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 시대, 다시 ‘어머니’ 이소선을 기억하다
노동존중 시대, 다시 ‘어머니’ 이소선을 기억하다
  • 김민경 기자
  • 승인 2017.10.1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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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기 추도식서 만난 사람들…‘노동자 하나 되라’는 말씀 잊지 말자
[인터뷰]이소선을 기억하는 사람들

아들 전태일의 죽음 이후, 41년을 한결같이 살았다.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헌신하며 늘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되고 차별 받는 이들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이소선 여사를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부르는 이유이다.

쨍하고 맑았던 지난 9월 3일 이소선 어머니의 6주기 추도식이 마석모란공원에서 열렸다. 200여 명의 추모객들이 모였다. 이들은 청계피복 노동조합(1970), 여공 노동교실(1973),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1981, 현 전태일재단),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1986) 등 그가 한국사회에 남긴 결과에 앞서 주고받았던 대화, 함께했던 장면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었다. 노동 존중 시대, 그들의 기억을 통해 이소선 어머니의 정신을 기린다.

사랑이 많았던 노동자들의 투사

“현미야, 교회 가자.”

청계피복노동조합 조합원이었던 최현미 씨는 새벽 기도를 다니던 어머니의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사랑이 많으셨던 분”이라며 “기도를 할 때는 하나하나 조합원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했다.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의 친구들과 이소선 어머니가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조직해 만들었다. 노조는커녕 노동운동도 없었던 한국 노동계의 암흑기였다. 전태일이 분신한 1970년 결성됐지만, 1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합법노조가 됐다. 청계피복노조는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맞서며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 받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겪어야 했던 탄압은 극심했다. 어머니를 비롯한 노조 간부들의 구속과 수배가 수차례 반복됐다. 노조는 두 번이나 해산을 당했다.

이 대목에서 최 씨는 어머니를 ‘단호한 투사’로 표현했다. “당시 지금의 정보과 형사 같은 사람들이 따라 붙어 노조 유인물을 배포해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는 경우가 많았다”며 “어머니는 폭력에 대해 강하게 저항했다. 회의나 농성을 할 때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결정을 내렸는데 정세를 읽는 데 뛰어났다”고 설명했다.

‘노동운동은 나만 잘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문제에 가슴 아파했다. 그러면서 최 씨는 “양대노총은 항상 연대해 하나가 돼야한다”며 “노동자들이 모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 어머니의 말을 전했다. 또 “장기 농성, 고공농성, 분신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가슴 아파 하셨고, 노동운동은 살아서 해야 한다는 말씀도 많이 하셨다”고 덧붙였다. 이어 “어머니는 한국이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유가협도 만들고 민주화운동보상법도 만들어냈다”고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지금은 마냥 ‘현미야’하고 이름을 부르며 하시던 이야기가 귀에 뱅 돈다. 그립다”고 말했다. 현재 최 씨는 전태일재단 봉제사업단장을 맡고 있다.

잊을 수 없었던 ‘미안하다’는 말

“미안하다. 항상 그렇게 말씀 했어요.”

김진찬 씨가 어머니를 만난 건 2008년 여름이었다. 수박 한 통을 사들고 창신동 집으로 찾아 갔다. 김 씨는 당시는 한솔교육 학습지교사로 일하다가 노조 활동을 빌미로 해고를 당해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노동자와 갈등을 겪던 변재용 한솔교육 사장은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였다. 그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인 사람이 회사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대하느냐는 여론이 있었다”며 “누군가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뵙고 이야기를 해보라고 일러줬다”고 말했다.

그가 만난 어머니는 건강이 안 좋아 거동이 불편했다. 김 씨의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변재용 한솔교육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의미 있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김 씨는 “변재용 사장은 어머니에게 그런 문제로 앞으로 통화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며 “어머니는 예전 같았으면 쫓아 들어가 멱살을 잡았을 텐데, 늙어서 전화밖에 못하고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하다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화라도 한 통 하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배려해주신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며 “괜한 부탁을 하게 돼 송구스러웠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사측에 부당해고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맞섰지만 결국 복직하지 못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단결. 그는 되살려야할 어머니의 정신으로 ‘노동자들의 단결’을 꼽았다.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 많이 생기고 있다”며 “노동자들끼리의 경쟁 혹은 내부 분열을 이용하고 노동자의 단결을 저하시키는 부분에 대해 좀 더 넓고 깊게 생각해 극복하고 제대로 단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이를 자식으로 여겼던 분

“똑같아요. 엄마들이 하는 말씀이랑. 잘 먹고 다녀라, 아프지 말고.”

곽미순 씨의 1인 봉제 사업장은 창신동에 있다. 어머니가 살던 동네라 자주 뵈었다. 곽 씨는 “어머니도 건강이 안 좋으시면서 어머니를 찾아오는 나이 지긋한 자식들에게 아프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다며 항상 챙기셨다”며 “갑자기 건강이 악화돼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일찍 가셨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어머니를 주로 뵐 때가 8년 전이라 집에 계실 때가 많았지만, 시청에 농성이 있을 땐 자주 나가셨다”며 “아프기 전에는 계속 활동을 하셨다”고 덧붙였다.

곽 씨는 어머니를 ‘남다른 분’으로 기억한다. ‘내 자식만’이라는 욕심이 없었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각자의 사연으로 어머니와 마음으로 연을 맺은 많은 아들과 딸들은 명절이면 어머니를 찾았다. 곽 씨는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면서 많은 이들이 와서 음식을 해드리고 용돈을 드리며 챙겼다”며 “ 떨어져 있는 진짜 부모님에게 보다 가까이 계시는 어머니에게 더 잘 했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내겐 실제로 부모님과 같았다”며 “지금은 돌아가신 친부모님들과 똑같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곽 씨는 노동친화적 봉제공장 ‘참 신나는 옷’에서 일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 씨가 대표다. 전 대표와의 인연은 수다공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다공방은 2003년 전 대표가 만든 참여성노동복지터가 세운 패션봉제기술 학교다. 봉제 숙련공들에게 옷을 만드는 전체적인 과정을 교육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다공방 1기 출신인 곽 씨는 지금도 전 대표와 함께 일하고 있다.

곽 씨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 전 대표는 소상공인을 대변해 봉제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과 교육에 힘쓰고 있다”며 “과거에 비해 봉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노동환경은 개선되고 국가의 지원도 늘어났지만 여전히 열악한 곳이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재 50, 60대들이 거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봉제 기술자들”이라며 “청년들에게 봉제 기술을 가르쳐 이어나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기억해야 그 정신도 잊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항상 앞장서서 힘들게 투쟁을 하셨다”며 “노동자들이 어머니의 정신으로 노동 현장을 더 나아지도록 바꿔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이어 “올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의 문제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더 좋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노동자 하나 되는 것이 중요

“도움 준 사람들의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한다. 노동자들이 힘을 합칠 수 있게 노력을 해야 한다.”

이장주 이소선합창단 명예매니저는 어머니가 노동자들의 손을 잡으면서 하셨던 두 가지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이소선합창단은 그런 어머니의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 씨는 “합창은 각자의 다른 목소리를 하나로 합쳐내 음악을 만드는 방식”이라며 “어머니의 정신과 닳았다.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소선합창단은 매달 한 두 번은 꼭 현장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찾아다닌다.

이 씨는 유가협에서 일하던 아내를 통해 어머니와 가까이 지냈고, 추석과 설마다 집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다. 2011년 어머니 장례준비위원회 기획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당시 ▲전국 동시 추도식 진행 ▲어머니 살아생전 올레길 걷기(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동대문 상가에서 어머니가 지내시던 하늘쌈까지) ▲현장노동자들이 부르는 어머니의 추도 노래 등 세 가지 행사를 기획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서 어머니 추도가를 불렀다”며 “그 단위가 헤어지기 아쉬워서 합창단으로 가자는 내부 결의를 모아 ‘이소선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노동자가 부문과 업종, 상급단체를 넘어서 하나가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소선합창단은 올해 어머니의 6주기 추도식에도 객이 아닌 주의 입장으로 참석했다. 이날 이들은 어머니를 위한 자작곡 ‘손 내밀어’를 부르며 추도식 분위기를 더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 씨는 “어머님의 의지는 전태일 동지의 의지고, 전태일 동지의 의지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라며 “남은 우리들은 어머님의 뜻이 이어가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 또 “노동자의 길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대접받는 사회를 요구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더 뭉쳐서 싸워야 한다.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라며 “그러면서도 고생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을 분”이라고 기억했다.

이날 추도식에는 어머니와 개인적인 인연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참석했다.

한동안 외국에서 초빙교수로 일했다는 김명신 씨는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외치다가 죽은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와 관계없이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며 “해외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분들의 죽음을 직접 추모하지 못했다. 이소선 어머니 평전을 읽고 특별한 모성애를 가진 불굴의 여인이었음을 느꼈다. 꼭 오고 싶던 자리”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세월호 미수습 가족을 돕는 자원봉사를 한 유상선 씨는 올해 추도식 참석이 두 번째이다. 그는 “세월호 유족들도 이소선 어머니도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며 “안전과 생명이 무시되고 돈벌이만 우선되는 자본주의의 한계는 뚜렷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사람을 우선한 어머니의 정신을 잊어선 안 된다”며 “일상 속에서 살다보면 중요한 것을 놓치고 나태해지곤 하는데 어머니의 추도식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