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 러시안룰렛 된 고속버스
도로 위 러시안룰렛 된 고속버스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7.10.1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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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 임금체계’가 사고 원인?
[리포트] 고속버스 임금체계

황금연휴를 앞두고 고속버스 이용객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9월 2일 하루 동안에만 모두 세 건의 고속버스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천안논산고속도로에서 1건, 경부고속도로에서 2건의 사고가 일어났다. 이 사고로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원인에 대해 경찰은 고속버스 운전기사의 졸음운전에 무게를 실었다. 운행거리(km)에 따라 임금과 수당이 결정돼 졸음운전을 불러왔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KTX·항공보다 싸서 좋지만 결국 비지떡 됐나

우리나라에서 고속버스가 첫 운행을 시작한 때는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된 1969년이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본격적인 고속버스 시대가 열렸다. 이후 도로 중심 교통망 구축 정책에 힘입어 방방곡곡에 고속도로가 연결되면서, 고속버스는 전성기를 보낸다. 시속 300km의 고속열차가 서울과 부산을 2시간 30분대에 이어주는 지금에도 고속버스는 나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항공기 비즈니즈석을 연상케 하는 프리미엄 고속버스가 경부·호남·영동선 주요 노선에 투입돼 편의성을 대폭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TX나 항공에 비해 고속버스의 최대 강점은 합리적 가격이다. 서울-부산 간 KTX 일반실 요금이 5만 9,800원인 데 반해 같은 구간의 고속버스 요금은 우등고속을 기준으로 3만 4,200원에 불과하다. 저렴한 요금 덕택에 주머니가 가벼운 시민들의 중·장거리 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싼 게 비지떡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은 것일까. 9월 2일 발생한 세 건의 고속도로 연쇄 추돌사고는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승객의 생명이 외면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게 된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사고가 나서는 안 되겠지만, 운전기사가 졸음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고, 승객이 다치거나 숨지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운전기사의 졸음운전 때문에 일어난 고속버스 교통사고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차량을 들이받을지 알 수도 없다. 그야말로 도로 위의 달리는 ‘러시안룰렛’이다.

천안논산고속도로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들은 열여섯의 나이에 상주가 돼야 했다. 7월 9일 M5332번 광역급행버스가 앞서가던 승용차를 덮쳐 주말 나들이를 떠난 부부가 즉사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가뜩이나 시민들의 불안이 고조돼 있던 터였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난 한 50대 시민은 “값이 저렴해서 고속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자주 사고가 나버리면 무서워서 어떻게 타겠느냐”고 불안감을 드러냈다. 또 다른 시민은 “추석연휴가 상당히 길어서 차가 별로 안 막힐 것 같아 고속버스를 이용하려 했지만 (사고 때문에)열차편을 알아보고 있다”고 전했다. 졸음운전 사고가 연이어 터지면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 한 고속버스 운전기사가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을 빠져나가 시내 간선도로로 진입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국토부 졸음운전 방지대책, ‘km임금제’ 고속버스는?

7월 9일 광역급행버스 사고 발생 20여 일 만인 28일 국토교통부는 ‘사업용 차량 졸음운전 방지대책’을 발표했다. 운전자의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권 광역버스 3,000여 대에 전방충돌경고기능을 포함한 차로이탈경고장치를 장착키로 했다. 또 오는 2019년까지 그 대상을 기존 ‘11m 초과 승합차량’에서 ‘고속도로를 운행하는 길이 9m 이상 사업용 승합차량’으로 확대하고, 장착비용의 일부를 정부가 지원키로 했다. 이외에 비상자동제동장치와 같은 첨단안전장치를 장착한 차량의 보급을 확대한다. 또 장시간 연속운행을 막기 위해 2시간 운행 후 15분 휴식 원칙을 확대하고, 고속도로와 일반국도 주요 지점에 졸음운전 방지시설을 설치한다.

이외에 국토부는 시내·광역·시외·고속 등 노선버스 운전기사의 장시간 운전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노동시간 상한을 설정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현행 근로기준법 제59조에 따르면 운수업은 이른바 노동시간 특례업종으로 사실상 노동시간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국토부 대책과는 별개로 7월 3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소위원회에서는 노선버스에 한해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키로 여야가 합의했다. 한편 국토부는 광역버스 운전기사의 연속 휴게시간을 기존 8시간에서 10시간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내놨다.

이 같은 대책을 놓고 일각에서는 ‘수박 겉핥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른 노선버스(노선여객자동차운송사업)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고 있는데, 대책이 발표되기 전 발생한 광역급행버스 사고만을 의식한 탓에 국토부가 시외·고속버스를 놓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공교롭게도 국토부의 졸음운전 방지대책이 발표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 고속버스 추돌사고가 잇따라 발생했다.

버스운송업의 장시간 운전이 워낙 고질적인 탓에 어디부터 메스를 들이대야 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고속버스의 경우 타 노선버스와 달리 독특한 임금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노동자의 임금과 수당은 근무시간에 따라 결정된다. 더 길게 일할수록 더 많은 연장근로수당을 받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속버스는 그렇지 않다. 고속버스 운전기사들의 임금은 몇 시간 동안 운행했는지가 아니라 몇 km를 운행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한 고속버스업체의 임금협약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이 업체의 임금은 ‘기본급+연장근로수당+상여금’ 구조가 아닌 ‘기본급+승무제수당+상여금’ 구조였다. 이 같은 임금체계를 현장에서는 ‘km임금제’ 또는 ‘km 수당제’라고 부른다.

이 업체는 주 40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한 달 19일 만근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다. 19일 이상 근무하면 한 달분의 기본급을 추가로 지급하는데, 올해 신규 입사자의 월 기본급은 110만 3,837원이었다. 여기에 ‘승무제수당’과 기타 수당을 합한 금액을 월 급여로 받는다. 승무제수당은 1km당 78.85원이 책정돼 있었다. 또 만근일과 별개로 월 기준운행거리(km)를 1만 2,320km로 정하여 만약 이를 초과해 운행할 경우 승무제수당에 일정 비율을 가산한 금액을 초과근로수당(연장근로수당) 명목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연장근로의 기준 역시 시간 단위가 아닌 거리 단위로 이는 다른 직종과는 다른 것이다. 이 업체의 경우 서울-부산 노선의 승무제수당은 3만 302원이었다. 서울-대전 노선은 1만 2,079원, 서울-대구 노선은 2만 2,306원 등이다.

▲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조합원들이 지난 7월 31일 국회 환노위 고용노동소위원회 회의에 앞서 서울 여의도에서 버스운송업을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하라며 집회를 열었다.

임금체계 손질 없는 졸음운전 방지대책 실효성 의문

이 같은 ‘km임금제’는 국내 고속버스업계의 공통된 임금체계로 알려져 있다. 기본급이 상당히 낮은 반면 운행거리에 따른 수당이 많아 운전기사들이 받는 총 급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km임금제가 갖는 맹점은 교통정체가 발생했을 때 드러난다. 가령 서울-부산 간 고속버스의 소요시간은 고속버스통합예매사이트 기준으로 4시간 15분, 운행거리는 384.3km다. 만약 교통정체로 인해 운행시간이 늘어날 경우 운전기사의 근무시간은 당연히 늘어난다. 하지만 이 운전기사의 운행거리는 384.3km로 변함이 없다. 결국 더 오래 운전대를 잡고도 이 운전기사가 서울-부산 노선 운행으로 받는 승무제수당은 3만 302원으로 같다. 교통정체가 심할수록 운전기사가 손해를 보는 구조인 것이다. 운전기사 입장에서는 교통정체로 인한 운행거리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더 오랫동안 일해야 한다.

김정모 고속버스노동조합 위원장은 9월 2일 발생한 3건의 사고 모두 졸음운전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김정모 위원장은 “브레이크를 한 번이라도 밟았다면 사람이 죽을 정도로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속버스 기사들 중에서 한 번씩 안 졸아본 사람은 없다”며 “km제를 하면 급여가 많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교통정체가 생겨서 운행거리를 못 채우면 수당이 오히려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고속버스 운전기사들은 장시간 운전에 따른 졸음을 쫓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껌을 씹거나 커피를 마시는 일은 기본이고, 심지어 청양고추나 생마늘을 씹어 먹는 사례도 실제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음악을 듣거나 혼잣말을 하고, 이쑤시개로 허벅지를 찌르며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는 이도 있었다.

버스운송업계의 졸음운전이 사회문제로 비화되는 가운데, 고속버스에 대해서만큼은 다른 대책을 내놓기에 앞서 임금체계 손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전국자동차노동조합연맹 관계자는 “다른 버스업종처럼 시간 단위로 임금이 책정함과 동시에 운전기사들의 연속 휴게시간을 보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버스운송업을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제외하더라도 km임금제를 손보지 않는 한 운전기사들의 노동시간을 규제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사고가 있을 때마다 계속되는 땜질식 처방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