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도 양극화?
산업재해도 양극화?
  • 승인 2005.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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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사업장 노동자·비정규직 사각지대 놓여

한쪽에선 ‘산재 은폐’ 다른쪽선 ‘엉터리 환자’

 

산업재해 마저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산업재해는 비정규직과 중소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이와 함께 재활이 어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사건이 늘어나는 한편으로, 다른쪽에서는 ‘엉터리 환자’도 상당수에 달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산업재해를 근본적으로 예방하는 노력 뿐만 아니라 산업안전 취약 노동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더불어 산업재해 판정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도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산업재해는 재해를 당한 개인뿐 아니라 가족의 불행이며 기업,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중대한 손실을 가져오고 있다.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산업재해로 인한 근로손실일수는 노사분규와 비교해 평균 40배가 높고 경제적 손실 또한 약 5배 정도 많다. <표 참조>
그런데도 그간 노사관계 안정에 대한 관심도에 비해 산업재해에 대한 투자나 시스템 구축을 위한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현실이다.


다행히 지난해 우리나라 산업재해율이 1000인 이상 사업장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재해자수가 4년 만에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1000인 이상 사업장의 산업재해 증가도 우리나라 주력 산업인 자동차, 조선 등이 지난해 가동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게 노동부의 분석이다.


하지만 산업재해율·재해자수의 하락에도 대기업-중소기업간 산업재해 양극화는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50인 미만 사업장 재해자가 68% 차지
지난해 산업재해 통계에 따르면 30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자수가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재해 통계에 활용되는 전체 노동자수(1047만3090명) 대비 인원수(75%)와 비교할 때도  높은 편.


특히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전체 산업재해자의 68.0%, 사망자의 55.1%를 차지하는 등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지난해 말 노동부와 검찰이 산재취약사업장 1492곳을 대상으로 사업장 안전보건 점검을 벌인 결과에서도 94.3%가 법을 위반해 ‘안전 불감증’이 심각한 것으로 지적됐는데 그중 중소규모 사업장의 안전보건 규정위반이 대기업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업종의 경우 공사규모 120억원 미만 사업장의 과태료 부과율과 벌금형 비율은 각각 43.6%와 41.2%로 120억~799억원 사업장(31.0%, 24.0%)이나 800억원 이상 사업장(21.2%, 18.1%)에 비해 훨씬 높았다.


제조·기타업종 50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도 58.8%와 24.6%로 50∼299인 사업장(57.8%, 22.3%)과 300인 이상 사업장(46.1%, 19.7%)보다 높게 집계됐다.


또한 비정규 노동자들의 경우 산재 사고에 더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여수석유화학산업단지 내에서 2001년~2004년까지 발생한 중대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32명인데 이중 21명(65.6%)이 하청노동자로 나타났다.

 

이는 산업단지 내 모기업이 85개 업체 1만2400여명, 협력사 156개사 3800여명임을 감안할 때 그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소기업, 비정규 노동자들을 산업재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은폐된 산업 재해 더 많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산업재해가 곳곳에 숨어 있다는 점이다.
사내 안전사고에 사업주가 신고하지 않거나 미미한 사건은 공상 처리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산업재해 통계는 산재보험에 가입된 노동자를 기준으로 산재보험으로 처리된 재해가 대부분이고 산재 은폐 신고, 사업주 보고가 있으나 전체 규모에 비하면 무시할 만한 수준이다.


금속산업연맹이 300인 규모의 A사업장의 2000년 이후 재해 발생 기록을 검토, 현재의 산재인정 기준인 요양 4일 이상 산재를 분류한 결과 18~72%의 산재은폐율이 드러났다.


2003년의 경우에는 6월 집단적으로 근골격계 산재신청을 하여 총 22명이 산재 인정을 받아 산재은폐율이 31.7%로 떨어졌지만, 근골격계 직업병을 제외할 경우 은폐율은 73.7%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속산업연맹 박세민 산안국장은 “노동자들이 산재 치료 후 현업에 다시 되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묵묵히 공상처리를 하는 것”이라며 “고용의 불안정성이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마저 훼손하고 있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 조정식 의원도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2003년 산재노동자 가운데 장애등급을 받은 3만363명 중 직업복귀율은 40%로 이중 원래 직장으로 복귀한 노동자는 8663명에 불과하다며 개선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노동계에서는 이러한 공상처리와 산재 은폐가 일상적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작업자들이 스스로 공상처리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고, 다른 작업자들의 좋지 않은 시선 등으로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노동부도 이런 산재은폐의 실태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노동부 안전정책과 관계자는 “어느 기업이든 산재 은폐는 다 있고 외국 또한 산재 은폐는 있다”며 “중요한 것은 통계치가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인력과 재원의 문제로 모든 사업장에 대한 세밀한 점검은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사후 제재 중심의 정책이 통계 왜곡
이렇게 산재가 은폐되고 있는 현실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노사 관계자와 학계 모두 재해 다발 사업장에 대한 사후적 제재 중심의 정부 정책을 꼽고 있다.
산업안전 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통계가 아닌 산재 감소에만 주력하다 보니, 산재 발생 사업장에 대한 법적, 행정적 재제 중심의 운영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윤간우 연구원은 “사업주 처벌 중심의 분위기에서는 제대로 된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전체 직업성 사고 및 질병 중 10일 미만 휴업 일수의 분포가 2001년 기준으로 4% 수준이고 31일 이상 휴업일이 요구되는 사고나 질병이 76%에 달하고 있다.


대체로 선진국에서는 무상해 사고-경상-중상의 분포가 피라미드형에 가깝지만 우리나라는 역삼각형의 기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산업 안전 정책을 마련하는 기초 자료가 되는 통계가 왜곡되면서 올바른 정책 입안이 어렵다는 비판이다.


현재의 산재다발사업장은 재해가 많이 발생하는 사업장이라기 보다는 노동조합의 활동에 의해 재해가 드러난 사업장, 또는 사업주가 공상처리를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산재처리를 하는 사업장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윤간우 연구원은 “실제 재해율, 원인,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는 표본조사와 사업주의 보고 의무 강화를 위한 법 개정 등이 요구된다”며 “현재 정부·학계·노동단체 등이 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상태”라고 밝혔다.

 

대공장에서는 ‘엉터리 환자’도
이렇듯 작업현장의 산업재해 문제가 심각한 상태이지만 일부 대기업들의 일명 ‘나이롱 환자’ 문제 또한 산업안전 정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H사의 노동자 K(40)씨는 “우리 사이에서는 대공장에 다니면서 꼭 해 봐야 할 것이 ‘대의원’과 ‘산재 요양’이라는 농담이 있다”고 꼬집었다. 즉 이제는 권력의 상징처럼 이미지가 변질되어 버린 대의원 직책을 통해 ‘목에 힘주고’ 또 한 달 정도 산재요양 신청을 해서 ‘놀면서 돈 버는’ 것이 일상화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현재 산재 환자는 임금의 70%를 보전받도록 되어 있지만, 이 회사의 경우 노사협상을 통해 전체 임금을 보전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부 대기업에서는 실제로 산재 요건이 되지 않는데도 환자처럼 행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현장관리자 S씨는 “회사에서도 알고 있지만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근골격계 질환처럼 기준과 원인에 대해 이견이 많은 경우 노사간 힘의 우위에 따라 승인 결정이 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렇게 ‘엉터리 환자’가 늘어나면서 ▶산업재해 보험률 인상으로 기업의 과도한 부담 증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아갈 재원의 낭비 ▶산재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왜곡 등 다양한 문제점이 생기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245개 사업장 안전보건관리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업 안전보건관리자들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분야로 ‘근골격계질환’(60.4%)을 꼽았다.

경총은 이에 대한 원인으로 1999년 344명이던 근골격계질환자수가 2003년 4432명으로 급증하면서 산재보험료 인상, 근로손실 및 빈번한 노사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근골격계 질환 자체가 노동자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인인데 정작 악용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오히려 노사간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사정 모두가 산업재해 판정의 객관성을 높일 수 있는 구체적인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