투쟁에서 자유당의 지원을 얻을 수도 있다. 당시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역임한 송원도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산별연맹위원장 선거에도 개입하였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쟁의에서 사용자와의 야합으로 금전적 대가를 갈취할 수도 있었다. 특히 정치권으로 진출하려는 형태는 대한노총 창립을 주도한 청년단 출신 지도급 인사에서 나타났다.

▶ 송종래,『한국노동운동사4』

한국노총의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노총 50년사』의 기록이다. “대한노총의 파벌투쟁은 1952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전진한 위원장이 불법적으로 제거되고, 새로 최고위원에 선임된 임원 중 한 사람이 자유당의 중앙위원으로 임명됨에 따라 급속히 자유당의 기간단체로서 정치 도구화 되었다. 이러한 대한노총의 활동은 자유당 독재 정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까지도 지속되었다.

이승만에 의해 파벌 정리

대한노총은 1952년 제6차 정기전국대회를 앞두고 극심한 파벌 싸움을 벌였다. 원내, 원외 두 파벌은 각각 대회를 소집하며 “혼란과 난투”를 이어왔으나 이승만 정권의 적극적 개입으로 일단락된다. 이승만은 노총 통합을 지시하는 권고문을 밝혔다. “대한노총 대책회의니 또는 추진위니 하는 것은 다 해체하고 단순한 대회 준비회를 만들어서 오는 11월 1일 대회를 원만히 완료토록 지금 이 일에 단임한 사람들이 타협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모든 분파 행동하는 사람은 앞으로 누구라도 삭제하고 단순이 노총 안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만이 여기 참가해서 일해야 할 것이다. 다소간 분규 있는 점은 쌍방이 합의하여 원망을 이루되 그 분규를 대회에 부쳐서는 전체의 통일은 못 할 것이다.”

대한노총 통합대회 이승만 메시지

내가 우리나라의 대다수 노동자 농민을 위주로 하여 자유당을 조직한 것도 기왕에 천대받던 이 노동대중이 정치상으로 민족 대다수를 모아 한 덩어리를 만들어서 큰 세력을 이루어 가지고 외적을 방어하자는 것이요, 그 안에 각각 직능이 다른 사람들을 그 부분대로 모아 단체를 만들어 그 단체들이 먼저 자체 내에서 공고하게 통일을 세워보자는 것인즉 우리 전 민족이 이것을 실천해서 모든 국민이 각각 힘쓰도록 해야만 할 것입니다. 단결을 이룬 후에는 자유로 투표해서 직접 일하는 노동자 중에서 3인을 뽑아 천거하면, 그 중에서 1인을 천거하여 1년 동안 자유당 중앙위원의 책임으로 시무케 할 것이니 투표하여 천거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이승만의 권고문의 의지대로 전진한 위원장은 ‘삭제’되었다. 조경규, 송원도, 이진수 3인 최고위원제를 채택한다. 송원래는 이를 “집행부 내 주도세력의 일시적 공백기”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 조선방직을 둘러싸고 정화중앙위원회와 대책위원회의 각각 주역이었던 주종필도 전진한과 함께 제거된다.

1952년 11월 8일부터 이틀에 걸쳐 열린 대한노총 전국통일대회에 이승만은 대한노총이 자신과 자유당의 종속단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반면 전진한은 대한노총이 관제화 위기에 직면했다며 통합대회에 반발했지만 대한노총을 자유당 휘하에 두려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한노총 통합대회에서는 주먹패 출신으로 9월 총파업 파괴에도 앞장섰던 김두환이 감찰위원장에 당선된 것이 눈에 띈다. 김두한은 이듬해인 1954년 대한노총 최고위원으로 선출된다. 언론을 통해 당시 대회장 풍경을 살핀다.

“대한노총전국통일대회”는 8일 개회 벽두부터 심각한 파쟁이 전개되어 회의 진행은 파란과 난항의 중첩으로 유회 아니면 대회 연기가 우려되던 중 9일 하오 11시 반 최고위원으로 송원도 조경규 이진수 삼 씨와 감찰위원장에 김두한 씨가 선출 당선됨으로써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동 대회는 이의명분을 세우고 폐회하였다.

제2일째인 9일 대회는 하오 회의에 있어 최고위원 3인 선출제의 규약 심의를 놓고 수 시간에 걸쳐 논전이 벌어졌으나 약간 명으로 수정하자는 철도연맹 측의 동의가 채택되고 이에 이어 최고위원을 선출함에 있어서 5.3대회 및 6.9대회의 간부 일동에 대한 피선거권 박탈 여부 문제에 들어가자 또 다시 일대격론이 벌어져 거수 표결까지 하였다였다가 중도에서 재차 표결을 하는 등 장내는 장시간 소란하여 의장단의 사회는 중단되고 전기불마저 꺼지는 등 일대 수라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겨우 장내를 수습하고 재표결한 결과 기성 간부진의 피선거권 박탈 동의는 부결되었던 것이다.

그후 최고위원 선출에 들어가 또 다시 혼란이 야기되었으나 시간의 촉박으로 격론이 중지되어 전기 송원도(자유) 씨가 157표, 조경규(경남) 씨가 132표, 이진수(자동차) 씨가 129표로 각각 당선되고 감찰위원장에는 박중정 김영주 씨 등이 후보자로 추천되었으나 양인의 사퇴로 김두한 씨에게 낙착된 것이다.

▶ <동아일보> 1952.11.11.

출발도 어려웠던 대한노총의 개혁

대한노총의 파벌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경전연맹위원장 출신인 정대천 세력이 주도권을 쥔 가운데 항만자유노동조합연맹 이진수, 철도연맹 위원장 김주홍 등이 세력을 형성해 파쟁을 심화시켜간다. 1955년 4월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는 김룡학, 정대학 이진수 3인이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대의원대회 투표 부정이 불거져 보건사회부로부터 대의원대회 결의사항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노동절 행사가 각 분파 별로 진행되었다. 당시 투표 무효화에 앞장섰던 이강연은 9월 15일 전국대의대회에서 사무총장직을 맡았는데, 10월 27일 삼청공원에서 누군가에 의해 살인되어 변사체로 발견됐다.

제10차 전국대회에서 격화된 파쟁은 제11차에 와서는 조직의 합리성과 반민주성, 인간적 의리와 배신이 교착하고 적과 동지가 무분별해진 조합지도자들의 모든 추악한 형태가 대의원대회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더욱 치열해졌으며 결국은 대한노총을 분열이라는 파국으로 몰고 갔다.

▶ 송종래,『한국노동운동사4』

3인 최고위원제로 운영되던 대한노총은 부산부두노동조합 위원장 출신의 김기옥의 주도하에 위원장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 규약을 바꾸고 김기옥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파벌간의 합종연횡을 통해 권력 분점이 가능했던 구도가 깨지자 제2노총 건설이 시도된다.

반 김기옥파의 노동조합 간부들은 대한노총과는 별도로 노동조합의 전국적 중앙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운동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59년 8월 11일 서울 경전노조 회의실에서는 전국 37개 노동조합 연맹체 중에서 24개 연합회 대표 32명이 모임을 갖고 김기옥이 주도하는 대한노총의 비민주적 처사들을 비난 규탄하고, 가칭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를 구성하였다.

▶ 『한국노총 50년사』

1959년 10월 26일 서울 태화관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14개 노동조합 대표 21명이 참여한 이날 대회에서 중앙위원 의장으로 김말룡이 선출됐다. 전국노협은 설립준비위원회 출범 당시 24개 노조연합회 대표 32명에 비해 더욱 왜소화되어 첫 발을 내딛었다. 또한 보건사회부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지 못해 4월 혁명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전국노협 선언

우리는 이 땅에 진정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구성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짓밟은 악질 기업주와 그 주구 및 노동 부로커들과의 가책 없는 투쟁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노동관계에 있어서의 봉건잔재적인 관료적인 일체의 요소를 타파함으로써 근로대중의 경제적 문화적인 지위 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조국의 민주화와 반공통일에 이바지 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이처럼 대한노총의 개혁이나 혁신은 쉽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요구로 건설되지 않은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김기옥 체제에 반기를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를 혁신세력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에 대한 송종래의 의견을 듣자.

정부수립 초기의 혁신운동은 정치적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전국노협의 개혁운동도 그의 합법성이 인정되지 않음으로써 법적 장벽에 부딪혔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조직 내적으로도 결집력과 조직력에 한계가 노출되었다. 전국노협 결성을 주도한 반김기옥 세력은 활동성향, 파벌, 조직단위 등이 서로 상이한 세력들의 연합체이다. 이들 각 세력은 김기옥 체제의 타도에는 뜻을 같이 하였지만, 그 동기는 각기 달랐다. 그들의 과거 행적에서 정대천파는 노동계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관점에서 반김기옥 세력에 합세한 것으로 보이며, 김말룡 세력과 김관호 세력에서는 개혁의지가 엿보인다. 정대천은 수구파 출신으로 대한노총 최고위원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자유당중앙위원 등 정계에도 진출한 권력지향적 인물로서 우마차까지 동원해 이승만 대통령의 재출마를 염원하기 위한 소위 우의牛意마의馬意 시위를 지휘한 장본인이다. 그는 제2중앙연맹을 통해 노동계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느냐 혹은 대한노총에서 재기하느냐의 기로에서 대한노총을 선택하고 전국노협 진영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의 반김기옥운동은 개혁과는 무관하다.

▶ 송종래,『한국노동운동사4』

험해지는 노총분규

대한노총 분규는 더욱 커져만 가는 것 같다.

앞서 손 보사부장관은 누차에 걸쳐 현 노총 위원장 김기옥씨와 정대천 씨 등은 대한노총 기치 아래 대동단결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한 바 있으나 상금 대동단결은커녕 양 파간에서 더욱 험악한 공기를 감돌게 하고 있다.

1일 현 노총 위원장 김기옥 씨 반대파로 알려져 있는 정씨 파에 속하는 부산 부두 노조 전부위원장 김용후 씨등 5명은 부산부두노조 269명의 노조원을 대표로 상경하여 현 노총 위원장 김기옥 씨에 대한 비행 사실을 지적한 진정서를 보건사회부에 제출하여 보사부 관계자를 당황케 하고 있다.

진정요지는 다음과 같다.

1. 김기옥은 부산부두노조의 노무반장을 추방하고 그 자리에 자기 파에 속하는 반장을 불법 임명 배치하고 그들 일파들로 하여금 과거 반장의 인솔하에 있던 일반조합원(노무자를 말함)까 무자비하게 추방하고 역시 그 자리에 자기 파에 속하는 노무자 269명을 단번에 배치하였다.

1. 지난 8월 13일 부산부두노조 대의원 대회를 불법적으로 소집개최하였다는 것 등이다.

▶ <동아일보> 1959.9.12.

대한노총의 부패와 타락, 만천하에 드러나다

한편 김기옥 위원장과 함께 사무총장이 되었던 이주기가 사무총장직을 사퇴하며 대한노총의 부패와 타락을 폭로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주기는 대한노총의 방직공의 과중노동 사건, 부산부두노조 노임횡령 분규 등의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했다.

▲ 방직공의 과중노동 사건 = 전국적으로 방직공들이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서 혹사당하면서, 1일 임금이 70환에서 100환이라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상태를 묵과할 수 없어 강력한 시정책을 제시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 대구 중앙집행위원회 사건 = 지난번 대구집행위원회에서 정당하고 합법적인 집행위원이 반대파라는 이유로 폭력배에 의해 입장이 거부되고 일방적으로 자파 중심의 회의를 형식적으로 강행했다.

▲ 부산부두노조 노임횡령 분규 = 부산부두노조에서는 위원장 김기옥이 노동운동 지도자로서 수고하고 노력한 기본 동지들을 금력.폭력으로 테러, 투옥, 직장 추방을 감행하고 한국노동운동사상 최고의 범죄행위를 범하고 또한 노임횡령사건 등 불미로운 사건이 수다함에도 이를 은폐하고 다만 기업주의 앞잡이로서 위원장 자리만 고수하고 있다.

이주기는 “썩은 나무에서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 진리이며, 현 대한노총 간부 전원이 책임을 지고 총퇴진하는 것만이 전체 노동자를 위하는 길이므로 먼저 사무총장부터 스스로 퇴진하는 것이다”며 사퇴의 변을 밝혔다.

대한노총이 안팎의 공격으로 휘청거리는 가운데 서울지방법원은 위원장체제로 규약을 바꾸고 김기옥이 위원장이 되었던 제11차 전국대의대회의 무효판결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