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다"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8.09.01 10:27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것 다 해”
30m 철탑 위의 KTX 여승무원지부 오미선 지부장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30미터 상공의 철탑이 까마득하다.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니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기가 힘들다. 땀을 비오듯 쏟으며 찾아간 고공 농성 현장. 한 사람도 채 편하게 눕기 어려운 텐트에 책과 가재도구, 옷가지들을 놓고 KTX승무지부 오미선 지부장과 정미정씨, 그리고 철도공사 서울차량지부 하현아 씨 3명이 앉아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미세한 진동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철탑 위에서 4일을 보낸 3명의 여성은 다행히 약간 피곤해 보이는 것을 빼고는 많이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다

“당장이라도 내려가고 싶어요. 보시다시피 텐트가 좁아 언니(하현아)가 우리를 안에서 재우고 밖에서 자는데 정말 아슬아슬합니다. 밤에 진동이 느껴지면 놀라서 깨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 밧줄을 손목에 묶고 겨우 잠들죠.”

처음 380여 명이 시작했던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 인원이 고작 40여 명 남짓 남았다. 공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것도, 그것을 알리는 것도 1/10의 사람들이 모두 해야만 한다. 올 초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지부장을 맡았고, 또 그 책임감으로 용기를 냈지만 밤마다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미선 지부장은 어떻게 올라오게 됐냐는 질문에 “쉽게 결정한 것은 아니다”면서 “정말 우리한테 이 방법밖에 남아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서로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수없이 많이 하고 나서 결정한 것”이라고 답했다.

철탑 아래에는 안타까움이 더하고 있었다. 조합원 김영선 씨는 “언니(오미선 지부장)가 밤에 위에서 전화를 했어요. 자다 깨서는 ‘내가 KTX 때문에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는데 너무 마음 아팠어요”라며 철탑 위를 올려다 봤다.

오미선 지부장은 “코스콤 동지들도 그렇고 기륭 동지들도 80일 이상 단식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목숨을 내거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전했다.

붉은 제복이 보이는 곳에서

철탑 위에서는 서울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KTX가 지나가는 것,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모두 볼 수 있다.
오미선 지부장은 “속상해서 안 보려고 하는데 저 쪽에서 붉은 옷을 입고 사람들한테 인사하는 모습도 보이고,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 이 위에서 그것을 내려다 봐야 하는 내 현실이 암담할 때가 있다”며 “연행, 단식, 검거 등 안해 본 것이 없는 만큼 지금의 현실에 패배감이 들 때도 있다”고 전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지난 촛불 집회에서 현실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지금은 예전보다 댓글을 통한 여론도 많이 긍정적으로 변했다. 또한 우리가 현실을 알리기 위한 촛불집회를 만들어도 되겠냐는 한 인터넷 동호회 회원들도 있었다.

오미선 지부장은 “많이 떠났고, 또 우리와 얼굴을 마주치지 못하는 옛 동료들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며 “우리가 여기서 승리해야만 떳떳하게 그들과 함께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철탑 위에 올라오고 나서, 세원 언니(민세원 전 지부장)가 전화를 해서는 미안하다고 하며 계속 울더라고요. 사정이 그랬던 것을 이해하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현실이 미안한 거죠.“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오 지부장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직접고용’입니다. 당장 정규직화가 어렵다고 해서 그것도 양보했고, 우리는 대화를 통해 일터로 돌아가길 희망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여기에 올라오기까지 많은 것을 각오해야 했고, 용기를 내야 했다. 올라 온 이상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내려갈 수는 없다”며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900일. 3년의 투쟁 기간 동안 ‘비정규직의 꽃’이라 불리던 KTX 여승무원들은 ‘관망’과 ‘동정’ 속에 점점 시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투사’라는 이름과, ‘꽃’이라는 명칭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KTX 여승무원이라 불리고 싶다고 말한다.

비정규직 문제가 가속화되고 있다. 극한 투쟁과 대립 속에서 늘 절망하는 것은 ‘비정규직’만의 몫이 되고 있다.

철탑에서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식은땀을 흘리며 내려선 땅 위에서, “위에 올라와서야 땅을 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았다”는 오미선 지부장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이 하루 빨리 땅을 밟고 설 수 있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