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의 콕콕] 이 귀중한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김란영의 콕콕] 이 귀중한 힘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8.09 16:44
  • 수정 2019.08.13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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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콕’은 야무지게 자꾸 찌르는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입니다.
상식과 관행들에 물음표를 던져 콕콕 찔러보려 합니다.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지하철에 스티커가 붙었다.

NO
BOYCOTT JAPAN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방해하는 아베 정부를 규탄한다’는 서울교통공사노동조합의 목소리다. 스티커가 붙은 창 너머로 건너편 ‘핑크카펫’에 앉아 있는 여성이 보였다.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핑크카펫은 임산부를 위해 시민들이 양보해야 하는 자리다. 문득, 임산부가 아니면서 핑크카펫을 차지하고 있는 저 여성의 태도에 대해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는 것은, 그러려니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기에 우리가 일본 제품을 사지 않고, 일본에 가지 않는 일 만큼이나 생각해야 할 거리란 생각이 들었다. 임산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성이니까, 남성이 앉아 있는 것보다는 조금은 나은 것일까? 어차피 열차 안에 임산부가 없다면, 누구 한사람이라도 안식을 취하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인 선택인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핑크카펫 제도가 실효성이 떨어지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지하철의 풍경도 달라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내일도 핑크카펫에 앉아서 ‘꼬닥꼬닥’ 안식을 취할 것이다.

일본 아베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빼면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시민단체들의 눈과 귀가 일본에 쏠려 있다. 출근길 지하철역 앞에는 ‘대한민국이 이깁니다’라는 호기로운 문구가 여당 의원 ‘표’ 현수막에 적힌 채로 펄럭이고 있었다. 이러한 목소리는 노동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아베 정부가 ‘경제 전쟁’을 선포한 뒤 매일 같이 아베 정부를 규탄하고,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동참의 뜻을 밝히는 각종 캠페인과 기자회견, 성명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면 우리는 지난달까지만 해도 일본 제품을, 일본 여행을 나름대로, 열렬히 좋아하지 않았었나? 

‘다이소’는 여느 ‘천냥마트’들을 제치고, 자취생이나 주부들의 일상 곳곳을 파고든지 오래고, 지난 2011년부터 최근 8년간 일본을 방문한 한국 여행객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한국관광공사 등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 여행객수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 여행객수의 2배를 훌쩍 넘는 754만 명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이 기자이고, 또 한 사람이 기자의 친구다. 일본은 가깝고도,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대표적인 여행지로 꼽혔다. 불매운동의 상징이 된 ‘유니클로’는 또 어떤가. 기자가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던 지난 2014년 겨울까지만 해도 유니클로 김포공항점의 롯데몰 내 점포 번호는 1번이었다. 롯데몰 중에서 매출이 1위란 뜻이다.  

지금처럼 이렇게나 가지 말아야 할 곳, 사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동안 왜 그러지 못했을까?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그 결기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작은 걱정도 든다. '우리'의 오늘이 그저 자신도 마땅히 해야 할 것 같은 유행이 아니기를, 스스로도 되짚어보게 된다. 

'깨어있는 시민'의 힘은 세상의 풍경을 바꿔놓을 정도로 이렇게나 무섭고 강력하다. 도대체 이 먹성 좋은, 다른 여러 문제들을 단번에 삼켜버리는 힘은 어디서 나왔나? 그리고 우리는 이 귀중한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나?  

자국의, 아니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앞세워 바닥수준의 역사인식을 보이는 일본 정치인들의 행태는 꼴사나운 것이 분명하다. 강제 징용과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는 일도 거슬러서는 안 되는 '정의'인 것이 분명하다. 이 분명한 사실 앞에 분노한 시민들의 목소리는 그래서 정당하다. 

다만, 이 더운 날 편의점에서 시원한 맥주 한 캔을 선택하는 과정에서조차 일본 맥주를 골라가며 피하는 우리들이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이 있다. 지금의 이 선택은 어떤 '변화'를 향하고 있나? 오랜만에 하나로 모인 시민들의 뜻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성공의 역사로 남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파도가 삼켜버려서 보이지 않는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있지 않은지 챙겨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