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길 막는 조선업계 블랙리스트의 존재
취업길 막는 조선업계 블랙리스트의 존재
  • 이동희 기자
  • 승인 2017.11.2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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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와 “없다”, 엇갈리는 주장… 실태조사 결과는?
[리포트] 조선업종 비정규직 블랙리스트 의혹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 조선자료집을 살펴보면 1990년 약 3만 5천 규모였던 조선사 직영(원청) 기능직 인력은 2015년에도 여전히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사내하청 기능직은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 7천여 명이었던 사내하청 기능직은 2015년 13만여 명으로 늘어나 직영 대비 사내하청 노동자 비율은 367%에 달한다. 이처럼 한국 조선산업이 사내하청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사내하청 중심 성장이 사내하청노동조합 조직력 강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일례로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 규모는 3만여 명에 달하지만 금속노조 울산지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이하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은 200여 명으로 낮은 조직률을 보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창민 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은 “하청노조가 여전히 대중적인 노동조합으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마디로 블랙리스트의 존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 금속노조 울산지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조선업계에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전국금속노동조합 조선업종 비정규직 블랙리스트 실태조사연구팀(이하 실태조사연구팀)은 현대중공업에서 하청노조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진 구체적인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003년 8월 사내하청지회가 만들어진 직후로 추측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내하청지회가 설립된 이후부터 2004년까지 약 1년에 걸쳐 조합원이 속한 업체들을 모두 폐업하거나 해고해버렸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내하청지회는 노조 설립 이후 지금까지 블랙리스트를 뿌리 뽑기 위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난 4월 11일에는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인 전영수 조직부장과 이성호 대의원이 20미터 교각 위의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그들의 고공농성 투쟁 요구는 크게 세 가지로 ▲블랙리스트 철폐 ▲하청노조 조합원 복직 ▲노조 할 권리 보장이었다.

지회에 따르면 전영수 조직부장과 이성호 대의원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을 오가며 사상공(그라인더)으로 근무했다. 이들은 현대미포조선의 업체 폐업으로 타업체 이관과 고용승계에서 배제되고 사내하청업체 개별 취업도 가로막히자 고공농성에 들어갔다. 20미터 교각 위에 오르기 전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업체에 이력서를 냈으나 원청이 직접 막고 있어서 고용이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은 지난 7월 26일, 고공농성 107일 만에 현대미포조선 외주협의회 회장과의 실무협의에서 하청노조 조합원 복직을 약속받고 땅으로 돌아왔다.

지회는 지난 5월 김종훈 의원(민중당·울산동구)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하청지회 조합원 200여 명이 노조 활동을 이유로 재취업과 고용승계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다며 최근 3개월간 수집한 녹취록 등의 증거를 공개하기도 했다. 녹취록에는 하청업체A의 대표 ㄱ씨가 “(하청노조 조합원을)우리가 떠안아뿌면 우리 쪽에 또 압박 들어온다니까”라고 발언하는 등 하청업체가 사내하청지회 조합원을 고용하면 원청인 현대중공업에서 폐업 압박이 들어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사내하청지회 지회장은 “노조 할 권리가 있음에도 현대중공업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노동자들이 현장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며 블랙리스트 철폐를 주장하고 있다.

▲ ⓒ 금속노조 울산지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하청노동자 44%, “블랙리스트 존재해”

지회의 블랙리스트 철폐 주장과 맞물려 실태조사연구팀은 사내하청지회의 투쟁 등 향후 조직 확대 사업의 본격화와 대량해고 저지 투쟁을 위해 블랙리스트 문제를 집중 쟁점화하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실태조사를 위한 설문조사와 심층면접조사에 들어갔다. 조선업종노동조합연대의 협조를 받아 총 5개 지역에서 조사가 진행됐고 수거된 설문지는 총 926부였다.

설문조사 결과, 블랙리스트 존재 유무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는 44.41%(405명), ‘모른다’고 응답한 노동자는 45.18%(412명),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노동자는 10.42%(95명)로 나타났다.

이어서 블랙리스트가 있다고 답한 응답자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질문했더니 블랙리스트가 사회적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가 46.12%(238명), 동료가 경험하였다고 응답한 경우가 28.29%(146명), 블랙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고 응답한 경우가 10.08%(52명), 본인이 경험한 적 있다고 응답한 경우가 9.30%(48명)으로 나타나 47.67%의 노동자가 직·간접적으로 블랙리스트를 경험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블랙리스트로 인한 불이익의 형태는 어떤 것이 있을까? 본인이 블랙리스트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노동자 중 42.2%(19명)이 취업에 대한 불이익을 받았다고 응답했으며 다음으로 임금, 징계 및 해고가 각각 15.6%(7명)을 자치했다. 작업시간(잔업 및 특근)에 대한 불이익이 13.3%(6명)이었고 다음으로 감시 및 현장통제라고 답한 이는 11.1%(5명)이었다.

설문조사 결과 블랙리스트가 치료 받을 권리를 제약한다는 내용도 드러났다. 지난 2년 동안 조선업종 비정규직 실태조사에서 노동자들은 일하다 다치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 산재로 처리하는 비율이 20%를 넘기지 못했는데 사고나 직업병 발생 시 산재신청을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고·폐업·블랙리스트에 대한 두려움(34.89%)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녹취록 발췌

2017년 3월 10일, 사내하청지회 지회장과 하청업체A 대표 ㄱ씨 간 전화통화

ㄱ씨 - “부서(원청)에서, 그래서 일단은 내 내 개인적인 마음은, 뭐 나는 뭐 큰 뭐 지회장님하고 큰 문제없고 뭐 신뢰가 있기 때문에 관계가 없는데, 이게 이래되면 인제 (원청)생산부서하고 협지부 입장에 여어서 인자 물론 조합원 특별히, 인가 그 저 저 금속(노조) 대의원 아입니까.”

지회장 - “네.”

ㄱ씨 - “그 저를 받았다카면 난리 안 나겠나. 우리 업 접으라카는 그카는 이 말이라. 지금 자꾸 노조원 숫자 많아져뿌면 그것도 불어나거든. 그래서 우리 업 접으라한다니까 그래되뿌면 또.”

지회장 - “에이 업 접으라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우리가.”

ㄱ씨 - “아이구 그래 어옛든간에 업 접, 저 말로야 접으란 소리 하겠는교 그래 안카지 그런 소린 안하지 안하는데, 자꾸 뭔가 압박이 들어오면은,”

지회장 – “저 대표님 아시다시피 우리가 그 ○○에 있는 그 뭐 □□□이나, △△△이나 안다아입니까.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이번에도 그 ○○ 살리려고 전부다 뭐 안전도 우리가 지키자 먼, 먼저 이래 이야기하든 사람들이에요. 아시다시피. 그런 사람들 그 뭐 조합원이란 이유로 그래 뭐 전부다 발 빼고 있어가는 안된다아입니까.”

ㄱ씨 – “지금 현재 어옛든 이 입장에 서둘러가지고 내가 어떻게 하겠다 그 소리를 지금 입장 못하고, 난 상황을 악화된 일로로 일단 가고, 악화일로로 가 가지고 그 상황에 함 봅시다, 일단은. 지금은 당장은 어떻게 지금. 우, 우리가 떠안아뿌면 우리 쪽에 또 압박 들어온다니까. 분명히 압박 들어옵니다. 그건 내가 알아. 회사(원청) 심리를 이게. 뭐 법적으로 어떻게 뭐 (원청)생산부서나 법적으로 이거 언제 그만두라 이 소리는, 이런 소리는 안한다니까. 뭔가 다른 쪽으로 압박이 들어온다니까. 그 그래가 내가 참지 못하는 상황이 돼뿌면은, 그래돼뿌면은 인제 기업(하청)경영이 악화돼뿌면은, 고마 그 핑계 저 핑계로 마 골치 아프니까 업을 접는 사례가 많다 말이지 보통.”

조선업계 빅3, “근거 없는 주장일 뿐”

노동계의 블랙리스트 주장에 빅3(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를 포함한 국내 조선업계는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전산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사람들은 하청업체 대표나 총무, 소장, 물량팀장으로부터 ‘출입증이 안 나온다’, ‘입력이 안 된다’, ‘건강 이상자로 뜬다’ 등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이라며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내하청지회의 주장에 현대중공업은 “사내하청지회에서 이야기하는 출입증 발급 문제는 블랙리스트 때문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청노동자들의 취업과 근로계약은 개별 하청업체들이 수행하지만 출입증의 경우 하청업체가 요청을 하면 원청에서 발급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근로자가 타 하청업체에서 발급받은 출입증을 반납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출입증 발급을 요청하게 되면 원청에서는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출입증을 발급하는 상황이 생긴다”며 “이외에 다른 이유로 출입증이 발급되지 않는 일은 없다”고 전했다. 또한 “원청에서 압력이 들어온다는 하청업체의 주장 역시 해당 근로자의 채용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 쪽으로 책임을 전가한 것일 뿐 블랙리스트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우조선해양 역시 “최근 조선해양산업 전반적으로 일감절벽에 시달리면서 하청업체 인원이 줄고 있는 상황이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다는 소소한 문제들이 제기되는 건 있을 수 있지만 블랙리스트는 제도적으로나 운영적인 측면으로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처럼 양쪽의 주장이 정반대로 엇갈리고 있지만 노동계 쪽에서는 블랙리스트 관련 실태조사 결과, 녹취록, 사례 및 증언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만큼 조선업계의 반박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원청의 즉각적인 대응 및 보다 구체적인 근거가 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 블랙리스트의 불법성

▲ ⓒ 금속노조 울산지부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블랙리스트를 사용하여 노동자의 취업을 방해하는 행위는 “누구든지 근로자의 취업을 방해할 목적으로 비밀 기호 또는 명부를 작성·사용하거나 통신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근로기준법 제40조(취업 방해의 금지) 위반에 해당된다. 정준영 금속노조법률원 변호사는 블랙리스트에 대해 “근로기준법 위반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한 범죄”라고 지적했다.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노동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의 개인정보를 노동자의 동의 없이, 법률상의 정당한 이유 없이 제3자인 원청업체나 다른 하청업체 등 유관업계에 제공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며 그것이 조합원에 대한 취업 방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면 부당노동행위에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태조사연구팀은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계 블랙리스트 폐지를 위해 ▲정부 관련기관 또는 국회차원의 철저한 진상조사 ▲블랙리스트를 운용하는 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벌 ▲근로기준법상 노동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감시 및 처벌규정 제정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참여할 수 있는 일상적 감시기구 마련 등을 해결방법으로 제시했다. 이들은 “블랙리스트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저항하지 못하고 일상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며 블랙리스트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