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잔소리가 그리워집니다
언제부턴가 잔소리가 그리워집니다
  • 안상헌_카피라이터
  • 승인 2008.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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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헌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너무 가까이 보지 마라. 군것질 하지 마라. 나쁜 친구 사귀지마라. 끼니 거르지 마라. 울지 마라.”

 

TV를 코앞에서 보고 있는 아이, 정돈된 CD장을 어지럽히는 아이, 사탕을 맛있게 먹는 아이, 골목길 구석에서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불량해 보이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학생, 늦은 시간 버스에 앉아 졸며 귀가하는 여자, 사무실 책상에서 라면을 먹는 남자의 모습 위로 자막이 흐른다. 광고카피라기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잔소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걱정은 마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당신의 잔소리가 올해도 저희를 키웁니다’라는 카피가 매력적인 SK텔레콤의 이 광고는 최근 많은 사람들을 뭉클하게 만드는 광고 중의 하나다.

 

 

지긋지긋한 잔소리, 그러나 …

 

따지고 보면 ‘잔소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그다지 좋지 않다. ①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 또는 그 말. ②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 또는 그런 말.

말 그대로 잔소리란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말, 듣기 싫은 자잘한 말의 토막들이다. 그러나 이 광고를 보고 나서 난 그 지긋지긋한 말의 토막들이 그리워졌다.

내가 어린이라는 이름으로 살았을 때는 어머니의 ‘TV 꺼라’라는 말 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었다. 성적으로 친구의 모든 것을 판단하던 어머니가 늘 달고 사시는 ‘그런 애하고 어울리지 마라’는 말도 단골 레퍼토리였다. 고3시절, 학력고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행복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더 이상 ‘공부해라’라는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결혼하고 나서 아내의 잔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선생님의 공부에 대한 끈질긴 잔소리는 직장상사의 위협적인(?) 잔소리로 바뀌었다(말이 되든 안 되든 따라야 하는 게 직장인의 숙명인지라 위협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 SKT

 

 

 

 

 

 

 

 

 

어머니 잔소리는 변함없건만


하지만 어머니의 잔소리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감기 조심해라’, ‘차조심해라’, ‘밥 챙겨 먹어라’, ‘그런 거 먹지 마라’. 아무래도 삶이 고단하다보면 어머니의 이런 잔소리가 듣기 싫을 때가 많지만 돌아보면 자식을 향한 일편단심 잔소리 덕분에 그래도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밥벌이를 하고 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억하며 당신의 생전에 이런 잔소리를 녹음해두지 못한 걸 후회한다는 어느 노인의 이야기처럼 어머니의 잔소리는 애정의 산물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잔소리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사회를 보면 섭섭한 면이 많다. 개인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시대의 미덕이 되어서인지 가족 사이에서도 잔소리가 옛날 같지 않다. 더군다나 직장을 들여다보면 상사의 잔소리는 많아졌지만 선후배사이의 애정 어린 충고가 담긴 잔소리는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이쯤 되면 관심이 있어야 잔소리도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애정 없는 디지털 잔소리


최근 트렌드를 분석한 어느 연구서를 보면 첨단 잔소리가 등장한다. 바로 ‘디지털 잔소리’라는 녀석이다. 예를 들어 ‘말하는 접시’는 개인의 상태와 외부 환경에 따라 권장 수분 섭취량을 알려 주는 기능을 한다. 첨단 디지털 기기가 나를 위해 잔소리를 해주는 것으로 다이어트, 금연 등 일상의 작은 변화를 위해 적절히 참견해 주는 디지털 제품들에 관한 트렌드라고 한다.

내 경우에는 굳이 미래의 트렌드를 꼽지 않더라도 이미 주위에 이런 잔소리꾼은 넘친다. 정수기에 온수를 받을라치면 “물이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는 기계음이 내 행동에 제지를 가한다. 이 잔소리꾼은 다른 정수기보다 몇 십만 원 더 비싼 값을 하기 위해 애쓰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기밥솥은 무슨 무슨 버튼을 누르라고 손길을 유도하고 네비게이터는 이동 내내 운전자의 가는 길에 ‘좌회전, 우회전’을 외치며 잔소리를 해댄다. 백화점에 들렀더니 엘리베이터가 탑승인원이 초과되었으니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고 또박또박 잔소리를 한다. 이전에 ‘삐~’ 하는 외마디 잔소리에 비하면 많이 발전한 셈이라고나 할까? 나를 둘러싼 잔소리는 많아졌지만 애정 어린 잔소리는 줄어드는 요즈음, 난 가끔 그 잔소리가 그립다.

 

광고에서 언제나 당신이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는 보기 힘들다. 소비자에게 조금이라도 네거티브한 감정을 주는 소리는 금기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더 빨라질수록 첨단으로 무장할수록 나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리워진다. 이제 TV를 그만 보라는 사람은 없지만 내게 애정 어린 잔소리를 해주는 광고를 보고 싶다.

 

돈 적게 벌어도 좋으니 착하게 살라고, 혼자 난 척 하지 말고 남과 더불어 살라고, 게으름피우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