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을 아시나요?
꽃무릇을 아시나요?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6.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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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하승립
혹시 ‘꽃무릇’이라고 아시나요? 흔히 상사화라 불리는 꽃의 다른 이름이 꽃무릇입니다. 가을을 가을답게 만들어주는 꽃의 하나죠. 이 꽃무릇은 한 몸이긴 하지만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답니다. 잎이 말라죽고 나면 꽃이 피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꽃무릇에는 스님과 여인의 슬픈 사랑의 전설이 전해 옵니다. 누구는 스님이 한 여인을 너무 그리워하다가 끝내 숨진 후 꽃무릇으로 다시 태어났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여인이 스님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한 채 승방 앞에 쓰러져 죽은 후 그 자리에 꽃이 피어났다고도 합니다.

 

누구면 어떻겠습니까. 그리움과 엇갈림, 그리고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는 운명은 어느 쪽이든 아프기는 매한가지인 걸요. 그런데 이 전설 속의 스님과 여인이 이루어졌더라면 어땠을까요. 그 때도 해피엔딩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로 기억될까요. 때로는 이루어지지 못함이 아름다운 경우도 있는 모양입니다.

 

꽃무릇을 생각하면 늘상 함께 떠오르는 글귀가 있습니다. 여행작가 이시목의 글입니다. “누구든 이별 후의 그리움으로 목이 메는 가을이거든, 그리움으로 힘겹거든 선운사로 가라. 선운사 숲그늘엔 ‘그리움’으로 맺힌 꽃무릇이 지천이다. 쓴 소주 몇 잔에 잊혀질 사랑이 아니라면, 영영 가슴 한켠에 남을 사랑이라면 꽃무릇의 가슴 저미는 사연과 타오르듯 세찬 꽃불로 질긴 그리움을 잠시, 아주 잠시나마 태워버려도 좋으리라.”

 

우리는 늘 ‘완벽함’을 꿈꿉니다. 일의 결과도 완벽하기를 원하고, 내가 마주하는 상대방도 완벽하기를 요구합니다. 정작 내 자신이 얼마나 많이 비어 있는지, 얼마나 모자라는 지는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요. 아마, 그래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조금 비어 있다고 그 사람을 모자란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에게 상처를 남기는 걸까요.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것일까요. 먼 훗날,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라도 자신이 상처준 사람들을 기억할 수는 있을까요. 공식석상에서, 그리고 사석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의 칼을 휘두르는 일을 너무 자주 보게 됩니다. ‘세상을 바꾸자’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누군가가 그리운 것은, 무언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건 혹은 아픈 것이건 ‘함께’ 했기에 그리운 것입니다. 이 가을 누군가에게 상처주지 않으셨나요? 시간이 흐른 다음 잊지 못해, 돌이키지 못해 후회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어루만져 주십시오.

 

참, 꽃무릇이 어떻게 생긴 꽃인지 궁금하실 거 같아서 목차 페이지에 살짝 넣어뒀습니다. 선운사 가는 길에 보신 적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