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시작한 영화제가 아픔이 되기까지
사랑으로 시작한 영화제가 아픔이 되기까지
  • 강은영 기자
  • 승인 2019.05.03 07:25
  • 수정 2019.05.03 0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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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들이 말하는 영화제 노동환경

[리포트] 영화제 스태프 노동자

지난해 10월, ‘영화제일하는사람’이라는 이름으로 개설된 트위터 계정에서 “영화제에서 일해본 적 있나”라는 글을 시작으로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에 대한 고발이 시작됐다. 한 사람으로 시작된 고발은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제보로 이어졌다. SNS는 영화제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논란으로 들끓었고, 일주일 여가 지나고 난 후 이용득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청년유니온은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영화제 스태프 노동실태조사를 발표하고 노동환경 개선을 촉구했다.

지난 1월에는 언론의 관심에 힘입어 최초로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동조합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노동조합이 생기기도 했다. 세간의 주목을 받은 지 6개월 여가 지나고 난 후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그들의 일상을 따라가 보았다.

스태프 갈아서 깔린 레드카펫

아래는 영화제 스태프 노동자 A씨의 사례를 통해 재구성한 일기 형식의 글이다. A씨의 말에 따르면 영화제 단기계약 스태프들의 평균 근속기간은 5~6년이며 평균 연령은 30대 초반에서 중반이다.

이용득 의원실과 청년유니온이 발표한 <영화제 노동실태 제보센터 제보분석 결과>에 따르면 2018년 영화제와 임시직 근로계약을 맺은 스태프들은 400여 명이다.

기본적인 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영화제

<참여와혁신>과 인터뷰를 진행한 익명의 영화제 스태프 A씨는 “영화제가 바빠지는 기간에는 야근을 해도 시간외수당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밤 9시나 10시까지 야근을 하는 일이 많다”며 “야근을 한다고 하면 석식비나 챙겨주는 정도이고 그 돈도 정해진 시간까지 일을 해야 준다. 그 전까지 일했을 때는 석식비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서 “일반 회사에 들어갔다면 일 잘하는 고급 인력들인데, 영화제에서 단기간으로 일하는 걸 보면 안타깝다”며 “동료들끼리는 영화제 업무가 정말 좋고, 하고 싶은데 일이 너무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하소연했다.

이용득 의원실과 청년유니온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영화제 개최 전 하루 평균 13.4시간 근무를 하고, 주 64시간 일하는 경우는 40건의 제보 중 절반 이상인 21건을 차지했다.

문제는 야근을 해도 시간외수당을 지급하는 경우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국내의 6대 국제영화제를 대상으로 2018년 11~12월에 걸쳐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DMZ다큐멘터리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연장, 야간, 휴일근로에 따른 시간외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제천국제영화제는 시간외수당 미지급은 확인되지 않았다.

A씨는 단기 고용에 대한 문제도 심각하다고 말했다. “특정 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3개월 정도 일을 하다 보니 1년에 2개 이상의 영화제에서 일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며 “주로 국내 6대 영화제 개최 순에 따라 전국을 순회한다”고 설명했다.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동이 열악해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A씨는 “영화제 규모를 키우는 욕심에만 혈안이 돼 있고 스태프들은 등한시하고 있는 시스템이 가장 큰 문제”라며 “상업영화들이 좌석 점유율에 관심 있듯이 영화제도 영화를 본 관객이 몇 명인지가 굉장히 중요한 지표”라고 말했다.

이어서 “편수를 늘린다고 해서 그 만큼 좋은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년보다 안 좋은 영화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며 “실질적으로 관람객들은 영화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런 부분들은 평가 지표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A씨가 짚은 두 번째 문제는 “20년 전부터 영화제를 만들어 오던 선배들의 머릿속에는 ‘영화제 일은 당연히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미안해하기 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라고 하니 스태프들에게는 상처로밖에 남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서 “이런 환경에서 일하다보면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커다란 행사를 돌리기 위한 톱니바퀴 하나 정도라고 여겨진다”고 아픔을 내비쳤다.

ⓒ 김동석
ⓒ 김동석

스태프들이 웃으며 일 하는 영화제를 꿈꾸며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의 폭로를 시작으로 영화제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실제 스태프들의 노동환경은 얼마나 변했을까. A씨는 “아직 바뀌었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 지켜봐야 할 상황”이라며 “사건의 발단이 된 후로 1년 정도가 지나고 봐야 노동환경이 얼마나 변화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진단했다.

영화제에 선명하지 않지만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1월 영화제 최초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A씨도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정확한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아 아직은 판단하기 애매한 문제”라면서도 “그동안 다른 영화제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는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선제적으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여주면서 그 동안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태프들의 인권에 힘써주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점수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오는 6월 27일 개막을 앞두고 있으니 이제 바빠지기 시작했다”며 “이 때부터 야근이나 시간외수당을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노조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A씨는 앞으로의 영화제가 “최소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곳이 됐으면 한다”며 “이곳에서 일을 한다고 결정한 후 대기업 수준의 급여를 꿈꾼 것은 아니다. 다만, 국가에서 최소한 받아야 한다고 명시한 급여의 선을 지키고 거기서 야근 수당을 줘야하는 상황이면 챙겨줬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그러면서 “영화제 일을 할 만하는 생각이 들 때 계약이 만료되거나 자기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영화제를 떠난 경우가 있다”며 “계약 기간을 한 달 정도는 늘려서 영화제 업무 분위기도 파악하고 어느 곳에 어떤 물품이 있는지 파악하면서 업무에 대해 배우고 한 번은 넘어지면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된 업무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제 일을 하며 진정한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도 A씨는 어려운 점을 부각하면서도 스태프들의 영화제에 대한 사랑을 희석시키지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