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에프티? 그기 뭔교?”
“한일 에프티? 그기 뭔교?”
  • 승인 2005.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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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산업 절반 차지하는 부산·경남,

FTA 체결은 ‘강건너 불구경’

빈사상태 빠진 지역경제에 ‘불길한 먹구름’

 

한일 자유무역협정 체결이 1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피해가 예상되는 주력 산업계와 노동계를 중심으로 신중 추진 또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FTA의 폭풍을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지역경제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태다.


특히 자동차, 기계, 부품소재 등 특정 주력산업이 지역경제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주요 산업도시의 경우 ‘산업에 미칠 타격이 지역경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대책 마련은커녕 위기의식조차 미미한 상태다.

 

 “중앙정부야 협상만 하면 그만이겠죠. 정작 타격을 받는 건 지역경제인데 무대책도 이런 무대책이 있습니까?” (부산발전연구원 주수현 박사)


“이미 지역 경제가 빈사상태에 빠졌습니다. 한일 FTA 체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결국 하루살이에 급급하다가 그때 가서 낭패를 보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겁니다”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김기홍 교수)


“FTA의 여파가 지역적으로는 불균등하게 피해를 몰고 올 수 있는데도 시는 FTA의 개념조차 잡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국가간 협정도 중요하지만 국가 경제의 정맥인 지역 경제차원의 피해를 소홀히 다루면 결국 국가간 협정도 다 소용 없습니다” (동아대학교 경제학과 김창남 교수)


한일 FTA 체결에 대한 지역경제 차원의 대책을 묻자 지역 경제계·학계 인사들이 쏟아 놓은 말이다.
현재 한일 FTA 체결로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완성차·자동차부품과 일반기계산업의 경우 부산·울산·경남은 전국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완성차와 자동차부품은 각각 44%, 32%를, 금속·일반·전기·수송·정밀기계 등 기계 산업도 이 지역권의 전국 비중이 사업체 수로는 46.8%, 생산액은 44.2%에 달한다.


지난 연말 부산발전연구원(원장 김학로)은 한일 FTA가 부산지역경제에 미칠 영향에 관한 실태 조사를 위해 지역 업계에 1500부의 설문지를 배포했다. 하지만 수거된 설문지는 178부에 불과했다. 게다가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자동차부품, 기계, 조선기자재 업체 중 설문에 참여한 업체는 30곳에 지나지 않았다.


이 조사를 주관한 부산발전연구원 경제동향분석센터장 주수현 박사는 “부산 지역 부품, 기계업체는 규모가 워낙 영세해서 통상 및 무역환경의 변화에까지 민감하게 반응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주 박사는 “이런 이유 때문에 각 업종별 협회를 통해서 실태조사를 의뢰했지만 업종협회들도 별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산에 공장을 두고 있는 자동차부품, 기계업체들은 종업원 100인 이하 소규모 업체가 83%에 달할 뿐더러 대기업과의 연계를 가지지 못한 채 중소기업 위주로 지역경제가 구성되어 있다. 

 

부산·경남 피해치 상상도 못해
그렇다면 한일 FTA 체결이 부산·경남의 지역경제에 미칠 피해치는 얼마나 될까.
부산발전연구원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추정수치를 지역산업구조에 맞춰 재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일 FTA 체결 시 △기계장비 257억4900만원 △금속제품 140억200만원 △전기전자 14억7900만원 △기타제조업 59억200만원의 생산이 감소할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진단한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부산상의는 지난해 9월 한일 FTA가 지역업계에 미치는 영향을 ‘유리’, ‘보통’, ‘불리’, ‘매우 불리’의 순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이 분석에 따르면 부산지역의 주력품목인 일반기계류·정밀기기, 자동차부품은 ‘매우 불리’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한일 자유무역 협정 체결 시 관세 인하(현행관세 : 기계산업 평균 7.44%) 효과에 따른 일본 제품 진출로 인한 기계산업 전체의 생산 감소율은 30%, 고용 감축 규모만도 20%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일반기계산업은 가장 중요한 자본재산업이지만, 일본과의 기술격차가 크고 핵심부품을 중심으로 대일 의존이 심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산업보다 악영향이 클 것이라는 전망이다. 익명을 요구한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전체 국가 차원의 주력산업 붕괴도 문제지만 지역 경제에 미칠 파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동남권 경제에서는 한일 FTA가 지역경제에 미칠 파장에 대한 분석과 논의는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신발산업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체할 산업을 찾지 못한 채 영세 제조업체만 늘어가는 부산 경제, 일본과 바로 경합관계에 있는 기계 등 경남의 제조업, 이들은 협상이 타결되면 ‘깊고도 넓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들 ‘강 건너 불구경’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직접적 이해 당사자인 지역 경제단체, 노동단체 모두.

 

일본은 문턱 닳도록 부산 드나드는데
반면 일본지역 움직임은 훨씬 활발하다. 최근 들어 부산과 배편으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큐슈지역의 민간경제단체와 지방자치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방문단의 부산 출입이 잦아졌다. 이들의 방문 목적은 정부 협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관세 장벽’을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협상의 최대 쟁점인 관세 철폐와 쿼터제와 같은 비관세 장벽 등은 중앙 정부 차원에서 결정될 문제이지만 상관행이나 소비성향 등 정부 협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비관세장벽에 대한 대책은 스스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단지역과 중심가를 돌면서 소비자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무역환경, 거래관행 등을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다. 일본 현지의 경제 관계자들만 바빠진 게 아니다. 지난해 7월 부산대 경제학과 김기홍 교수는 부산주재 일본영사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다. 통역까지 대동하고 나타난 그는 한일 FTA 체결이 부산 경제에 미치는 영향, 주력산업 외에도 일본의 문화 컨텐츠 산업의 진출 가능성 등에 대한 의견을 구했고 면담 내내 꼼꼼하게 메모하고 일본 현지의 산업 관계자에게 전화를 해서 사실을 확인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김 교수는 “한일 FTA에 대비해 부산이라는 지역 경제에 대한 진출 가능성까지 검토하는 철저함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꼈다”고 말했다.

 

에프티가 뭔교?
지역 기업들의 무관심만 탓하기에는 문제가 간단치 않아 보인다.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부산 녹산공단. 영세한 기계·금속업이 몰려있는 17지구에 들어서자 바닷바람보다 더한 한기가 느껴진다.


기계 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D금속공업사. 오후 네 시가 채 안됐는데도 공장의 기계들은 가동을 멈췄다. 녹슨 드럼통에 나무상자를 부숴 불을 때고 있는 서너 명의 노동자만이 폐업한 공장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이 공장은 지난 연말부터 제품을 납품하고 있는 원청기업의 경영난으로 수주 물량이 확 줄어 ‘풀가동’은 꿈도 못 꾸는 상태다.


한일 FTA 협상 진행 사실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에프티? 그기 뭔교?”라는 답변이 대번 돌아온다. 이 업체 주변으로 늘어선 30여 개의 공장들에서도 FTA라는 주제로 대화를 5분 이상 이어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일 FTA 협상 진행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자신들과는 무관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열 곳이 넘는 공장에서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만나게 된 공작기계 업체 E공업의 사장 박종길(48)씨는 “한일 FTA고 뭐고 체결되기도 전에 지역 중소기업이 다 고사할 위기”라고 말한다. 경기가 괜찮은 대기업에 납품을 하고 있는 덕에 다른 영세업체에 비해 여유가 있다는 박 사장은 한일 FTA 체결을 염두에 두고 일본기업에 거래선을 뚫어 볼 요량으로 몇 번 일본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


하지만 박 사장의 전망은 암울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일본하고 교역이 활발해질거라는 말만 믿었죠. 하지만 일본 기업에 납품을 한다는 거는 쉽지 않을 거 같네요. 다들 수십 년 이상 거래하던 부품사가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제품에 별 신뢰가 없는 것 같았어요.” 결국 박 사장은 일본 진출의 꿈을 접고 다른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중국 진출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공단 내에 위치해 있는 중소기업지원센터 관계자는 “인력난과 원자재난, 자금난까지 겹쳐서 허덕이는 영세업체들에게 한일 FTA는 너무 먼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기계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이 공단입주업체의 9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창원공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부산과 달리 오로지 기계산업 하나에만 의존해 있는 지역경제 구조를 볼 때 뭔가 논의가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부산에서는 지자체와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초보적인 조사와 논의가 시작되고 있지만 창원에서는 그나마도 없었다.


창원 상공회의소 관계자는 한일 자유무역협정 체결의 지역경제 영향과 대책을 묻는 질문에 “기계업의 경우 다른 제조업에 비해 괜찮은 상태고 창원 경제도 기계업 호조에 힘입어 다른 지역보다는 비교적 나은 상태”라며 “한일 FTA가 기계산업에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잘라 말했다. 창원공단에서는 물론이고 시도 지자체에서도 한일 FTA 관련 대책 마련 움직임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지방정부와 업계의 준비만 턱없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지역경제의 붕괴는 바로 지역 노동자의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데도 지역 노동계는 한일 FTA 논의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다.


금속노련 부산지역본부 강진호 의장은 “산업 차원에서 피해가 있다는 얘기만 들리지 지역 노동자의 고용에 얼마나, 어떤 피해가 미치는지는 전혀 조사가 되지 않고 있다”며 “이제라도 지역 노동계가 구체적 피해치 조사에 나서고 지역업계, 지자체 등과 삼자 논의 테이블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 정부의 무관심에 지역 죽는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중앙과 지역 간의 격차는 회복되기 힘들 정도로 벌어지고 있다. 부산만 하더라도 실업률 전국 1위, 경제고통지수 3위, 광역단체 중 인구유출 1위, 광역시도 중 1인당 평균소득은 최하위, 기업유출 1위 등 ‘이보다 나쁠 순 없다’는 꼬리표는 다 달고 있다.


시도 지자체는 전통 제조업의 축소에 대한 대응책으로 각종 첨단 산업 육성책과 클러스터 조성 계획을 내놓고 있지만 당장 1년 앞으로 다가온 한일 FTA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관심이 없다. 지역 관계자들은 “지방 차원에서 FTA에 대한 변변한 토론회나 설명회 한 번 열리지 않은 것이 중앙 정부의 무관심을 고스란히 반영한다”고 지적했다.


동남발전연구원 김태경 원장은 “6차 협상이 끝났다는 것 외에 협상의 내용이나 쟁점에 관해서는 아무런 발표도 없고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논의 테이블은 전혀 없다”며 “지방정부 차원에서 정부의 협상안에 지역업계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의 협상 스케줄대로라면 한일 FTA는 10개월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주력 제조업 위주의 지역산업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상되고 있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평화’를 넘어 ‘태평’에 가까웠다. “주력 제조업도, 지역경제 기반도 모두 붕괴하면 대한민국은 무얼 먹고 살란 말이냐”는 업계 관계자의 우려만이 ‘대답 없는 메아리’로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