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거리감
[박완순의 얼글] 거리감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0.07.10 09:00
  • 수정 2020.07.10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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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장마철 꼭 한두 개 덜 마른 빨래의 쾌쾌하고 시큰한 냄새가 뽀송한 빨래의 향기를 뚫고 코를 찌르곤 한다. 불쑥 찾아온 불쾌한 냄새에 빨래를 개다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이런 일은 일상을 살다가도 찾아온다. 마음속으로 쑥하고 깊게 부끄러움이 왈칵 들어올 때다.

최근 아침에 출근하든, 저녁에 퇴근하든, 씻으려고 하든, 커피를 마시려고 하든 조금이라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왈칵하고 부끄러움이 내 마음속에 쏟아진다. 그 부끄러움의 기원은 거리감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리감으로 인한 공감의 부재를 내 스스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경제위기가 찾아왔다느니, 실업자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준 실업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늘어난다느니, 공항항공 산업에서는 무슨 위기를 맞고 있다느니, 그래서 노동이 위기라느니, 위기는 취약계층(비정규직-여성-청년-고령)에게 집중됐다느니 등의 나불거림을 글 위에 옮겼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의 삶과 나의 삶에 전혀 접점이 없어서 그들이 온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위기를 수량화한 숫자로, 겉도는 표현으로 기술했다. 많이 받지는 않지만 나는 정규직이어서 해고의 낭떠러지 근처에도 서보지 않았으며, 하청노동자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진짜 사장이라는 원청 얼굴 좀 보자고 외쳐본 적도 없다. 구린 작업장 환경으로 면역력이 약해지거나 코로나19에 쉽게 감염될 확률도 상당히 낮다.

같은 세계에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세계에 서로가 존재한다.

그래도 취재원들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떻게 거리감이 생기냐고,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고 마뜩찮게 쳐다볼 수 있다. 맞다. 그런 내가 스스로도 부끄럽고 마뜩찮다. 이 극복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자꾸 생긴다.

아직도 이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는다.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그 사람이 아니기에 생기는 거리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정했으니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더욱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세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든 거리감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점이다. 거리감조차 잊으면 부끄러움도 없을 것이고, 같은 세계에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세계에 서로가 존재하는 것조차 지워버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거리감과 부끄러움과 푸념과 다짐을 늘어놓으며 살아가고 있다가 저번 주에 다시 거리감을 느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 노사정 합의에서 당사자 민주노총은 합의문을 추인하지 못했다. 그 과정을 당일 취재하다가 동료 기자가 잠시 쉴 때 나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노사정 합의, 사회적 대화, 민주노총 추인 등 뭐 관련된 게 아무 것도 뉴스 검색 순위권이 아니고 시민들의 관심 밖이라는 게 그가 한 말의 요지였다. 그의 말을 듣고 거리감이 불쑥 머리를 들었다.

당일 노사정 합의문 추인에 반대하는 쪽이든 찬성하는 쪽이든 자신들의 ‘반/찬’이 흔히 말하는 평조합원과 노조 바깥의 시민들에게도 좋은 맛이고 건강한 맛이라고 이야기했다. 거리감이 다시 불쑥 머리를 들었다.

그래서 뭐 내가 만난 사람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지난 취재 과정에서 만났었던 일반 조합원들에게 연락을 했다. 오후 여섯 시가 가까워진 초저녁이었고, 이미 한바탕 민주노총의 격론이 언론에 많이 탔을 때다. 대여섯 명의 조합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사실 잘 모른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쭉 나누고 상황을 이야기하니 본인 생각을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거리감이 커졌다. 일반 조합원들은 사실 잘 모르는데 반대하는 쪽이든 찬성하는 쪽이든 그들이 근거로 불러다 세운 일반 조합원들의 생각과 현재 처지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그들의 판단이 먼저고, 거기에 근거를 맞춘 것일까? 아니면 내가 통화한 이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오독한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거리감도 커졌다. 내가 나에게서 느낀 마뜩치 않은 감정과 시선이 나왔다.

내가 이야기 나눈 조합원 수도 적고 내 직관이기 때문에 나의 오독 가능성에 무게를 두겠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든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덧붙여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하면, 민주노총 임시대대가 열린다. 합의안 찬성과 반대 혹은 아예 이 대대의 정당성에 대해 묻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합의안 추인도 추인이지만 거리감이 줄어드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관찰자 주제에 주문을 했다. 그래도 같은 세계에 있지만 결코 같을 수 없는 세계에 서로가 존재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