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님의 동선] 존중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다
[강한님의 동선] 존중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있다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09.21 03:10
  • 수정 2020.09.21 0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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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 움직이는 방향을 나타낸 선] 자주 만나고 싶어요.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지난 9월 13일 MBC는 취재기자와 영상기자 직군 공개채용을 위한 필기시험 및 논술시험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출제했다.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고소인을 피해자라고 칭해야 하는가, 피해 호소인이라고 칭해야 하는가(제3의 호칭이 있다면 논리적 근거와 함께 제시해도 무방함)’

해당 문제는 시험이 끝난 후 온라인 카페 등을 통해 2차 가해라는 지적을 받았다. 고 박원순 서울시장 고소인의 호칭을 ‘피해자’로 정리한 상황에서 법률 용어도 아닌 ‘피해 호소인’이라는 명칭을 다시 논하는 것이 문제로서도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다.

민주노총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성평등위원회는 성명을 통해 “이 사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이미 MBC 내부에서도 토론을 통해 ‘피해자’로 보도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린 사안”이라며 “그런데 마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문제를 출제한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심각성을 간과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며 사측의 사과와 후속대책을 요구했다.

피해자 측 대리인인 김재련 변호사도 14일 방송된 KBS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서 강한 유감을 표했다. 김 변호사는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과 똑같아진다. (MBC는) 응시자들이 일정한 시간 동안에 살아있는 피해자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 사람을 뭐라고 부를지 본인들이 결정하는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이라며 “피해자는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고 고소했고, 우리 법에서는 그 단계부터 피해자로 명명하고 보호 규정을 적용하는 절차를 지원받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의도를 가지고 질문을 하고 논제로 던지는 것 자체가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다”고 했다.

이와 같은 비판에 MBC는 공지를 통해 공식 사과했다. 향후 새로운 논술 문제를 통한 재시험을 치르겠다는 입장이다. MBC는 “논술 문제 출제 취지는 언론인으로서 갖춰야 할 시사 현안에 대한 관심과 사건 전후의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을 보기 위함이었다”며 “문제 출제로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우려에 대해 사려 깊게 살피지 못했다. 이번 일을 자성의 계기로 삼아 성인지 감수성을 재점검하고, 신뢰회복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피해자와 피해 호소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더불어민주당도 고 박원순 서울시장 피해자를 향해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가 사과한 전적이 있다. 호소에는 ‘하소연’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피해자 측 변호사에 따르면 피해자는 이미 고 박원순 시장을 성폭력 혐의로 고소할 마음을 먹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고 한다. 피해자가 충분한 증거자료를 제출했고,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피해자에 대한 호칭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명백한 2차 가해다. 문제로서의 가치 여부를 떠나 논술 문제 자체가 2차 가해가 된다면 하지 말았어야 했다.

피해 호소인과 가해 지목자라는 호칭이 원래 쓰여 왔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애초 이 표현은 피해자 보호를 위한 취지이지, 혐의가 밝혀지기 전까지 피해자의 증언을 그저 가능성으로 여기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저번 칼럼이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다루는 마지막 글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MBC가 기어이 나를 화나게 했다. MBC는 사과문을 개재한 당일인 14일,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여성 혐오 논란으로 한 달간 방송을 쉬고 있던 만화가 기안84의 복귀를 결정했다. MBC의 반성이 ‘쉬운 사과’라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이유다. 피해 여성은 너무 많은데, 세상은 가해자의 언어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