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 대타협 이루고도 ‘휘청’한 한국합섬, 왜?
노사 대타협 이루고도 ‘휘청’한 한국합섬, 왜?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6.09.29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섬 구조조정, 노동시장 정책과 결합으로 물꼬 터야Close up_HK에는 무슨일이 있었나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화섬산업의 사양화와 구조조정 속에서도 2003년 화섬업계 최초로 4조3교대제를 도입해 신규 일자리 창출과 일자리 나누기 모델로 주목을 받았던 한국합섬이 불과 3년 만에 공장가동 중단 사태를 맞으면서 화섬업계의 위기감도 점점 커지고 있다. 특히 한국합섬의 경우 그간 대립적 노사관계가 아닌 합리적 노사관계를 유지해 왔고, 산업 사양화 속에서도 노사가 경쟁력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파격합의’를 거듭해 왔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컸다.

노사대타협, 왜 무용지물 됐나?
한국합섬이 4조3교대제를 도입한 것은 2003년의 일. 2000년도 들어서면서 중국제품의 범람과 화섬업계의 공급과잉으로 가연부서의 기계 가동중단이 자주 발생하면서 회사는 해당 부서를 없앤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장 이 부서에서 일하는 노동자 126명의 고용이 불안해졌다.

이때 노조가 제시한 해법이 교대제 전환. 우선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3조3교대제를 4조3교대로 전환하자고 제안했다. 회사가 이 제안을 전격 수용한 것은 ‘임금 양보’라는 노조의 합리적 대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사의 합의로 126명의 고용을 지킨 것은 물론 오히려 27명의 추가 인력을 고용하게 됐다.

교대제 전환으로 1인당 13만원 가량의 임금손실이 발생했지만 노조는 “회사가 정상화 되면 임금은 얼마든지 올려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우리의 동료와 고용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합원들을 설득했고 회사 역시 신규 고용으로 인한 비용부담을 수용했다. 교대제 전환 이후 경북지역 최고의 산재율을 기록하던 한국합섬에서 휴식의 증대로 인한 산재율 저하가 뚜렷했고, 노동생산성도 15% 정도 높아졌다. 이어 2004년 임단협에서 350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를 2005년까지 직접고용 하기로 합의하는 등 산업 자체의 어려움 속에서도 기업단위 노사가 한발씩 양보하는 합의를 이뤄왔다.

경영진 비리로 노사 신뢰 무너져
이런 한국합섬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말부터다. 2004년 매출 3000억원, 적자 규모 200억원을 기록한데 이어 2005년 매출 3100억원, 적자규모 500억원으로 최악의 경영실적을 냈다.
워크아웃 상태로, 적자를 면하기가 쉽지는 않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창사 이래 최악의 실적이었다. 여기에 원자재 가격의 상승, 중국 저가제품의 범람, 원화강세 등이 맞물리면서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외부적인 악재가 문제였을 뿐, 2004년까지 몇 차례의 파격적 합의로 노사간의 신뢰를 다져온 덕에 내부에서 문제가 터져 나올 것이라는 예측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2005년 말, 박동식 명예회장이 130억원 대의 회사 돈을 빼내 유상증자 대금 등으로 사용하고 자신이 설립한 관계회사 명의로 205억원을 대출받으면서 한국합섬 예금을 담보로 제공한 혐의로 기소되면서 노사간 신뢰도 급격하게 무너졌다.

한국합섬의 자회사로 분리된 HK는 올해 초 관리직 사원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비상경영실천 결의대회’를 열고 임원 30%, 과장 이상 15%, 사원 10%씩 임금 반납을 결의했지만 노조의 동참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노조는 “명예회장이 횡령한 돈과 계열사 매각 자금 등을 내놓아야 한다”며 임금반납 결의에 불참했다. 이어 3월에 회사의 명예퇴직 및 정리해고 방침이 정해졌고 노동조합의 반발이 계속되는 가운데 끝내 공장의 기계들이 멈춰 섰다.

결국 지난 5월 회사가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함으로써 법정관리인이 선임되면서 노사 대화가 재개됐고 정리해고 철회와 임금양보 합의에 도달해 공장 정상화의 계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9월 말까지 법원이 생산 재개와 관련된 답변을 주지 않고 있어 정상화 시점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 HK가 6개월간 폐업을 하면서 노동자 가족들이 정상가동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개별기업 현실 무시한 정부대책
한국합섬 사태는 어렵게 쌓아온 노사간의 신뢰를 일순간에 무너뜨린 경영진의 비리가 기업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산업의 사양화 속에서 개별기업 단위 노사의 노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70∼8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온 섬유산업은 90년대 초·중반 중국시장이 열리면서 신규업체 설립과 설비증설 등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IMF 이후 상황이 급반전되어 호황을 누렸던 화섬업계는 차입금으로 충당한 설비증설 자금의 금리부담, 중국의 자체 생산 확대 등으로 위기상황을 맞았다.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었던 중국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98년 화학섬유생산량 1위를 기록하면서 한국이 주도했던 화섬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했다. 공급과잉과 원자재가 상승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 금리부담이라는 삼중고가 화섬업계를 강타했다.

결국 화섬기업들은 워크아웃(고합, 새한, 동국무역), 법정관리(한일합섬), 화의(금강화섬), 청산(대하합섬)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벌써 1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화섬업계의 구조조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정부가 섬유산업의 지속적인 성장과 고부가가치화 정책을 표방했지만 제품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투자나 한계기업에 대한 지원은 빠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지역특화사업 육성 정책의 효시로, 대구·경북지역 섬유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된 ‘밀라노프로젝트’에 99년부터 2003년 말까지 투여된 자금은 6800억원. 여기에 후속 사업인 ‘포스트 밀라노프로젝트’로 2004부터 오는 2008년까지 1471억원이라는 예산이 추가 투입된다. 그런데 밀라노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섬유관련 기업들은 문을 닫고, 수출비중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대구사회연구소 권우현 선임연구위원(경북대 교수)은 “섬유산업 고도화를 위해서는 연구개발이 시급한데, 연구개발 시설투자가 ‘보여주기식’으로 추진돼 일부 시범 설비들은 과도하고 부적합한 시설임을 알면서도 사업이 집행됐다”고 지적했다.
한국합섬 관계자는 “밀라노프로젝트에 쏟아 부은 돈의 일부만이라도 한계기업의 사업 전환과 신규 사업 진출을 위해 투자했더라면 훨씬 현실적인 정책이 됐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관계자는 “한국합섬이 업계 최초로 4조3교대를 도입한 것은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향상이라는 정부 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는데도, 아무런 혜택도 주어지지 않았고 인건비 부담도 고스란히 기업의 몫이 됐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 2004년 3월 가동이 중단 된 채 방치 되어 있는 금강화섭 구미공장

산업 구조조정, 노동시장 정책 전제돼야
화섬산업이 직면하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노동력 고령화에 따른 인건비 증가다. 한국합섬의 경우 지난 91년 폴리에스터장섬유(PEF)생산에 나선 이후 14년 동안 신규 채용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최고 경력에 속하는 15년차 노동자를 비롯해 10년차 이상 노동자의 비중이 선발 화섬사에 비해 높아진 상태. 자연히 인건비 부담은 늘어난 반면 PEF 판가는 14년 전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하지만 인력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기존의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이 우선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게 업계 관계자와 노동계의 지적이다. 십수 년 간 실 뽑는 일에만 매달려 왔던 인력들에 대한 재교육 훈련과 재취업의 통로가 전제되지 않는 인력 구조조정은 노사갈등과 지역경제의 붕괴를 불러오기 때문.

화학섬유연맹 관계자는 “현재의 정부의 섬유산업 정책에는 섬유부문 구조조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노동시장 정책이 빠져있다”며 “섬유 노동자의 고용불안 및 생존권 위협에 대한 정부대책과 섬유노동시장에 관한 대책이 가장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대구사회연구소 권우현 선임연구위원도 “현재의 소품종 대량생산 시스템에서 고부가가치 상품 위주의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전문인력 육성이 필수적”이라며 “이는 노동시장 정책은 물론 노동자에 대한 교육훈련 투자 등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과제”라고 말했다.

구미지역 화섬업체의 잇단 진통이 일단락 됐지만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업계와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동종 업종 내에서는 비교적 후발주자로, 최신식 설비를 갖추고도 무너진 금강화섬, 기업 최후의 자산이라는 노사 신뢰가 무너진 한국합섬. 다음은 또 어디가 진통을 앓게 될지 모를 일.
산업 구조조정을 위한 대책에 노동계와 기업,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현실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