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가인 양희은
우리 시대의 가인 양희은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7.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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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두기 위해 열심히 해요 뭔가 이뤄야 그만둘 수 있으니까”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 흔들리지 않기에

ⓒ 김창기 기자 ckkim@laborplus.co.kr

양희은. 그 어떤 악기나 인공적인 배경음 없이도 오직 목소리만으로 사람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사람. 데뷔 36년째가 된 지금도 가수로, 라디오 진행자로 누구보다 우리 삶 가까이에서 함께 호흡하는 사람.71년, 청바지와 통기타로 청년 문화 아이콘으로 등장했고, 그 이후로도 수많은 노래로 우리의 영혼을 흔들었지만 그의 개인사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오직 ‘돈을 벌어야 했기에’ 그런데 ‘노래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열아홉 나이에 무대에 섰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집안 형편 때문에, 맏이의 의무감으로 그렇게 빚을 갚고 동생들을 결혼시킨 그였지만 군사 정권 시대의 그 숱한 금지곡, 어느날 소리 없이 찾아온 암과 시한부 선고는 때로 절망에 주저앉게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대에 서고 마이크 앞에 앉는다. 아직도 노래를 할 때면 떨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만 그는 삶을 노래한다. 아직 제대로 이룬 것이 없어서, 뭔가를 이루고 그만 두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만 두기 위해 노래한다는 양희은.

봄비가 지나간 자리에 꽃비까지 내린 4월 어느날, 여의도 MBC에서 양희은 씨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여지껏 불러왔던 수많은 노래 속 구절들을 뽑아 물었다. 왜 사냐고, 왜 노래하냐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봄비내린 거리마다 슬픈 그대 뒷모습

- 하얀 목련 中 - 

오는 길에 보니 목련에 벚꽃까지 온통 꽃천지더군요. 더군다나 어제 비가 내리고 오늘은 이렇게 흐려 있으니 계절과 날씨에 딱 어울리는 소절입니다.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분을 한 분만 꼽으신다면?

시어머님이 올해 아흔 하나세요. 위 수술을 해서 물도 제대로 못 드시는데 입원한지 여러 날 됐어요. 지금 힘겹게 견디고 계신데, 어머님이 지금 제일 마음에 얹혀 계시는 분이시죠, 그래요, 봄날에. 더군다나 모든 건 다 피어나는데, 한쪽에선 또 이렇게 사투를 하고 계시니까.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中 -

살아오면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 ‘잊지 못할 사람’도 있었을 텐데요. 또 ‘잊지 못할 이별’도요.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딱 꼬집어서 말하라면 전 못하겠더라구요. 어떤 순간 정말 그 사람하고의 만남이 각별했다 하고 떠올라도, 이렇게 질문을 딱 던지면 아무 대답도 안 나오는 것 같아. 정말 잊을 수 없는 사람 그러면 몇 사람이 있죠. 

내가 죽네 사네 했을 때 수술을 집도해주신 선생님이 그렇죠. 그 당시에는 석 달밖에 살 수 없다고 그랬는데 26년째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내 인생의 내리막길, 이건 도대체 내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닐 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 만난 분이어서 진하게 남아요. 두 번의 수술을 똑같은 선생님한테 했는데, 목정은 선생님이세요. (양희은 씨는 82년 난소암 진단을 받고 석 달 밖에 살 수 없다는 얘길 듣는다. 극적으로 암을 이겨냈지만 89년 다시 재발했고 두 번째 고통까지도 떨쳐냈다)

그에 버금가게 또 인상 깊은 분도 역시 (의사)선생님이세요. 남편이 (97년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아 일상생활을 하나도 못했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때 김문호 박사님 도움을 받았어요. 내가 아픈 건 내가 견디면 그만인데, (남편 아픈 건)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잖아요. 남편이 운신을 하나도 못할 때, 그 모든 힘들었던 과정이 만약 지금까지 계속됐다면 그후의 모든 노래들은 이 세상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내가 했던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죠.  

남편이 그 때 치약도 못 짰거든요. 그리고 티스푼도 하나 못 쥐어서 밥도 못 먹었는데 그 때는 벗어날 길이 없고, 매일 울고 다녔어요. 모든 일을 때려치우고 옆에서 간호를 해야 되는데, 근데 아니야, 일을 해야 될 것 같아. 결국 박사님이 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신 거죠.

잊지 못할 이별? 역시 내 강아지하고의 이별이죠. 보보 하고 미미인데 열여섯, 열일곱 살로 2005년, 2004년에 둘이 갔거든요. 그 두 마리는 지금도 가슴에 너무, 이렇게 울컥울컥 해요. 미국서 살 때는 주위에 아는 사람도 없고 내가 집에서 살림만 했으니까, 그저 개들하고 하루 종일 있잖아요. 걔네들 없었으면 입에서 군내 나, 입에서 썩은 내 난다고. 하루 종일 가도 말할 사람이 없었어요. 이것들이라도 있으니까 하루에 네 번 다섯 번 산책 나가고, 바깥에 나와서 공기라도 쐬고 그랬어요. (87년 결혼한 양희은 씨는 결혼 직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가 93년 귀국했다) 

기쁜 일이면 바다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 세노야 中 -

‘세노야’는 멸치잡이를 할 때 부르던 노동요의 앞소리였습니다. ‘일’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가장 슬펐던 순간을 꼽아보자면 어떤 기억이 있으신지?

난 일을 되게 좋아하고 일이 없이는 안 되는, 자칫하면 일중독도 되기 쉬운 스타일이에요. 작년에 데뷔 35주년 공연 끝나고 너무 무리해서 목에 혹이 생겨서 올 1월부터 라디오까지 모든 일을 다 놓았어요. 그런데 너무 적적하더라고. 사지육신은 멀쩡한데, 목을 쓰지 말라니까. 그 때 내가 만약에 일을 놓으면 정말 곤란하겠다 생각이 들더라구요. 반드시 방송이나 연예인으로서가 아니더라도 노년에 뭔가 열심히, 재미있게 할 만한 것이 꼭 있어야 하겠구나, 그걸 알게 됐어요, 내 자신에 대해서.

나는 열아홉 살 때, 그때 일이 하고 싶어서 한 것보다도, 진짜 몰락한 집안에 일하는 어머니 밑에 딸 셋 중에 맏딸이거든요. 그때부터 시작한 아르바이트였으니 이렇게 줄다리기 하듯이 하면서 일하는 게 일상화 됐어요. 그러니까 일을 쉬라고 했을 때 굉장히 울적했어요.

일이 주는 기쁨이라는 건 어떤 노래가 어떤 이들한테 힘을 줬다라는 걸 전해들을 때죠. 노래란 이런 거구나, 보람이 있어. 이 일이 이런 일이구나, 쉽게 하면 안 되겠다, 정말 중요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죠. 뼈에 저리게. (이 얘길 하던 양희은 씨가 가방에서 이메일 사연 하나를 꺼냈다. 한 중학교 교사가 부모님 칠순잔치에서 양희은 씨의 노래로 감동을 나눴다는 감사 편지를 보내온 거였다) 

나이 열아홉 그 봄에 세상은 내게 두려움
흔들릴 때면 손잡아줄 그 누군가 있었으면
- 내 나이 마흔 살에는 中 -

무서워하는 게 있으신가요? 그 두려움은 어떻게 떨치시나요?

다른 건 무서운 게 없어요. 근데 무대 공포는 있어요. 결혼해서 떠나 살다가 돌아와서 다시 무대에 서면서, 40대부터 굉장히 무서워요. 그게 너무 심해서 진짜, 왜 나는 무대에서 기절을 안 하나 하는 생각도 했어요. (웃음) 쓰러져버리면 도망갈 수 있잖아. 20~30대 때는 안 무서웠거든요. 심장이 그냥 밖으로 나와서 심장 뛰는 소리가 마이크 밖으로 나갈 것 같아. 공연 시작해서 한 15분에서 20분이 제일 극심해요. 끔찍해요. 노래하는 게 아니라 공포하고 맞서고 있는 거라고. 일대 삼사천이잖아요. 나 혼자, 누구도 내 옆에 있질 않잖아. 내가 실수한다고 해서 누가 옆에서 그걸 커버해줄 사람도 없고, 진짜 일대 삼사천 고스란히 맞짱을 뜨는 거예요. 

(그게 왜 두려워진 걸까요?)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난 모르겠어요. 근데 어느 미국 방송에서 예술인들 인터뷰하는 걸 보니까 ‘두려움이 없으면 프로가 아니다’ 이런 얘길 듣고 굉장히 위로를 삼았어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극복 못하죠. 두려움을 그대로 안고 가는 거예요. 극복은 무슨 극복? 없어요, 극복. 그냥 (심장이) 벙벙벙벙 뛰는 거 들으면서 시간이 가면 조금 나아지니까. 모르겠어요, 운명 같은 건지. 도망가고 싶지만 또 도망갈 수도 없고. 그냥 해요.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 한계령(寒溪嶺) 中 -

살아오면서 내 삶의 한계령(限界嶺)이었다고 느낀 순간은 어떤 때였나요? 그리고 그 ‘고개’는 어떻게 넘으셨는지?

모든 일을 놓아야겠다고 느낀 게 아까 말한 내 남편이 아팠던 97년. 이것은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역량 바깥에 있는 ‘한계령’이었죠. 아무데서도 울 수도 없어. 남편 앞에서도 못 울잖아. 운전하면서 그렇게 울고 다녔어요. 그 때 박사님을 만나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숲에서 나오니 숲이 보이네
푸르고 푸르던 숲
- 숲 中 -

20대의 숲과 30대, 그리고 40대의 숲까지를 지나왔습니다. 지금 숲에서 나와 바라보는 그 시절 숲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20대는 우리 집도 아주 흔한 스토리로 어머니의 빚보증 때문에 갑자기 몰락을 해버리니까, 거리로 나앉고 당장 내일 차비가 없어서 학교 못갈 정도였거든요. 근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재수할 때 조금 배운 기타, 그걸 가지고 오디션을 받으러 갔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시대 최고의 우상인 트윈폴리오(송창식, 임형주)가 학교에 왔을 때 그 분들 반주로 내가 노래를 했었어요. 그 때 인연으로 송창식 선배를 찾아가서 일 좀 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쳐다보더니 왜 노래를 하려고 그러느냐는 거야. 그래서 난 돈이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보더니 ‘잠깐 기다려’ 그러더니, 자기 공연 시간 10분을 잘라 주더군요. 그러면서 나더러 노래를 해보라는 게 그게 오디션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알바가 학교 졸업할 때까지 8년이나 계속 됐어요. 내가 8년 다녔거든요, 내 동생 대학까지 다 책임져야 했으니까 휴학했다 다녔다 그러면서. 그러니까 20대는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그 빚을 갚는다는 게. 월급이나 이런 걸 내 손으로 만져본 적이 없어요. 나는 내 노래가 돈으로 호환된다는 걸 확인을 해본 적이 없어요. 맨날 배고프고 가난했어요. 그게 내 20대였어요. 20대는 너무 힘겨웠어, 그 언덕을 넘는 게.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어요.

30대가 되면서는 20대 후반(78년)에 ‘늙은 군인의 노래’와 ‘상록수’가 국방부장관 명령에 의해서 금지가 되면서,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러서 먹고 살아야 될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30대에 무작정 배낭을 메고 한 14개월을 외국을 떠돌아 다녔어요. 그러고는 또 오니깐 암까지 걸렸다네. 석 달 시한부라 그랬는데 석 달을 넘기고 나서, 다시 디제이로 일을 시작했죠. 그리고 서른여섯에 결혼했어요. 그래서 떠났죠. 떠나서 40대에, 마흔세 살에 돌아왔죠. 돌아와선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음반을 내고 콘서트를 하고, 디제이도 다시 시작했어요.  

난 언제나, 19살 때부터 서른이 되고 싶어 했는데 서른 되니까 참 괜찮았고, 마흔 되니까 또 좋고, 50 되니까 더 좋은 것 같아요. 나이 들어가는 게 좋아요. 어린 날보다 훨씬 좋아. 별로 흔들리지 않는 면에서, 뚝심 있게 버틸 수 있음에, 세상에서 막 잡아 흔든다고 해서 막 덩달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은 데서. 

부르지 못한 노래가 남아있네
못다한 노래가 남아있네
- 못다한 노래 中 -

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혹시 아직도 ‘못다한 노래’가 있나요? 

앞으로 할 건 50~60대한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노래, 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가 반드시 있어야겠다 생각해요. 우리 사회가 50~60대 매뉴얼이 없는 사회잖아요. 나는 노래를 통해서라도 그런 거를 해드리고 싶어요. 같이 젊었다가 같이 나이 들어가는 내 또래집단들을 위해서. 그 시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방식들, 뭐 요런 것들 보태서 노래 만들고 발표하고 싶어요.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아침이슬 中 -

‘아침이슬’은 마지막 이 부분을 위해 처음부터 부르는 거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노래와 방송에서의 ‘클라이맥스’로 이루고 싶은 부분은 무엇입니까?

어떤 노래를 좋아할 때 우리가 노래 전체가 좋은 건 아니잖아요. 자기 귀에 딱 들어오는 게 있다고요, 몇 소절이 됐든 간에. 나는 그 부분이 좋았어요,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거 하려고 처음부터 하는 거죠.

나는 노래와 방송이 동시에 시작됐거든요, 71년도에. 그래서 역시 동시에 마치고 싶어요. 그런데 정말 열심히 안 했어요, 노래를. 열심히 뭔가 해야 보람 있게 딱 땀을 훔치면서, 아, 이젠 그만둬도 되겠어, 그래야 되는데 그게 없어요. 그런 계기가 되는 게 없어. 뭘 뼈 빠지게라도 열심히 했어야 뭐 그만두기라도 할 거 아니에요. 난, 그만두려고 열심히 해요. 더 이상 됐다, 이제 더 이상 없다, 그러려고 하죠.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이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 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 봉우리 中 -
 

지금 현재 어떤 ‘봉우리’를 오르고 계십니까? 그 봉우리가 산에 오르기 전에 생각했던 바로 그 봉우리인가요? 

난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를 진짜 좋아했어요. 40대 되면서는 노래도 숙명 같고, 라디오도 그렇고. 내가 라디오를 훨씬 더 좋아했어요, 노래보다. 왜냐 하면 노래는 너무 금지가 많고, 막 옥죄어 오는 것 같으니까 너무나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근데 라디오는 어린 날의 그 좋은 추억, 따뜻하고 이웃들이 모여 앉아서 함께 있고 그런 추억이 함께 있어요. 큰 라디오 앞에 앉아서 양말 깁고, 동네 아줌마들 마실 와서 얘기하고, 중고교 시절 음악에 대한 모든 것도 라디오를 통해서 배웠고, 라디오란 매체를 워낙 좋아해요. 내가 나답고, 훨씬 더 솔직하게 그 사람다움을 키워 내주고, 그러기 때문에 훨씬 더 솔직한 매체에요. 그러니까 TV보다 라디오가 내 성향하고도 맞는 것 같아요. 라디오는 마음이 읽히는 매체거든요. 

그래서 이 봉우리가 옳은 것일까? 이게 끝일까? 이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그게 나이 먹어서 좋은 것 같기도 해요. 별로 흔들리거나 또 두드려보고 이런 게 필요 없잖아요. 그냥 가는 거지, 열심히.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아주 최선을 다하면서, 거기서 나도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힘이 돼서 노랫말 속에도 또 살아나고, 이게 순환이 되는 거죠. 괜찮은 것 같아요. 봉우리가 아니면 어때, 또? 내가 평지만 걷고 있으면 어때? 상관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