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퇴직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퇴직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승인 2005.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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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 화섬 업계·서울 을지로 금융 업계

구조조정 한파가 할퀴고 간 언저리의 시린 삶들

잘 해야 구멍가게 사장님…삐끗하면 아예 노동시장 밖으로

 

경제위기 이후 우리사회에서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점 사라지고 ‘상시 구조조정 체제’라는 낯선 말이 더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매년 정리해고, 희망퇴직, 명예퇴직 등의 이름으로 일터를 떠나는 사람들은 수도 없지만 이들이 어떤 일자리로 흘러 들어가는지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사회안전망과 재취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정글 같은 노동시장, 그 많던 우리사회의 ‘명퇴’, ‘조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오십줄 되어 돌아보니 끈 떨어진 연”
한파가 매섭게 몰아친 2월 초 코오롱 구미공장 앞.
구조조정 반대 농성장으로 공장 정문에 세워진 천막 입구는 굳게 여며진 채 침묵하고 있었다. 지난해 64일간의 장기 파업을 불러왔던 구조조정 방침이 노사의 합의로 1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코오롱은 수익성이 악화된 화섬사업 점진적 정리와 IT필름과 같은 정보통신 소재 부문 확대를 계획하면서 전체 생산직 직원의 35%(690명)를 감원할 방침이었다. 해를 넘긴 노사의 갈등은 설 연휴 직전 노동조합이 14.8%의 임금삭감을 받아들이는 대신 명예퇴직 규모를 25%(509명)로 줄이는 것으로 일단 봉합됐다.


이미 418명의 노동자가 명예퇴직을 신청한 뒤였다. 이들 중 350명은 하청노동자로 구미 공장에서 다시 일을 하게 됐고 나머지 70여명은 완전히 회사를 떠났다.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렵사리 연락이 된 김영래(38)씨는 취재팀이 구미로 떠나기 전날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전화를 걸어왔다. “저…,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10년 넘게 함께 일한 동료가 나가야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 말씀도 드릴 수가 없습니다…이해해 주십시오.” 얼마나 망설이다가 밤 11시가 되어서야 전화를 했을까. 취재팀도 더 이상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명예퇴직 후 하청노동자로 재입사를 기다리고 있는 이정애(45·가명)씨는 정규직으로 일할 때보다 훨씬 대우가 못하겠지만 그나마 ‘감지덕지’라고 말했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일자리를 다시 구하겠어요. 기술도 없고, 장사 수완도 없고, 그래도 10년 넘게 일하던 데서 있는 게 낫지….”
하청 노동자로 구미 공장에 남기로 한 350명은 대부분 이씨와 같은 생각이었다.

 

지역 화섬업계가 모두 불황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일자리를 구해봤자 다른 공장의 비정규직이나 일용직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에서 하청노동자로 ‘떨어지게’ 된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번 일로 완전히 퇴사한 김정식(49)씨는 이렇다할 계획이 없이 집에서 쉬고 있다. 그는 “분사된 라인에 들어가면 최소 몇 년은 버티겠지만 어차피 경쟁력 없는 부문을 차차 정리하기 시작한 이상 그마저도 5년 이상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예 퇴직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생각은 많죠. 장사를 해볼까, 그냥 작은 집이라도 사서 월세를 받아먹고 살까. 내년이면 아들놈이 대학에 가는데 걱정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술이라도 배워놓을 걸. 실 뽑는 거 말고 통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

김씨는 13년 넘게 같은 일을 했는데 오십줄이 되어 돌아보니 기술도 뭣도 없는 자신이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분사된 공장에 남은 사람과 퇴직한 사람들에게는 ‘침묵’ 말고도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이 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호소다.

 

말끝마다 한숨, 사연마다 눈물
코오롱 공장에서 이십 여분 거리에 위치한 금강화섬공장의 정문에는 “공장은 돌아가야만 합니다”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주인 없는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이 업체는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3월 문을 닫았다. 직원 350명 중 200여명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나머지 150여명은 인수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취재팀이 찾은 2월 4일은 이들이 지난 8개월간 받아오던 실업급여의 마지막 수급일이었다. 점심때가 넘자 오랜만에 동료들 얼굴도 볼 겸,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은 기념(?)으로 쓴 소주라도 한잔 할 요량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노동조합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그간 어떻게 생계를 꾸렸냐는 질문에 헛웃음만 돌아왔다. 노조 사무실에 모인 10여명 중에 집을 담보 잡혀 대출을 받은 사람만 절반이 넘었다. 직장이 없는 탓에 대출액이 적어 ‘새출발’의 밑천으로 삼기보다 하루하루 대출금을 ‘까먹고’ 사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인력시장에 나가서 하루 사오만원이라도 벌었죠. 지금은 겨울이라 그런지 일거리도 없어요. 장사밑천이 없으니까 장사래 봤자 붕어빵 장사고, 뭐 얘기하면 답답해지지.”

강정수(36·가명)씨는 지난 6개월간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봤지만 다섯 차례 넘게 실패한 후 아예 포기 지경에 이르렀다. 강씨는 파출부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를 볼 낯이 없어서 잠에서 깨도 아내가 출근할 때까지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동료가 말을 받는다.

“밑천만 있다고 장사가 되나? 어줍잖게 장사한다고 손댔던 치들 다 털어먹는 걸 보면서도 그래….”


괜히 동료를 타박한 게 민망했는지 이번에는 목소리를 높인다.

“정부 정책도 마찬가지에요. 실업급여 몇 개월 쥐어주면 그만입니까, 실업급여 타는 동안 뭐 다른 먹고 살길을 찾아주던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좀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정부에서 지원하는 실업자재취업훈련 프로그램을 알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8년까지 단순 제조업에 종사하던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일이었다.

“순 컴퓨터 프로그래머 어쩌구 하는 것만 있더라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그림의 떡이죠.”

무작정 공장이 재가동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과 이미 다른 살길을 찾은 이들 사이에도 별 차이는 없었다. 일찌감치 미련을 버리고 포장마차를 차린 이정호(45)씨는 빚을 내 인수한 포장마차가 하루 5만원 매상도 못 올리고 있다며 울상이다. 이씨는 다른 동료들도 대부분 기술이 없어 잘해야 택시운전을 하거나 매일 아침 인력시장을 기웃거리는 신세라고 전했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곧 의료 등의 복지 혜택에서도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직장의료보험이 수가가 비싼 지역의료보험으로 변경되면서 아이가 아파도 아내가 병원 가기를 망설이는 것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사람들.

금강화섬 노동조합 민병돈 쟁의부장도 그 중 한 명이다. 네 살배기 아이가 큰 병을 앓고 있어 치료비를 벌어야 하지만 그는 혹시라도 나타날 인수자가 공장을 가동하지 않고 부지 따로, 설비 따로 팔아 치울까봐 노동조합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민 부장은 “어려운 얘기, 눈물나는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마음만 약해져요. 저보다 어려운 사람도 훨씬 많은데요 뭐”라면서 굳이 아픈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잊어버릴까봐서요… 기술을 잊어버릴까봐…”
공장이 멈춰선 지 11개월, 수돗물과 전기마저 끊겨 썰렁한 노동조합 사무실에는 새하얀 폴리에스테르 원사가 놓여 있었다. “잊어버릴까봐서요…, 등에 땀이 작신하게 흐르도록 일하던 날들, 보잘 것 없지만 10년 가까이 익힌 기술 잊어버릴까봐, 그러면 안 되니까 저렇게 노동조합 사무실에 모셔다 놓은 겁니다.” 원사를 바라보던 박명복 수석부위원장의 목이 잠긴다.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에 따르면 1999년 10만4744명이던 지역 섬유업계 종사자는 3년 만에 1만5천명이 넘게 줄었다. 본부 관계자는 최근 빨라지고 있는 섬유업계 구조조정을 감안하면 올해까지 2만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멀쩡하던 공장이 하루아침에 멈춰서고, 명예퇴직 혹은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은 사람들은 금강화섬이나 코오롱의 노동자들처럼 일용직을 전전하거나 평생 해 본 적이 없는 장사를 시작했다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퇴직한 누군가가 자영업으로 성공했다는 소식이 가뭄에 콩나듯 들려오기는 하지만 대부분 퇴직 노동자들의 미래는 별반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설 연휴가 끝나고 드디어 금강화섬에 인수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지만 인수업체는 공장을 재가동하지 않고 부지와 설비를 따로 매각하겠다고 나섰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월 24일, 금강화섬 노동자들은 그렇게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원사를 국회 앞으로 가지고 올라와 석유를 붓고, 불을 붙였다. 마치 남았던 미련을 모두 불살라 버리려는 듯이.

불꽃 사이로 비치는 금강화섬 노동자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막막해 보였다.

오갈 데 없기는 금융권도 마찬가지
구미에서 감원 칼바람이 불고 있던 때 서울 을지로에도 삭풍이 불어 닥쳤다.
올 초 ‘제2의 빅뱅’, ‘은행 간의 전쟁’을 선포했던 시중은행들이 잇달아 은행의 내실화를 기한다는 취지로 구조조정 방침을 발표한 것. 


가장 먼저 국민은행이 1800명의 감원 계획을 밝히고 명예퇴직을 받기 시작했다. 국민은행의 명예퇴직이 마무리 될 즈음, 조흥은행과 우리은행이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다른 시중은행들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10월 약 500명을 명예퇴직 시킨 외환은행은 론스타가 매각작업을 추진하는 시점을 전후로 추가 구조조정을 추진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외에 한국씨티은행과 제일은행도 일정 규모의 인력조정을 계획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우리사회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직업 중 하나였던 은행원. 공무원과 비교될 만큼의 안정성과 경제·사회적 지위까지 노동시장 내에서 이들의 확고한 위치는 별로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10년도 채 안돼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IMF 이후 계속된 금융권 구조조정으로 지난해 말까지 해고됐거나 조기 퇴직한 노동자는 은행연합회 추산으로만 9만여명. 부양가족까지 계산하면 실로 엄청난 규모다.


금융권에 상시 구조조정 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은 외환위기 이후 7년, ‘왕년의 은행원’들은 소규모 창업자에서 신용불량자로, 비정규직으로, 심지어는 노숙자에 자살로 이어지는 끝없는 추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사회적 안전망이나 재취업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는 은행권도 화섬업계와 마찬가지. 이들 역시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금융권 퇴직자들의 퇴직 후 삶은 대체로 세 가지로 압축됐다. 퇴직금과 그간의 저축액을 모아 자영업을 시작한 이들, 신용정보회사나 카드사의 채권추심 업무 등 계약직으로 재취업한 이들, 첫째의 경우와 둘째의 경우 모두에서 실패를 거듭하다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퇴출된 이들이다.

 

“자영업은 퇴직자의 무덤”
2004년 외환은행에서 희망퇴직을 할 당시 차장이었던 김진혁(42)씨는 ‘제2의 인생’을 꿈꾸며 대전에 편의점을 냈다. 서너 달 가량은 실적이 괜찮은 편이었지만 주변에 대형 편의점이 4개나 들어서면서 매출이 뚝 떨어져 문을 닫았다. 편의점을 내기 위해 처가의 도움을 받았던 김씨는 이제 명절이나 기념일에 가족 모임에도 못 가는 신세가 됐다. 

J은행에서 지점장을 지낸 박모씨(58)는 퇴직 후 작은 술집을 차렸다가 3억의 빚만 떠안았다. 재직할 때 법인 영업을 담당하면서 고급술집을 많이 가 봤던 박씨는 “역시 먹고 마시는 장사가 최고”라는 생각으로 술집을 차렸지만 개업 2년이 지나도록 적자를 면치 못했다. 박씨는 “자존심 버리고 손님 비위만 맞추면 되는 줄 알았는데 종업원 관리나 외상값 받아내기 등 나름대로 노하우가 필요한 일이었다”며 자신의 무모함을 탓했다. 그는 퇴직 전 회사에서 실시한 창업교육까지 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고작 한 달밖에 안 되는 이론 교육과 실전은 너무나 달랐다”고 말한다.

더 운이 나쁜 경우도 있다. 요즘 웬만한 상가에 두 집 건너 하나라는 치킨집을 냈다가 조류독감 파동으로 문을 닫은 이들, 잘 되는 가게라는 말만 믿고 엄청난 권리금을 지불하고 인수했다가 쪽박만 찬 사람들의 사연은 구구절절 이어졌다.
퇴직금과 여윳돈을 끌어 모아 창업 전선에 나선 이들은 하나같이 “장사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 말했다.

 

체계적인 계획과 경영 전략을 익힐 기회가 없었던 순진한 은행원들이 내 가게 하나 내보겠다고 뛰어들었다가 내린 결론은 ‘자영업은 퇴직자의 무덤’이라는 것이었다.

 

비정규직에서 구직 포기자로
지난 98년 퇴출된 충청은행에서 과장으로 일했던 장준배(49)씨. 오후 4시가 채 안된 시간인데도 그는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장씨는 퇴출 이후 쌓인 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 상태다.


“오늘 법원에 가서 개인 파산 신청하고 왔습니다. 우습죠? 저도 우습네요. 은행 다닐 때는 신용불량자들 보면서 ‘얼마나 못났으면 신불자가 됐나’ 하고 혀를 찼단 말입니다.”


그는 당장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도 힘들지만 사지 멀쩡한 사람이 놀고 있다는 주변의 시선을 견디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놈의 은행에서 배운 일을 어디 가서 써먹을 수가 있어야죠. 기껏해야 채권 추심 일을 해야 하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별로 일자리가 없어요, 신용불량자가 됐으니 정규직 일자리는 꿈도 못 꾸죠.”


은행권의 퇴출자 중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이 유독 많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외환위기 이전 시중은행들은 직원들에게 주택구입 자금을 연 1~2%의 싼 이자로 빌려줬다. 또, 일부 은행에서는 우리사주 구입 자금으로 수천만원씩 대출해 주기도 했다. 여기에 은행원이라는 안정적 신분 때문에 친구나 가족의 보증을 서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대출금과 보증이 퇴직 후에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고 1~2년 내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정규직 일자리로의 취업기회가 막힌 신용불량자들은 잘 돼야 카드회사 계약직으로 들어가는 게 전부고 대부분은 전혀 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었다. 신용불량자나 자영업에 실패한 이들을 받아준 곳은 채권추심회사나 사채업자, 다단계 회사 등 비정규직뿐.

K은행 수도권 지점 차장이었던 정모씨(51)는 유명 다단계 회사 몇 군데를 전전했지만 영업능력이 없던 그에게는 처음부터 예정된 실패였다. 지금 정씨는 지금 대리운전업체 두 군데에 등록을 하고 밤이나 낮이나 ‘호출’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할 줄 아는 게 운전 밖에 없더라고요, 대리운전 좀 해보고 괜찮으면 택시 회사에 들어갈 생각입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리면서 공사판 막노동, 대리운전, 술집 웨이터, 대리운전사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서 단정했던 은행원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정 파탄과 자살까지
수차례의 실패 끝에 아예 구직의 의욕을 상실하는 경우도 있다. 지하철에서 폐지수거를 하고 있는 김순정(52·가명)씨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지점장 후보에 오르던 유능한 은행원의 아내였다. 은행을 나온 후 남편은 주식에 손을 댔다가 퇴직금의 절반을 날렸다. 이후에 확실한 노후보장 수단이라며 한 대형 빌딩의 분양에 남은 돈을 쏟아 부었지만 공사 시행사의 부도로 투자금액의 반도 못 챙겼다.

“그 후 몇 달간은 일자리를 찾아보기도 하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아예 포기하고 술만 마셨어요. 큰 놈은 대학 붙어놓고 군대 갔고, 제대할 때까지 등록금이라도 벌어 놔야죠” 김씨는 남편의 절망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술로 허송세월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구직 실패로 마음에 깊은 병이 든 이들도 있다. 명문대를 나와 은행에서 착실히 꿈을 쌓아가던 이모씨는 지금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씨는 “퇴출 은행 직원 중에 주식에 손댔다가 자살한 선배를 알고 있다”며 “요즘엔 자주 자살 충동을 느끼는 자신이 무섭게 느껴진다”고 털어 놨다.

끝없이 이어지는 절망적 상황은 결코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지난해 6월 5개은행연합회(경기, 대동, 동남, 동화, 충청 등 퇴출은행 직원모임)는 퇴출 이후 금융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문 결과를 발표했다.

총 조사 대상자 2263명 중 19.6%에 달하는 443명이 신용불량자, 배우자가 신용불량이 된 경우도 92명이나 됐다. 정규직으로 재취업한 사람은 20%에 못 미치는 484명,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사람과 자영업자는 각각 487명, 191명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금융권으로 재취업한 사람은 5%를 넘지 못했다.

전체 응답자중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712명에 달했고, 특히 가장 활발히 일할 나이인 30대(1100명)과 40대(839명)의 실업자 비중도 30%나 됐다.

 

반복되는 실업대책의 ‘배신’
한계산업의 퇴출과 상시 구조조정의 필요성 증가로 일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재취업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그럴 틈도 없이 사회의 가장 낮은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온전히 노동시장으로 흡수할만한 대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매년 반복되는 실업대책과 막대한 예산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도 정리해고 통보서나 희망퇴직 권고서를 받아든 ‘명퇴’, ‘조퇴’들은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