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존중사회, ‘떨리는 지남철’이 가리키는 곳은
노동존중사회, ‘떨리는 지남철’이 가리키는 곳은
  • 성상영 기자
  • 승인 2017.12.08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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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대화 비정규직 정규직화에서 ‘흔들’
[리포트]노동존중사회로 가는 가시밭길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이른바 ‘대기업·공공기관∩유노조∩정규직’, 즉 노동조합이 있는 대기업·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매섭게 몰아치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동자 파견이 가능한 범위를 확대한다거나 비정규직 사용을 완화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이번 정부 들어 ‘노동존중사회’는 습관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가 됐다. 하지만 어째 불안하다.

정부 노동정책, ‘이전과는 다르다’ 강조

문재인 대통령은 ‘일자리대통령’을 자임했다. 그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청와대 집무실에 일자리상황판을 설치한 것이다. 일자리상황판은 크게 ▲일자리 상황 ▲일자리 창출 ▲일자리 질 ▲경제지표 등 네 개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고용률과 실업률, 취업자 수와 청년실업률, 그리고 비정규직 비율과 연간 노동시간 등 주요 고용·노동지표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누구나 일자리상황판을 모니터링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쇼맨십이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일자리대통령이 되기 위한 노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의 양뿐만 아니라 질까지 중요 고려대상에 두면서 이전 정부와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를 상징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심각성을 인식은 엇비슷했다. 하지만 구호에만 그쳤던 노동시장 양극화 해소를 위한 방안들을 내놓았다. 우선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키로 했다. 정부는 산업통상자원부의 외청이던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격상해 중소기업 육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상시·지속적 업무에는 정규직을 고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무기계약직 노동자의 실질적 처우 개선에도 보다 관심을 기울였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민주화와 ‘노동존중사회 구현’이라는 기조를 분명히 했다.

인사에서도 과거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문재인 정부는 노동에 관한 요직에 노동계 출신이거나 친 노동 성향의 인사를 적극 발탁했다. 고용노동부 장관에 한국노총 금융노조 출신 김영주 의원을 기용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은 민주노총 옛 금속연맹(현 금속노조) 출신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맡았다. 정부 산하기관 곳곳에도 노동계 출신 인사들이 진출하는 분위기다. 이는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고용노동부나 일자리위원회를 통해 노동계와 직접 대화에 나선 점도 주목할 만하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과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의 만남이 정례화 됐다. 일자리위원회 참여 명단에는 한국노총과 더불어 정부 기구에 동참하기를 꺼려하던 민주노총이 이름을 올렸다. 당장 양대 노총의 목소리가 정부 정책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노·정 간 거리는 제법 좁혀졌다.

이와 같은 문재인 정부의 행보는 ‘노동존중사회’ 실현의 파트너로 노동계를 대우하려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노동존중사회’와 ‘적폐청산’은 노동계와 정부가 공히 사용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당장 고용노동부가 해고요건 완화와 취업규칙 변경 절차 등을 명시한 2대 지침 폐기를 선언하고, 노동계가 즉각 환영 입장을 나타낸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두 주체 사이에 밀월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동안의 대결국면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

‘신뢰 회복’ 이구동성-동상이몽

정부의 노력이 당장 큰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려웠는지 여전히 노·정 관계는 매끄럽지 못하다. 노동계와 정부 모두 ‘신뢰 회복’이 우선이라는 데 동감했지만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최근 노·정 관계 개선이 가시밭길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 한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10월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노동계의 간담회에 민주노총이 불참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민주노총은 당일 보도자료를 내고 “청와대와 정부는 지난 몇 달 간 민주노총의 대화 요구를 형식적인 이벤트로 만들며 파행을 불러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날 행사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과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이 배석했다.

민주노총은 1부 간담회와 2부 만찬으로 구성된 행사 중 간담회에만 참석하기로 한 상태였다. 민주노총은 “노·정 대화 자리에 청와대와 정부가 일방적으로 노사정위원장을 배석시키겠다고 정한 것은 조직 내부에서 큰 논란이 있을 사안”이라며, 1부 간담회 참석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민주노총 산하 조직과의 개별적 접촉을 통해 2부 만찬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주노총은 끝내 1부 간담회에도 불참했다. 민주노총은 “정부의 홍보사진에 언제나 동원되는 배경 소품이 아니며, 문재인 정부가 진정으로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존중하길 원한다”고 밝혔다.

간담회 불참 사건 이후 민주노총을 향해 언론과 여론의 비난이 쏟아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다 차려놓은 밥상을 걷어차느냐”, “대통령이 예우를 갖췄는데 왜 어깃장을 놓느냐”, “강성귀족노조임을 자인하느냐”는 식의 댓글이 달렸다. 언론은 보다 완곡하게 “국민정서와의 괴리”나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사용해 민주노총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민주노총 산하 공공운수노조는 정부의 책임을 언급하면서도 “민주노총이 간담회에 참여하여 정부와 대화를 시작하고 노동자의 요구를 당당히 제시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청와대 간담회에 민주노총이 불참한 배경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당일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사회적 대화에 동참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이 배석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국노총의 경우 여러 차례 새로운 사회적 대화의 틀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해 왔지만, 민주노총은 사정이 달랐다. 민주노총 내부에서 사회적 대화는 그 자체로 매우 민감한 주제다. 특히 노사정위원회는 사실상의 금기어다. 노사정위원회 출범 이후 노동계는 들러리만 서줬다는 강경론이 건재한 탓이다. 민주노총이 청와대의 홍보용 만찬장 뒤에 세워진 병풍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노동계와 정부 모두 ‘신뢰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각자의 생각하는 바는 서로 다른 느낌이다.

▲ 문성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위원장.

정부 주도와 노사 자율, 입맛에 따라 취사선택?

갈등은 보다 현실에 가까운 곳에서 표출된다.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올 하반기 노동이슈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와 인천국제공항공사 등 규모가 큰 공공부문 사업장은 이 문제로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서울시 산하 기관인 서울교통공사의 경우 시의 ‘노동존중특별시 2단계 계획’에 따라 정규직화 논의가 진행됐지만 맥락은 중앙정부의 것과 거의 같다. 내부 갈등의 주체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이다.

정부는 한편으로 정책을 강하게 주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사 자율에 맡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지난 7월 20일 정부가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가이드라인은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상시·지속적 업무는 정규직 고용을 원칙으로 하고, 특히 국민의 생명·안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업무는 비정규직 사용을 금지한다. 또 ‘중규직’으로 불리던 무기계약직의 처우를 정규직 수준으로 개선한다. 핵심 내용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원칙을 제시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방안을 내놓는 일은 매우 어렵다. 정부 가이드라인은 ▲충분한 노사협의를 통한 자율적 추진 ▲고용안정, 차별 개선, 일자리 질 개선의 단계적 추진 ▲국민 부담의 최소화와 정규직의 연대 ▲국민의 공감대 형성으로 지속 가능한 방향 추구 등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노사협의를 통한 자율적 추진을 돕기 위해 전국에 컨설팅팀이 꾸려졌지만 알맹이는 보이지 않는다.

사업장의 특성을 고려해 노사 자율에 따른다는 방침이 언뜻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더 큰 고충거리가 되고 말았다. 서울교통공사 업무직(무기계약직)의 일반직(정규직) 전환은 노-사 간 문제라기보다 노-노 간 문제로 귀결됐다. 오히려 난처해진 곳은 서울교통공사 내 세 곳의 노동조합이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도 사정이 비슷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깜짝 방문 이후 정규직화TF가 만들어졌지만,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의견을 달리 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정책이 노사 자율의 함정에 빠지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노동존중사회의 그림은 노동계와 정부가 다르고, 노동계 내에서도 같지 않다. 떨리는 지남철이 가리키는 곳이 불분명한 가운데 배는 표류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나겠으나 노동계와 정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치러야 할 대가는 분명 클 것이다. 이왕 정부가 노동존중사회의 조타수를 자임하고 나섰다면, 오랜 시간 쌓인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보다 세밀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