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것, 그리고 사라지는 것
사라진 것, 그리고 사라지는 것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8.07.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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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은 ‘내일’과 그리운 ‘어제’의 사이에 서다
동대문 운동장, 피맛골, 난곡…그 곳에 가봤더니

서울 도심의 청계천 8가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 구입한 물건들을 가지고 총도 만들 수 있다는 전설의 그 곳. 만병통치약이 있었고 조선시대 골동품을 팔았고, ‘고물’도 그곳에만 들어가면 ‘보물’이 되는 그런 곳이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자체 성교육 교재 창고’였으며 ‘그렇게 희한한 건 도대체 어디서 팔아?’라는 물음에 ‘청계천’이라는 답이 돌아오면 다른 질문이 필요 없이 그냥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들던, 바로 그곳은 어쩌면 사람들의 추억의 보물창고였는지도 모른다.

‘어제’를 그리워하며 ‘오늘’을 살다

동대문 운동장이 82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철거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26년 일제에 의해 당시 일왕 후계자였던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경성운동장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이곳은, 2만5천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상당한 규모의 운동장이었다.

서울시에서는 동대문 운동장 주변을 공원과 디자인 중심의 테마 파크로 꾸민다는 계획이다.
동대문운동장 철거가 가시화되며 그 곳만큼 주목을 받았던 것이 청계천 복원사업으로 갈 곳을 잃었던 노점상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약속했던 동대문 운동장 ‘풍물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다시 자리를 잃게 됐다.

▲ 허물어져가는 동대문운동장의 추억                                             ⓒ 이현석 기자 

항의하던 이들은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옮겨 갔다. 더 버티기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이곳은 마치 동대문 상가처럼 3층까지 각각 상점 번호를 달고 죽 늘어서 있다.
땡볕 내리쬐는 거리, 북적거리는 청계천 시장 대신 높은 천장이 달린 건물, 형광 불빛 아래 죽 늘어선 상가에서 장사를 하고 있지만 상인들이 파는 물건들은 그대로다. 전구나 소켓 등의 가전 전기제품부터 각종 영양제와 가시오가피 등의 건강식품, 소일거리용 운동기구 그리고 한 구석에 1000원 하는 막걸리와 파전을 파는 가게까지.

사람들이 찾는 물건도, 파는 사람도 그대로지만 환경은 낯설기만 하다.
청계천에서 시작해 23년 동안 노점을 해 왔던 신정순 씨는 “청계천에서 돗자리 하나 펴 놓고 시작해 자식들 가르치고, 결혼까지 시켰다”며 “지금 ‘상인’이라는 이름을 얻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굴곡이 있었지만, 그래도 청계천에서 장사하던 때가 그립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근황을 물으니 “처음에는 좀 되나 싶었는데 지금은 여러 가지로 어렵다”며 “이곳으로 오면서 원래 청계천, 동대문 운동장에서 장사하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이곳 저곳에서 모인 상인들로 인해 자리다툼이 심각하다”고 전했다.

건강식품을 팔고 있는 손현익 씨는 “파는 물건에 따라 장사가 잘 되는 곳도, 아직 어려운 곳도 있다”면서 “예전에 정신없고 북적거리는 시장보다 햇빛도 가려지고 깔끔한 느낌이 드는 이곳이 낫다는 손님도 있다. 예전의 그 곳, 그 추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여기를 낯설어 하기도 하지만, 다 이렇게 적응해 가며 사는 것 아니냐”고 되묻기도 했다.

어쨌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보다 ‘홍보’가 많이 돼서 여기서도 ‘먹고 살 만큼’을 벌면서 적응해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들에게 ‘변한 것’은 내가 먹거리를 해결하고 있는 곳, 동네가 아니라 살아갈 만큼을 벌던 터전을 앗아간 환경이었다.   

‘보존’과 ‘발전’, 선택권은 없다

낡은 간판과 굽은 골목. 마치 70년대를 연상하게 하는 좁은 구멍가게가 있다. 도심에 사는 이들은 이 풍경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난다’고 한다.

피맛골과 청진동. 고층 빌딩이 빼곡히 들어선 서울의 종로 한복판에서 만날 수 있는 ‘옛 동네’다.
양반과 평민의 계급구별이 뚜렷하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의 행차를 피해 말이 다닐 수 없는 좁은 길로 다니던 서민들은 피맛골에서 출출할 때에는 허름한 국밥집에 들러 배를 채우고 목이 칼칼할 때에는 막걸리를 들이켜기도 했다. 인심 좋고, 싸고, 그리고 정겨운 이곳의 유래는 그러하다.  

▲ 피마골 담벼락에 누군가 남긴 흔적들                                          ⓒ 이현석 기자

알 만한 사람은 누구나 알고, 서울에 있는 사람이면 대학을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40대나 20대나 모두가 거나하게 취해 웃음을 날리고 돌아다니던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곳이다. 유난히 낡은 양철 의자와 투박한 반찬, 몇 개 없는 불친절한 메뉴와 주인 할머니의 퉁박스러운 접대에도 유쾌했던 그 곳이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25년간 피맛골에서 장사를 해 왔다는 이곳의 한 상인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또 이렇게 땅값이 높은 곳에서 하수도 시설도 안 좋고 이렇게 옛날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가 있다는 게 뭐 좋은 일이냐”면서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여지껏 너무 제약이 많았고 이곳도 신천이나 강남처럼 발전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철거 소식을 듣고 아쉬운 마음에 일부러 찾아왔다는 김모 씨는 “발전하는 것도 좋지만 여기에서 시원하고 서비스 좋고, 값비싼 음식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경기도 안 좋고 주머니는 자꾸 비어가는데, 또 더 높아지고 비싸지면서 허름한 주머니와 차림새로 찾을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안타까워했다.

주점을 찾은 또 다른 손님은 “막말로, ‘삐까리한’ 동네에서 다 그렇고 그런 안주를 팔면서 손님을 받는 술집은 널리고 널렸는데, 부러 이곳을 찾아오는 것은 이 분위기와 편안함 때문 아니겠냐”며 “만약 이런 모습이 바뀐다면 굳이 여기까지 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며 오늘도 삶은 계속된다                  ⓒ 이현석 기자

있는 것은, 아직 필요하기 때문

피맛골을 지나 탑골 공원이 있는 종로 3가에 가면 각종 야채와 막걸리, 돼지껍데기를 파는 포장마차가 공원 앞을 차지하고 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주 고객인 이곳은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아직도 소주 한 잔에 500원이라는 가격을 고수하고 있다.

장마철에는 여기도 한산하다. 포장마차의 주인들도 손님들과 함께 막걸리를 주고받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또 지긋한 어르신이 술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는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포장마차의 주 메뉴는 쌈장에 찍어먹는 오이와 당근. 그리고 얼마간 자식들에게 용돈이라도 받은 날에는 부침개에 막걸리 한 사발을 즐길 수 있다.

장기판이 벌어지고, 웃음소리가 멀리 퍼지며 밤 깊도록 포장마차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15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모 씨는 “요새 경기가 없어도 너무 없어 어느 때보다 힘들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여기에 좌판을 펼치고 매일 장사를 하는 것은 “흐린 날이 있으면 갠 날도 있는 것이고, 우리가 없으면 여기 어르신들은 목 축일 데도 없이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실 것 아니냐”고 말한다.

안 된다, 안 된다 해도 여기에서 돈을 벌어먹고 살았고,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곳은 이곳 대로 돈 없고 사연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루하루를 사는 삶터라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는 지금, 이제는 ‘환경’, 그리고 ‘디자인’과 거리가 먼, 하지만 ‘추억’과 ‘인심’을 잃지 않은 이곳이 오히려 낯선 풍경이 되어갈 것으로 보인다.
 
고층 아파트에서 ‘달동네’를 기억하다

한겨울, 난곡이라 불리는 서울 신림동 끝자락에 있는 동네에는 연탄재가 빼곡히 깔려있었다. 마을버스도 하나 없는 가파른 길을 한참이나 내려오면 버스 종점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달동네’를 촬영할라 치면 단골로 등장하던 이곳. 관악산과 맞닿아 밤이면 아카시아 향이 진동하던 난곡. 밤이면 산중턱까지 불빛이 가득 들어차고 옆 집 세간 부딪히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리던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60년대 후반 청계천 등 시내 판자촌이 철거되며 생긴 ‘난곡동’은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며 갈 데 없는 서민들의 보금자리로 긴 시간을 보냈다. 80년대부터 한다, 만다 말이 많던 재개발은 2002년 1월,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연탄재가 깔려있던 곳은 도로로 변했다. 다닥다닥 붙어있던 낡은 기와집과 양철 대문들은 모두 고층 아파트로 변했고 어느 새 집값도 만만찮게 올랐다. 달동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좀 더 좋은 곳, 편리한 곳에 살게 됐지만 난곡에서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던 주민들에게는 생채기 같은 기억이 하나씩 자리 잡았다.

20년을 이 지역에서 살아 온 한 주민은 “우리는 그래도 명의로 된 집이라도 있었으니까 계속 살 수 있었다”며 “근데 그 땐 진짜 한 동네 사람들끼리 모르는 이가 없었고, 산 밑에 혼자 계신 할아버지께 한 달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김치도 담가 드리고 했었는데, 지금은 소식도 잘 모르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생각하니까 찾지도 못하고 잠깐 ‘참 안 됐네’ 생각하다 말게 되는 게 사람이니까. 그래도 가끔 동네 골목에 모여앉아 알타리도 다듬고, 김치도 담던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더라고”
“좀 더 좋은 아파트에서 살았으면, 우리 동네도 집값이 좀 더 올랐으면, 그리고 깨끗한 거리에서 살았으면”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 바람 뒤에는 사라진 정과 이웃과, 사람 냄새나는 풍경이 있다.
  
이렇게 우리는 좀 더 살기 좋은 세상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삭막해져만 가는 도시, 그리고 편해지고, 발전하는 세상에서 어려운 사람들은 더 발붙일 곳 없이 살아가고 있다.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변화’를 요구하며 ‘추억’은 도태된 이들의 낭만이 되어가고 있다.

발전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사람들은 좀 더 편한 세상에서 즐겁게 살길 바란다. 다만, 변화하고 있는 도시의 미래가 쓸쓸한 뒤안길, 힘든 사람들의 눈물을 보이지 않는 창고 안에 가둔 채 ‘화려함’으로 포장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라졌고, 사라지고 있는 것들. 또 앞으로 사라져 갈 것들이 우리의 ‘추억’과 ‘따뜻함’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