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의 투쟁 끝에 공장으로 돌아간다
9년의 투쟁 끝에 공장으로 돌아간다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8.10.05 11:47
  • 수정 2018.10.05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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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에서 복직까지 서른 명이나 희생됐다

진압 10년 만에 쌍용차 복면인들 “이제야 말한다, 나였다고”

지난 6월 23일자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2009년 8월 5일의 사건을 복기하는 기사다. 당시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당시 지부장 한상균, 이하 쌍용차지부)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공장점거 옥쇄파업을 77일째 진행 중이었다. 경찰은 쌍용차지부의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공장에 진입했고, 이를 막아서는 파업참가 조합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렇게 쌍용차지부의 옥쇄파업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 날’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복직 합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겨레신문> 기사를 통해 9년 만에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노라고 밝혔던 이들 중 한 명인 김주중 씨는 기사가 나간 지 4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9년이 지나도록 ‘쌍용차 출신’이라는 사회적 낙인 아래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생계를 꾸려왔던 고 김주중 씨는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

쌍용자동차에서 발생한 서른 번째 죽음이었다. 2009년 정리해고 이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서른 명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절망하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도 있었고, 정리해고의 충격을 몸이 감당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쌍용차지부(현 지부장 김득중)는 고 김주중 씨를 떠나보낸 후, 더 이상의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대한문 앞에 시민분향소를 마련했다. 쌍용차지부는 2012년에도 같은 자리에 분향소를 설치했었다. 고 김주중 씨의 죽음으로 6년 만에 다시 분향소가 마련된 것이다.

분향소를 설치한 지 73일째 되던 날, 쌍용자동차 사측 인사로는 처음으로 최종식 사장이 분향소를 방문했다. 2009년 이후 잇따르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죽음을 외면하던 사측의 기류가 바뀐 것일까? 분향소 방문 이후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진행된 노-노-사-정 협상에서는 남은 해고노동자 119명을 2019년 상반기까지 단계적으로 복직시킨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정리해고 이후 만 9년을 넘겨서 복직 합의에 이른 것이다.

합의 이후 쌍용차지부는 지난 9월 19일 문화제를 마지막으로 대한문 앞 분향소를 철거하고 평택으로 되돌아갔다. 문화제에서 김득중 지부장은 “지난 9년 동안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보냈던 연대의 힘과 언론이 쌍용차에 보였던 관심을 고공에 있는 동지들, 단식하는 동지들에게 조금 더 나눠주고 그 동지들을 위해서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면서 “우리도 그렇게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사태의 시작, 2009년 정리해고

이번 복직 합의로 쌍용자동차 문제는 한 고비를 넘겼다. ‘쌍용차 사태’가 시작된 2009년부터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합의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살펴본다.

2009년 쌍용자동차는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경영이 악화됐다. 외환위기 이후 대우자동차에 인수됐다가 다시 분리되는 과정을 거쳤던 쌍용자동차에게는 경영의 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2004년에 중국 상하이차가 새 주인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이제야 경영안정을 발판으로 ‘작지만 강한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쌍용자동차를 인수한 상하이차의 행보는 경영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약속했던 투자를 차일피일 미루는가 하면, 핵심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비록 사법당국에서 기술유출 의혹에 대해 면죄부를 주기는 했지만, 기술을 빼돌렸다는 정황은 차고 넘쳤다.

급기야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경영이 크게 휘청거렸고, 이 때도 상하이차는 쌍용자동차에 대해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유동성 위기에 빠진 쌍용자동차는 2009년 1월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쌍용자동차를 방치했던 상하이차는 결국 대주주로서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경영권을 법원에 넘기고 철수했다.

2009년 봄, 쌍용자동차는 회계법인의 실사를 거쳐 2,646명을 구조조정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희망퇴직을 신청한 인원을 뺀 976명이 최종적으로 정리해고 통보를 받아들었다. 김을래 부지부장 등 3명이 정리해고 반대를 주장하며 70m 높이의 굴뚝에서 농성을 시작했지만 사태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쌍용차지부는 정리해고만은 피하자며 무급순환휴직을 회사에 제안했지만, 회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함께 살자’는 쌍용차지부의 외침을 무시한 회사는 결국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외환위기 당시 도입된 정리해고 제도는 긴박한 경영상의 위험이 있어야 하고 정리해고 전에 해고 회피노력을 다해야 하는 등 ‘최후의 수단’으로만 제한적으로 적용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러한 제한은 문자에 불과했다.

쌍용차지부는 막무가내로 정리해고를 밀어붙이는 회사에 대항해 그해 5월 공장을 점거한 채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직장폐쇄 조치가 뒤따랐고, 쌍용차지부가 버티자 공장에 대한 단전단수가 이루어졌다. 결국에는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해 공장을 점거한 파업참가 조합원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언론에 보도된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졌다.

이튿날인 8월 6일, 쌍용차지부는 사측과 향후 인력 운용 방침을 합의했다. 정리해고를 통보받은 976명 중 마지막까지 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 640여 명에 대해서 자발적 선택에 따라 무급휴직, 영업직 전직, 분사, 희망퇴직을 실시하기로 했다.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할 경우, 무급휴직 및 영업직 전직 48%, 분사 및 희망퇴직 52%의 비율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구제되는 인원은 300여 명 수준이었다. 앞서 8월 2일 사측이 정리해고 통보자 976명 중 40%인 390명에 대해 영업직 전직 및 무급휴직으로 구제한다는 최종안을 제시한 것에 비해 구제하는 비율은 높아졌지만 실제 인원은 줄어든 합의였다. 이미 파업이 진압돼 더 이상 협상력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측의 제시안을 받아들여야 했던 결과다.

두 번 바뀐 법원 판결, 해고자를 두 번 울리다

옥쇄파업이 마무리된 후 쌍용자동차는 법원에 회생계획안을 제출했고, 2010년에는 매각이 공고됐다. 파업 이후 정리해고를 피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총회를 거쳐 금속노조 탈퇴와 기업별노조 설립을 결의했다. 정리해고 노동자들도 전열을 가다듬고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는 등 본격적인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해고무효소송은 이후 사태의 새로운 불씨를 남기게 됐다.

2011년 법원의 회생절차를 졸업한 쌍용자동차는 인도의 마힌드라 그룹으로 매각됐다. 그러는 사이 쌍용차지부는 정리해고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희망텐트’를 설치했다. 2009년 쌍용자동차의 구조조정 방침이 발표된 이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중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하지만 추가적인 희생을 막아보고자 몸부림쳤던 쌍용차지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다수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잃었다. 2010년 11월에 열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이후에도 사망자가 연달아 발생했던 것이다.

쌍용자동차에서 정리해고가 시행된 지 1년여가 지난 2010년 9월, 쌍용차지부는 사측의 회계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아직 상하이차가 대주주로 있던 2008년에 쌍용자동차가 회계법인에 의뢰해 작성한 연말사업보고서에 손상차손이 과다 계상됐다는 것이다. 손상차손은 부동산, 기계 등 유형자산의 시장가치 하락이 예상될 때 기록하는 장부상의 예비손실로, 손상차손이 클수록 기업의 가치는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쌍용차지부는 2017년 12월 기준 24억 원이던 손상차손이 2018년 말에는 5,132억 원에 이른다며, 1년 만에 손상차손이 5,100억 원이나 증가한 것은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먹튀’를 위해 법정관리를 신청하려고 의도적으로 손실을 부풀린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상하이차는 이 사업보고서를 근거로 2009년 1월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법정관리에 필요한 기업실사를 진행한 또 다른 회계법인도 사업보고서를 바탕으로 2,646명 정리해고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해고노동자들은 이 같은 회계조작을 바탕으로 진행된 정리해고는 무효라며 2010년 11월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그 결과는 1년여가 지난 2012년 1월에 나왔다. 결과는 원고 패소. 1심 법원은 회계조작을 인정하지 않고 쌍용자동차의 정리해고는 정당했다고 판결한 것이다.

2012년 3월 경찰은 쌍용자동차 진압을 수사 우수사례로 선정했다. 파업 직후 경찰이 쌍용차지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옥쇄파업 진압 당시 경찰 장비의 파손에 대해 쌍용차지부에 손해배상을 제기했던 것이다.

정리해고 무효와 해고자 복직, 손해배상소송 철회 등을 요구하는 쌍용차지부의 투쟁도 끝없이 이어졌다. 1심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국정감사를 통해 쌍용자동차의 회계조작 여부를 밝히고 정리해고가 정당했는지 가려달라는 요구를 국회에 하기도 했고, 파업을 이끌었던 한상균 전 지부장의 송전탑 고공농성도 진행됐다. 2013년 1월에는 무급휴직자들이 전원 복직됐지만, 쌍용차지부의 요구는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렀다.

2014년 들어 해고노동자들이 제기한 해고무효소송 2심 판결이 나왔다. 2심에서는 원심 판결을 뒤집고 해고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2심 재판부는 쌍용자동차가 2009년 경영위기를 겪은 것은 맞지만 정리해고가 아닌 부동산 매각 등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단을 갖추고 있었고, 정리해고의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위험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쌍용차지부가 제기한 회계조작 의혹에 대해 그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쌍용자동차는 2009년 파업이 끝난 직후 보유한 부동산을 담보로 산업은행으로부터 1,300억 원을 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2심 판결은 오래지 않아 다시 뒤집혔다. 2014년 12월 대법원은 2심 판결에 대해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이 대법원 판결은 최근 부각되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거래 의혹과도 맞닿아 있다. 재판거래 의심을 받고 있는 문서에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판결이 언급된 것이다.

전원 복직 합의했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다

대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사법적인 해결 가능성을 상실했지만 쌍용차지부는 복직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되는 문제제기와 인도원정투쟁까지 불사하는 노력 끝에, 2015년 12월 쌍용차지부는 마침내 사측과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 복직을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합의에 따라 2016년 7월에는 해고노동자 일부가 복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사측은 해고자들을 전원 복직시킬 만큼 경영상황이 호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015년의 복직 합의를 어겼다.

정부가 바뀐 2017년 8월에는 경찰이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발족하고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을 우선조사대상으로 선정했다. 올해 목숨을 끊은 고 김주중 씨도 경찰의 진상조사에 응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복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됐다. 올해 2월 최종식 사장이 해고자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지만, 그 실행이 지지부진하자 쌍용차지부 김득중 지부장은 한 달이 넘는 단식농성을 통해 항의했다. 지난 대선에서 해고자 문제 해결을 약속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약속 이행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6월 27일 고 김주중 씨의 사망이 발생했다.

지난 7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는 동안 마힌드라그룹 회장을 만나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다는 점에서 해고노동자들에게는 희망적인 소식이었지만, 이미 서른 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후였기 때문에 아쉬움이 컸다.

이어 지난 8월 말에는 경찰 인권침해 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1년여에 걸친 조사 끝에 쌍용자동차 파업 진압이 청와대의 최종 승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론 역시 쌍용차지부가 그동안 주장해왔던 내용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미 목숨을 잃은 서른 명의 희생자를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지난 9년간의 지난한 투쟁 끝에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가게 됐다. 하지만 지난 9월 19일 열린 대한문 앞 시민분향소에서의 문화제에 참석한 해고노동자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다. 전원 복직에 합의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자를 냈다는 점이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직 문제 외에는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 2015년에도 전원 복직에 합의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도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이런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해고자 복직 문제는 이번 합의로 일단락 됐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문제를 개별기업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복직 문제가 해결됐으니 할 일 다했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쌍용자동차 사태와 같은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