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해법을 찾아
비정규직 해법을 찾아
  • 승인 2004.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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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와 경쟁력은 제로섬 게임?


“솔직히 말해서 비정규직들의 희생을 통해서 정규직이 고용안정을 보장 받은 게 사실 아닙니까? 비정규직 철폐요? 씨도 안 먹히는 소리하지 말고 수당이라도 하나 더 챙겨주는 게 낫죠.”

“원칙대로 가자는 겁니다. 원래대로라면 다 정규직이었어야 할 사람들 아닙니까. 회사가 이익을 조금만 더 내 놓으면 이 사람들 다 정규직으로 고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도 정규직, 비정규직 둘 다 고용보장해 주고 싶죠. 똑같이 대우할 수  있다면 더 좋죠. 그렇지만 회사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경기 좋을 때 왕창 정규직화 했다가 경기 나빠지면 그 사람들을 다 어떻게 먹여 살립니까?”

 

최근 불거진 불법파견 논쟁을 둘러싸고 생산현장의 노사는 탈출구 없는 불만만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에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조까지 가세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저항할 태세여서 해결방안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동안 기업은 ‘경쟁력을 높이고,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나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로 노동조합의 양보를 얻어왔다.
정규직 노동조합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의 활용을 묵인하는 대신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보장받았다.


이에 대해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주무현 교수는 “정규직 조직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 하청노동자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들의 임금 및 근로조건 개선에 노력해야 하는 모순적 위치에 놓이게 됐다”고 지적했다. 결국 정규직 조직노동자와 비정규직 하청노동자간의 이중적 고용구조가 굳어졌다.

 

실업은 IMF 이전으로 회복됐지만 새로 생긴 일자리들은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다. 기업은 ‘경쟁력을 위해 나쁜 일자리를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운다. 노동계는 기업이 조금 더 내놓으면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끊임없는 제로섬 게임을 끝내고 노동의 질과 기업 경쟁력을 함께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례 1 _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IMF 이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연산 규모는 꾸준히 줄어 2001년에는 기존의 25만대에서 10만대까지 떨어졌다. 그러던 것이 2002년, 경기회복과 함께 생산량이 늘면서 사내하청노동자도 증가해 하청노동자 수가 1100명에 달했다.


2002년 후반 들어서 일부차종 단종과 신차 도입으로 라인 재편성이 시작됐는데 이 과정에서 회사는 1100명에 달하던 사내하청노동자 중 600여명을 해고했다.

대량해고에 위기를 느낀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해 회사와 협상을 요구했고, 결국 400여명의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해 1년간 비정규직 임금을 유지하면서 1년 후 정규직화 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다.

 

당시 사내하청노조의 진정을 대리했던 노무법인 참터의 이병훈 노무사는 “사내하청노조 결성 등으로 일부 갈등과 마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로 광주공장에서 노사대립으로 인한 손실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정규직화된 400명은 어차피 생산에 필요한 인원이었기 때문에 노사 모두에게 필요충분조건이 다 갖춰졌다는 게 이 노무사의 설명이다.

 

● 사례 2 _ 금호타이어


올 2월 불법파견 판정을 받은 금호타이어의 사내 비정규직 규모는 700여명이었다. 이 중 파견노동자가 500여명, 나머지 200명은 도급이었다.


노동부는 이중 282명에 대해 불법파견을 인정했다. 노사는 282명 중 사실상 정규직 일을 하고 있는 128명은 즉시 정규직화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해서는 추후에 논의하기로 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올해 들어 추후에 논의하기로 한 나머지 인원이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회사가 이들 노동자에 대해 도급 직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에 반해 노동조합은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맞서고 있다.


당시 금호타이어의 사례는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 연대의 모범 사례로 여러 언론과 노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연대할 수 있었던 것은 비정규직노조의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금호타이어에서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정규직노동자들이 기피하는 어렵고 힘든 공정이다. 비정규직노조는 정규직노동자들과의 마찰을 피하고 그들을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정규직 전환 후 5년간은 현재의 공정에서 계속 일하겠다’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이를 통해 정규직노동자들의 불만을 피해갔다. 이처럼, 문제가 원활하게 해결된 곳에는 서로의 이해 일치 영역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있었다.

 

● 사례 3 _ 한국합섬


드문 경우지만 개별 기업 노사의 공동 노력으로 비정규직을 줄이면서 ‘좋은 일자리’와 경쟁력을 함께 추구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합섬 구미공장은 업계 최초로 4조3교대제를 도입했다. 원자재난에 중국제품의 추격까지 겹쳐 경쟁력을 급속히 잃고 있는 화학섬유업계 사례라 더 주목을 받았다.


회사가 경영난을 이유로 적자를 내는 공정을 폐쇄하기로 하자 노조는 이 공정에서 일하는 노동자 126명을 다른 생산 공정으로 옮기고, 근무형태를 3조3교대에서 4조3교대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동료들의 일자리를 지키는 대신 모든 사원들이 임금을 평균 13만원씩 깎기로 했다.


회사가 이를 받아들여 폐쇄하기로 한 공정에 비정규직 96명을 새로 채용했고, 이들도 올해 임단협에서 정규직 전환 사원에 포함됐다. 임금은 줄었지만 126명의 일자리를 지키고, 96명에게 ‘좋은 일자리’를 나눠주게 된 것이다.


이 회사 노동조합의 김진년 위원장은 “동료들과 일자리를 나누는 대가로 임금을 깎아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코앞만 내다볼 게 아니라 일자리를 지켜야 다함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연대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회사는 회사대로 성과를 올렸다. 구미 제2공장의 이석하 공장장은 “사람을 내보내는 대신 고용과 노동조건을 보장하면 노동생산성이 높아져 경쟁력도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고 실제 상당한 생산성 향상 효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이 같은 사례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어떤 시사점을 주고 있을까.


첫째, 일자리에 대한 경영진의 확고한 신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중 어느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한다면, 노사불신은 점점 커지고 노사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다.


둘째,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에는 법보다 노사의 의지와 협조가 필요하다. 노사가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납득할만한 기준과 관행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특히 작은 부분이라도 정규직노조, 비정규직노조, 회사가 삼자간 이해일치영역을 찾아 이를 최대한 키우는 것이 중요한 해결의 열쇠다. 노무법인 참터의 이병훈 노무사는 “기아차나 캐리어의 경우, 회사는 인력충원의 필요성을 충족했고, 정규직노동자는 고용안정을, 비정규직 노동자는 차별 해소를 얻은 부분이 있었기에 삼자간 합의가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셋째로 비정규직 고용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사용자뿐 아니라 노조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이 중요하다. 정규직 고용관계의 경직성이 비정규직의 대거 활용을 불러왔다는 비판을 노조도 겸허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최영기 원장은 “정해진 일자리 수를 가지고 노사가 줄다리기를 하는 이상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며 “노동조합은 기업에 투자를 통한 좋은 일자리 창출을 요구하는 동시에 정규직-비정규직간 공정한 임금배분과, 노동자들의 숙련향상, 불가피한 고용조정에 대한 합리적 해결 등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역 노동시장 차원의 접근 필요성도
비정규직 고용관리를 위해 지역 노동시장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전남대 경제학부 홍성우 교수는 “광주지역에서 비정규직 문제로 캐리어, 기아차, 금호타이어 등 주요 기업에의 분쟁이 반복됐지만 지역사회와 지역의 노동계는 속수무책이었다”며 “지역 노동시장의 활성화와 지역 일자리 창출의 차원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는 궁극적으로 해당 산업이나 지역 노동시장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울산지역 학계와 공익전문가, 노동계 일부에서 “오토밸리 프로젝트 내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직업훈련 및 근로복지제도를 포함시켜 이들의 고용 및 생활의 질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도 지역 노동시장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일자리’와 ‘경쟁력’ 함께 잡을 수 있다.
선진국의 지역 노동시장 정책 중에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은 미국 위스컨신주의 실험이다. 이 지역에서는 제조업 쇠퇴에 따른 일자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노-사-지역단체가 공동으로 ‘교육훈련 파트너십’을 설립했다.


이 파트너십은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높여 더 나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향상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1995년부터 5년간 교육훈련파트너십의 주체인 기업과 노동조합 등은 교육 훈련과 숙련 증진 프로그램 마련에 1억 달러 이상을 투자했다.


이 결과 6천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 지고 1400명 이상의 지역 사회 거주자가 일자리를 얻었다. 새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의료 보험, 연금혜택, 기타 복지는 물론 시급 10달러 이상이 보장되는 ‘좋은 일자리’였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는 고용의 질이 높아지면서 생산성이 함께 향상됐다는 결과가 여러 연구기관을 통해 발표됐다. <관련기사 89면>


위스컨신 전략센터(COWS)의 조엘로저스 센터장은 “지역노사가 노동자의 숙련향상과 직무개발에 투자함으로써 기존의 저숙련-저임금 노동자들이 더 좋은 일자리로 이동할 자격을 갖췄고, 기업은 이들의 높아진 노동생산성 덕에 경쟁력도 잡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기업 경쟁력의 약화로 ‘좋은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가고, 저임금, 비정규 노동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경쟁력과 일자리는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노사가 깊이 인식할 때라는 지적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