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윤의 취식로드] 음악만 있던 ON-AIR
[백승윤의 취식로드] 음악만 있던 ON-AIR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0.08.20 09:42
  • 수정 2020.08.20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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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윤의 취식로드] 길 위에서 취재하고, 밥도 먹고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백승윤 기자 sybaik@laborplus.co.kr

추측건데, 성장기에 생각만큼 키가 자라지 않은 건 새벽까지 라디오를 끼고 살았던 탓일 테다. 무엇보다 사연을 통해 청취자와 밀접하게 소통하며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라디오를 좋아했다.

3월의 어느 날, 여의도 KBS 본관 라디오 생방송 스튜디오로 향했다. 학창시절에 '라디오 키즈'로 살았던 만큼, 취재 내내 들뜬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프로그램을 여는 곡이 30여 초 흐른 뒤, 음향감독이 음량을 줄였다. PD가 손을 들어 보내는 큐 신호가 떨어지자 DJ는 대본으로 눈을 옮겨 작가가 쓴 오프닝 멘트를 읽었다. "매일 그대와, 조규찬입니다."

청취자들이 문자와 애플리케이션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매일 그대와'에 사연을 보내며 신혜원 작가의 손과 눈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시간 동안 밀려오는 사연은 1,000여 개. 쏟아지는 활자 속에서 DJ에게 전달할 사연을 낚아챘다. 박종성 PD는 음악프로그램 담당 경력이 길진 않지만, 30년이 넘은 PD 경력으로 생방송의 흐름을 감지했다. 중심을 잃지 않고 음향감독, 작가, DJ를 조율하며 라디오 생방송의 선장 역할을 해나갔다.

황성렬 음향 감독은 배경음악과 효과음 볼륨을 조절하고, 광고를 배열하며 생방송이 막힘없이 이어지도록 엮어냈다. 청취자와 가깝고도 먼 라디오 음향 감독은 청취자가 미처 알지 못하는 부분에서 세심한 변화를 만들어 청각을 자극한다. 작가, PD, 음향감독, DJ가 합심해서 ‘매일 그대와’를 매끄럽고 안정적으로 청취자에게 전하고 있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공동의 창작물이다. 모든 미디어 분야에서 내놓는 결과물은 여러 노동자 간 협력으로 만들어진다. 업무의 동시성이 중요하기에 사람 한명 한명이 귀하다. 그러나 방송계에서는 이따금 그 사실이 잊히는 게 현실이다.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불리는 방송계에는 고용형태에 따라 계급이 나뉘고, 차별이 발생한다.

방송계 차별은 지난 2월 유명을 달리한 CJB청주방송 고 이재학PD를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났다. '14년 근속에 월급 160만 원'으로 대표되듯, 각종 차별과 폭력, 갑질 등을 겪었다. 언젠가 '나만의 쇼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꿈과 방송에 대한 애정 하나로 부조리를 버티다 결국 삶을 마감한 것이다. 비단 CJB청주방송뿐 아니라 방송계에는 여전히 제2, 제3의 이재학PD들이 존재한다. 고 이재학PD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김혜진 전국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집행위원장은 "그간 여러 사업장에서 차별을 봐왔지만 방송계는 특히 심각하다"고 말했다. 

방송계 노동자들은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방송계에서 벌어지는 비인격적 취급을 비추는 말이다. 현장에선 불합리한 노동 환경 탓에 방송계로 유입되는 인력이 줄었다고 한다. 협업으로 이뤄지는 방송 제작 특성상 간과해선 안 될 부분이다. 방송계 갑질 때문은 아니지만, 최근 사람 없는 방송계를 보여주는 일이 발생했다. 라디오에 출연한 기자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18일 CBS가 사업장폐쇄 조치를 했다. 청취자와 얘기를 나눌 DJ도, 음향을 조절할 기술자도, 청취자를 웃고 울릴 글을 쓸 작가도 없어 주파수 93.9와 98.1에서는 종일 음악만 흘렀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방송계가 돌아봐야 할 건, 현장에서 잊고 지내는 사람의 가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