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없는 변화의 시도, 불안하다
신뢰 없는 변화의 시도, 불안하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7.06.13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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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포 80% 철수 두고 씨티은행 노사 갈등 속으로
[리포트] 씨티은행 점포 축소

씨티은행이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건 1967년. 기업금융으로 시작한 씨티은행은 1986년부터 소매(리테일)금융을 시작해 1990년대에 리테일 영업을 본격적으로 확대했다. 지점은 서울 9개, 부산 2개, 경기 성남시 분당구 등 12개가 전부였다. 19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프라이빗 뱅킹(PB) 서비스'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도입했다. 1997년 신용카드업, 2002년 대부업으로 차근차근 소매금융 영역을 확대했다.

 

리테일 부문, 외국계 은행의 한계

하지만 전국의 12개 지점 영업망으로는 리테일 영업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미은행이 2004년 매물로 나오자 미국계 씨티은행과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모두 탐을 냈다. 결과는 씨티은행의 승리.

당시 한미은행은 전국에 225개 지점을 가진 중견 은행이었다. 씨티은행의 한미은행 인수는 외국계 은행이 국내은행을 인수한 첫 사례로 기록됐다. 세계 최강의 소매금융 노하우를 가진 씨티은행이 탄탄한 지점망을 갖춘 한미은행을 인수하면서 국내 금융시장의 판도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3년이 지난 지금 씨티은행은 은행권 판도를 바꾸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기업금융과 부유층만 공략하고 리테일은 사실상 포기했다. SC제일은행도 리테일 금융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의 시장점유율은 총여신과 총수신 모두 2~3%대에 그친다.

금융권에선 씨티은행이 리테일 영업에서 손 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본다. 전례는 많다. 2013년 홍콩상하이은행(HSBC)이 국내 소매금융 사업을 매각하고, 점포 10개를 폐쇄했다. 2014년엔 스코틀랜드 로열은행(RBS), 스위스은행(UBS)이 한국을 떠났다. 지난해에도 영국계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즈와 미국 골드만삭스가 은행 영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외국계 은행이 국내 은행 시장, 특히 리테일 부문에서 고전하는 것은 국내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한다고 많은 전문가가 분석한다. 국내 대형은행들도 앞다퉈 해외 진출을 하지만, 아직 '리테일' 부문 실적이 뚜렷하게 나오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신한·국민·우리은행 등 국내 은행은 상품군이 매우 다양하고, 고객과 장기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이른바 ‘밑지고 장사’하는 것에도 크게 망설이지 않는다. 하지만 외국계 은행은 상품군마다 철저히 리스크를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커, 국내은행과 리테일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고 해석한다.

씨티은행은 탄탄한 해외 네트워크가 강점이지만, 불특정 다수의 고객에겐 매력적인 요인이 아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일반 고객 중 해외로 송금할 일이 많거나, 해외에 오래 거주하는 고객이 얼마나 있겠느냐”며 “씨티은행이 리테일 금융을 포기한 하나의 이유일 수 있다”고 말했다.

씨티와 SC의 다른 행보

그런 가운데, 국내에서 은행업을 영위하고 있는 대표적인 외국계은행인 한국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의 상반된 경영행보가 새삼 이목을 끌고 있다. 같은 은행업을 영위하고 있으나, 경영전략이 사뭇 상반된 모양새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업점포 전략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씨티은행의 경우 전체 영업점포 중 80%를 줄이고 비대면과 자산관리에 집중하는 반면 SC제일은행은 이종업종과의 제휴를 통해 대중화를 꾀하는 모양새다.

“씨티은행의 재무목표달성과 비즈니스모델 변경을 위해 차세대소비자금융전략 이행에 지속적으로 집중할 것이다.”

“다양한 고객 니즈와 급변하는 기술혁신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SC제일은행만의) 미래지향적 영업기반을 구축해나가겠다.”

올 1분기 실적 발표에서 나온 박진회 씨티은행장과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의 다짐이다. 짧은 문장 속에는 각 은행의 지향점이 담겨있다. 같은 외국계 은행으로 자리 잡고 있지만 은행을 이끄는 수장의 전략은 극명하게 갈리는 모양새다. 한국씨티은행은 ‘차별화’에 방점을 찍었다. 특히 WM(Wealth Management·자산관리)센터를 확장하고, 전문성을 갖춘 고객가치센터와 고객집중센터를 신설해 고객의 무방문거래 활성화 등 비대면 역량을 키울 방침이다. 금융서비스를 디지털 시대에 맞춰 개편하고, 금융전문인력을 전통적 영업점 채널에서 벗어나 모바일, 인터넷 등 디지털 채널로 확장하기 위한 조치다.

이를 위해 씨티은행은 ‘차세대 소비자금융 전략’을 발표하며, 현재 운영 중인 출장소를 포함한 총 126개의 영업점을 점차적으로 25개로 축소하기로 했다. 전체 영업점의 80% 가량이 사라지는 셈이다.

▲ 전담직 업무 범위를 보여주고 있는 내부 공문.

이와 함께 씨티은행은 올 하반기 광화문에 자산관리와 금융컨설팅을 중심으로 하는 ‘WM센터’를 개점할 계획이다. WM센터는 씨티은행이 중점 추진하고 있는 주력 사업으로, 씨티 WM센터는 기존의 반포와 청담센터 개점에 이어 서울과 도곡, 분당센터까지 3곳 더 확대될 예정이다. 하지만 일반 영업 점포 폐점 후 해당직원과 고객 불편 해소에 대비한 계획은 미비해 노사간 갈등을 빚고 있다.

이에 반해 SC은행은 대중화와 이종업종 결합 등을 통해 고객과의 접점을 확대하고 있다. 앞서 SC제일은행은 신세계와 손잡고 평일이나 휴일 구분 없이 이용 가능한 경량화 점포를 내놨다.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 내에 마련된 ‘뱅크샵’과 ‘뱅크데스크’는 은행직원이 2~4명만 상주하는 초소형 점포로, 중금리 대출을 포함한 여신상품, 수신상품, 투자상품 등 대부분의 은행 업무를 이용할 수 있다. 한편 SC제일은행은 올 1분기 전년동기 대비 723억 원(248%) 증가한 1,014억 원의 당기순익을 시현했다. 같은 기간 씨티은행은 319억 원(87.4%) 늘어난 684억 원의 순익을 올렸다.

한국을 떠난 외국계 은행

2013
- 홍콩상하이은행(HSBC) 국내 소매금융사업 매각, 점포 10개 폐쇄

2014
- 스코틀랜드 로얄은행(RBS), 스위스은행(UBS) 철수

2016
- 영국계 투자은행 바클레이즈 39년 만에 서울의 은행 지점 폐쇄
- 미국 골드만삭스 은행부문 골드만삭스인터내셔널은행 서울지점 면허 반납

영업점 80% 폐쇄 후 인력 재배치 계획

점포 통폐합을 두고 한국씨티은행 노사는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 씨티은행노조는 쟁의행위에 돌입할 계획이다. 노사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점은 영업점 통폐합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에 대해 노조는 사측이 직원들 숙소를 비롯한 구체적인 대안 없이 점포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으며 씨티은행이 시중은행으로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 100개 이상의 점포는 유지해야 한다며 맞서고 있다.

이외에도 노조는 사측에 ▲임금 인상(정규 4.4%, 계약직 8.8% 인상) ▲특별상여금 300% 지급 ▲월차휴가 보장 ▲무기계약직 전체 정규직 전환 등을 요구했지만,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씨티은행노조는 투쟁 지침을 배포하고 준법 투쟁에 나설 예정이다. 노조가 계획 중인 준법 투쟁은 정시 출퇴근과 각종 보고서 금지, 행내 공모 면접 중지 등으로 노조는 향후 태업과 파업 등으로 단계적으로 투쟁 강도를 높여갈 계획이다.

한편, 씨티은행노조는 조합원들을 상대로 파업 찬반 투표를 벌인 결과 투표에 참여한 조합원 2,150명 가운데 약 94%(2,012명)가 찬성해 파업 결의안이 통과된 바 있다.

김호재 노조 홍보부위원장은 “이번 쟁의는 4차 산업혁명의 저지도 아니고 변화하는 시대에 역행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며 “다만 4차 산업혁명을 핑계로 아무런 준비없이 점포의 80%를 폐점하고, 은행을 먹여살린 고객들은 나몰라라 하는 경영진의 행태에 금융 소비자로서의 분노를 여실히 보여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소비자금융 전략 변화의 목표는 지점 수 조정이 아니라 변화하는 고객의 금융 서비스 이용 방식에 발맞춰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새롭게 변화하는 것”이라며 “가용 인력은 고객가치센터나 고객집중센터 뿐만 아니라 WM센터와 여신영업센터 등으로도 재배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변화하는 환경, 추락하는 신뢰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비단 금융산업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변화를 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변화는 노도 사도 생존과 직결돼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변화의 시도는 서로에게 오해를 살 소지가 다분하다. 씨티은행 노사의 갈등과 대립 양상을 보면 이와 같은 모습이 드러난다.

은행 측의 변화에 대한 고민은 비단 씨티은행만의 일은 아니다. 인터넷뱅크의 흥행을 지켜보며 시중은행들 역시 디지털 금융의 주도권을 잡고자 전력을 다하고 있다. 각 은행마다 지점과 출장소 등 영업점을 줄이고 있는 추세도 마찬가지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전국 은행 영업점 수는 7,103곳으로 1년 전보다 175곳이나 줄었다. 통계를 확인할 수 있는 2002년 이후 최대 규모로 감소했다.

최근엔 주요은행이 명동이나 강남역, 잠실 등 서울 시내 알짜 점포도 팔고 있다. 상징적인 의미가 큰 본점도 매물로 내놨다. KEB하나은행이 현재 본점으로 쓰는 옛 외환은행 본점 건물은 곧 입찰에 들어간다. 이 건물은 지하 3층, 지상 24층 규모로 예상가는 1조 원을 넘는다. KB금융지주 역시 KB국민은행의 서울 명동 점포를 매각한다. 이 건물은 지하 4층, 지상 17층 규모로 최소 4,000억 원 이상은 될 것으로 추정한다.

국내 시중은행도 비용 절감을 위한 뾰족한 방법은 없다. 모바일 앱 이외에도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등 앞서나가기 위해 새롭게 개척해야 할 영역도 많다.

금융권에서는 씨티은행의 최근 행보를 두고 방향은 맞지만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라는 평을 내놓고 있다. 씨티은행이 과감하게 점포를 줄이겠다는 것도 ‘디지털’에 대한 자신감이 배경이다. 씨티은행은 일찌감치 모바일 앱에 많은 공을 들여왔다. 씨티은행 ‘NEW 씨티 모바일’앱은 실행하면 로그인 없이도 계좌 잔액이나 거래내용 등을 조회할 수 있다. 계좌이체를 할 때도 계좌 비밀번호 입력이나 공인인증서가 필요 없다. 본인 계좌나 자주 쓰는 계좌로 이체할 경우 500만 원까지는 지문 등으로 로그인만 하면 어떤 인증도 없이 이체할 수 있다.

글로벌 은행의 강점을 살려 모바일 앱에서도 계좌 간 환전, 해외송금, 다른 국가 씨티은행 계좌로 수수료 없이 무료로 거의 실시간 송금이 가능하다. 모바일뱅킹 전반에 걸친 혁신성을 인정받아 ‘모바일 어워드 코리아 2017’ 금융서비스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씨티은행 관계자는 “디지털 채널 강화를 통해 고객의 80%를 디지털 채널 적극 이용자로 전환하겠다”며 “한국 시장의 지점 80% 축소 전략은 글로벌 전략과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앞두고 있는 은행의 행보는 곧지 않다. 인원 구조조정을 우려한 노동조합의 맹목적인 반대라고 말하기에는 은행 측의 태도가 미흡하다. 임단협 교섭이 결렬되고 노조가 쟁의행위 돌입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기존에 교섭 석상에서 논의되던 전담직의 정규직 전환 이슈를 미리 언론을 통해 흘리는 등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언론플레이’의 시점은 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고 약속한 직후였다.

노조는 전담직 이슈의 경우 이번 교섭에서 그다지 충돌하지 않았던 사안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동안의 전담직들은 신규/해지, 상품판매, 대출, 신용카드 등의 업무는 수동적 업무에 한정되어 있었다. 은행 입장에선 정규직 전환 이후에는 해당 업무를 자유롭게 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