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우의 부감쇼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임동우의 부감쇼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7.06 13:06
  • 수정 2020.07.06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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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 버즈 아이 뷰 쇼트(bird’s eye view shot).
보통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임동우 기자dwlim@laborplus.co.kr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강남역 8번 출구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난 2일 오후 1시 기자회견을 챙기려 지하철에 오를 때,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강남역은 내가 어떠한 사회적 신분조차도 갖지 못했을 때 자주 오가던 곳이다. 즐비한 학원가, 해가 뜨면 백팩 멘 학생들이 역 밖으로 쏟아져 나오던 아침을 기억했고, 그 속에 내가 있었다.

당시 공부를 하다가 점심이 되면 8번 출구를 거쳐 도시락 집으로 향했다. 3,000원 미만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오면서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삼성 사옥을 바라본 적 있다. 옆에서 이름도 모른 채 공부하던 또래들은 서초대로 하나 건너 위치한 사옥으로 취업하기 위해 코를 박고 공부했다. 물리적 거리와 심적 거리는 그렇게 달랐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2일 강남역을 올라 삼성 서초사옥 앞 기자회견 장소에 갔을 때, 과거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꼈다. 성벽처럼 오른 건물 사이, 274일 된 컨테이너가 있었다. 그 앞에서 현수막을 앞에 두고 마이크를 잡은 이들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 명 한 명 발언을 이어가고 10분이 지나서도 기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낮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누가 들어야 하는 걸까? 지난날 누군가 사회 구석구석 다양한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이 기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많은 언론이 있다고 한들 이슈는 마치 유행 따라가듯 동일한 말을 반복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최근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로 인해 노동계에 이목이 집중됐다. 코로나19로 인한 위기 극복을 위해 경제·사회 주체 대표들이 ‘빠른 논의’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기존 사회적 대화기구조차 거치지 않고 시작된 ‘장’이었다. 민주노총이 제안하고 총리실 주재로 열린 이번 ‘원포인트 사회적 대화’는 내부 반발로 인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지난달 말부터 플래시 터지는 취재현장과 무수히 쏟아지는 기사 이면에, 이 시간에도 수면 위로 가닿지 못하는 목소리가 분명히 있다. 각 대표들이 ‘맞다, 아니다, 한다, 안 한다’에 대한 선언적 의미에 매몰돼 각축을 벌이는 동안 현실의 목소리는 강남 서초사옥 앞에 274일째 설치된 컨테이너처럼 왜소해진다.

작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살아남기 위해 국문을 열어야 한다는 최명길과 그럴 바에 차라리 죽음을 택해야 한다는 김상헌의 대립이 주를 이룬다. 소설 속에서 김상헌은 배곯은 뱃사공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몇 푼 받고 인조가 도피한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다고 판단해, 죄 없는 뱃사공을 칼로 쳐 죽이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현실 속 취약계층 노동자의 잔상이 ‘뱃사공’이라면, 이들을 살릴 실질적인 대책 없이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적 태도를 외치는 이 시대의 ‘김상헌’은 과연 누구일까?

‘대화’란 자신과 전혀 다른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더 나은 합의를 위해서는 충분한 ‘대화’의 기반이 필요하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대화’. 진정 누구를 위한 대화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