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가 뭐 다른 꿈 있나… 좋은 작품 만드는 게 내 꿈이지”
“도예가가 뭐 다른 꿈 있나… 좋은 작품 만드는 게 내 꿈이지”
  • 이동희 기자
  • 승인 2020.10.09 00:00
  • 수정 2020.10.0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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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불로 30년’… 손끝에서 피어난 문산 김영식의 삶과 노동
[인터뷰] 전승도예가 문산 김영식

글 이동희 기자 dhlee@laborplus.co.kr ㅣ 사진 송창익 기자 cisong@laborplus.co.kr

문산 김영식
문산 김영식.

가업계승자, 명장, 8대 사기장, 조선백자종가, 무형문화재….

문산 김영식(52) 앞에 붙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수식어 하나하나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때도 있지만 그 무게만큼이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이름들이다. 이렇게 불리기까지 오로지 흙과 불로만 점철된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여러 수식어 중에서도 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전승도예가’가 아닐까. 그의 먼 조상인 1대 김취정이 240여 년 전 사기장 일을 시작한 이후 현재 8대에는 김영식이 이름을 올렸다. 그는 경북 문경시 관음리에서 조선요(朝鮮窯)를 운영하고 있다.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빚고, 다음 세대인 아들에게 이를 물려주는 것이 그의 사명(使命)이자 숙명(宿命)이다.

김영식은 자신의 일을 ‘천직(天職)’으로 여긴다. 자신이 하는 일을 두고 천직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도자기를 만든다는 건 창작으로서의 예술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일 반복해야 하는 노동이기도 하다. 흙을 배합하고, 물레를 차고, 불을 때는 등의 여러 공정이 그의 하루를 채운다. <참여와혁신>은 흙과 불로 30년을 살아온 전승도예가의 삶에서 노동의 모습을 엿보았다.

170여 년의 역사,
조선요와 망댕이가마

9월 10일 오전 10시 조선요를 찾았다. 조선요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마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요에는 김영식 씨의 작업장, 작품 전시장, 박물관, 살림집이 한 데 모여 있다. 조선요 옆을 흐르는 계곡과 사과밭을 볼 수 있는 정자는 덤이다.

제일 먼저 발길이 향한 곳은 작업장이다.<사진1> 마침 이날은 이틀 전 가마에 넣은 도자기를 꺼내는 날로, 한 달여 동안 지은 ‘농사를 수확’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최근에는 한 달에 한 번 불을 땔까 말까 하기 때문에 일부러 날을 잡지 않는 이상 보기 힘든 풍경이다.

작업장에서 눈길을 끄는 건 역시 ‘망댕이가마’다. 앞에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마라고 소개한 그 가마다. 선조 3대 김영수가 1843년(조선 헌종 9년)에 축조해 현재까지 그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마로, 현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35호에 지정돼있다.<사진2>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망댕이가마는 최근까지 불을 때다가 보존을 위해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 조선요 작업장에 있는 망댕이가마는 2000년대 들어 김영식 씨가 새로 축조한 것이다.

망댕이가마는 겉으로 보기엔 둥그런 흙더미가 여러 개 이어져 있는 모습인데, 불에 그슬려 얼룩덜룩하고 곳곳에 균열도 보인다. 하지만 망댕이가마의 진수(眞髓)는 가마 내부에 있다. 내부를 살펴보면 사람 장딴지 모양의 진흙 덩어리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진흙 덩어리가 망댕이다.<사진3> 이 망댕이로 이루어진 반구형의 가마칸 3~8개를 나란히 연결한 것이 바로 망댕이가마다. 내부를 구경하는 것도 잠시, 가마 안에 가득 찬 뜨끈한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나오자 김영식 씨는 “그것도 많이 식은 기라. 진짜 뜨거울 때는 숨도 못 쉴 정도야”라는 말을 건넸다.

이제는 도자기를 꺼낼 시간. 두툼한 목장갑을 낀 김영식 씨가 가마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아내 채영옥 씨가 도자기를 받을 준비를 한다.<사진4> 영옥 씨에게 이렇게 매일 같이 일하시는 거냐고 묻자 “저는 새경 없는 머슴입니다”라는 웃음기 가득한 대답이 돌아왔다. 김영식 씨가 덧붙인다. “(도자기를) 받아도 줘야 하고, 날라도 줘야 하고 손발이 맞아야 같이 일하거든요. 도자기를 만드는 건 백 프로 제가 다 하고 뒷손질이나 이런 건 집사람이 도와주죠.”

가마에서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커다랗고 새하얀 달항아리다. 하나가 나오는 듯하더니 연이어 다섯 개가 나왔다. 똑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높이도, 넓이도, 곡선도 미세하게 다르다. 꺼내기 전까지는 어떤 작품이 나올지 만든 자신도 알 수 없는 게 도자기다. “이번에는 도자기가 아주 잘 나왔네요. 어떤 때는 나오면 (좋은 작품이 안 나와서) 엄청나게 깨요.” 다행히 이번에는 아주 잘 나왔다. 채영옥 씨도 “최근에 꺼낸 것 중에 제일 잘 나왔어”라며 맞장구친다. 달항아리에 이어 찻사발, 생활자기 차례다.<사진5> “엄청 예쁘게 나왔어! 이거 봐요!” 채영옥 씨가 양손에 다완(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사발)을 하나씩 들고 소리친다. 분홍빛을 띤 다완에는 학이 그려져 있다.<사진6>

마지막 도자기까지 꺼내고 밖으로 나온 김영식 씨는 땀에 흠뻑 젖었다. 나오자마자 물 한 잔 들이키더니 작업장 한편에 있는 수돗가로 향한다. 찬물로 더운 몸을 식히고 다시 몸을 움직인다. 도자기를 꺼냈다고 다 끝난 게 아니다. 손질과 포장이 남았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아서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도 한참 걸려요.”

흙 만지는 일이
천직이 되기까지

김영식 씨의 어린 시절, 조상 대대로 내려온 망댕이가마터는 그가 언제든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였다. 주변에는 늘 흙이 가까이 있었고, 그 흙을 장난감 삼아 놀았다. 아버지(7대 김천만)가 도자기 빚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머리가 크면서 아버지 일을 도왔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장손인 네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가업을 계승했다고 선언한 시기는 1989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다.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에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장손으로서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소명 의식보다는 생계 잇기가 먼저였다. 김영식 씨는 그때를 회상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웠어요. 다행히 집에 땅은 있었는데 그걸로 먹고 살기는 어려웠지. 나는 농사일도 안 해봤고. 그래서 도자기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그전까지는 혼자 해본 적이 없어서 특기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어깨너머로 본 게 있었으니까.”

형편이 금방 나아지지는 않았다. 흙과 나무 살 돈이 없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거래하던 고객이 찾아왔다.

“그때 그분도 내 수준을 아니까.(웃음) 고급자기는 못 만들겠구나 했겠지. 생활자기나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몇 번 넣으셨는데 그걸로 생활비를 조금씩 마련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실력이 많이 늘었죠. 흙도 배합해보고, 불도 때보면서. 근데 말은 이렇게 해도 그 당시 그릇 보면 형편없어. 그래도 그런 과정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싶어요.”

그렇게 시작한 일이 돌아보니 30년이다. 흙만 만지며 앞만 보고 걸어온 세월이다. 도자기 말고는 단돈 만 원을 벌어보지 못했다는 그는 전승도예가라는 책임감과 더불어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도 지니고 있다.

“30년 진짜 금방 가더라고요. 하루하루 힘든 시간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도자기를 빨리 익힌 게 아무래도 곁에 아버지가 안 계셨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가 계셨으면 농땡이 좀 부렸겠지. 게으름도 피우면서.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어차피 내가 이 길에 뛰어들었고 가업을 이었으니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흙 만지기를 참 잘했구나. 이게 내 천직이구나.”

도자기를 빚고, 굽고, 칠하는 ‘나의 일’

- 보통 직장인들은 주5일을 일하잖아요. 이 일은 그런 대중이 있나요?

제가 쉬고 싶을 때 쉬죠. 근데 어릴 때부터 어른들한테 일과 중에 하루 목표량을 반드시 채워야 한다고 배웠어요. 별일 없는 한 매일 일하는 거죠. 예전에 문하생들이 있을 때는 일요일에 쉬었어요. 저야 계속 일해도 상관없는데 문하생들이 쉬어야 하니까요. 그 덕에 저도 일주일에 한 번씩 쉬었죠. 지금은 문하생이 없으니까 일요일에도 일합니다. 도자기가 가마 안에 들어가면 좀 쉬는 정도죠.

이게 꼭 돈을 벌어야겠다, 일이 너무 많다를 떠나서 일하는 게 편하니까 이렇게 하는 거죠. 여기가 시골 산골이라 할 일도 없어요. 일하면 시간이 잘 가죠. 무엇보다 일을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해. 일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있어서. 남들은 안 쉬고 어떻게 그렇게 일하냐고 하는데 나는 이렇게 일하는 게 편해요.

- 오늘 가마에서 도자기 꺼내는 모습을 봤는네, 불은 보통 얼마 만에 한 번씩 때나요?

올해 내가 불을 몇 번 땠나. 오늘이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그래요. 한 달에 한 번을 못 때는 거죠. 많이 땔 때는 1년에 13~14번 정도 때죠. 사실 지금도 굉장히 많이 때는 겁니다. 남들은 1년에 불 2~3번 때기 바빠요.

- 만드는 건 매일매일?

매일매일 만들죠. 사실 말이 쉽지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외로운 직업입니다.(웃음) 매일매일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게 생활 리듬이기 때문에 깨지면 힘들지. 일을 안 하더라도 작업장에 있어야 해. 그러면 일은 안 해도 일할 준비는 해. 혼자 하는 일이고 남들이 안 보니까 요령 좀 피워볼까 생각하는 순간 진도가 안 나가요. 우리 일은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손님 중에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어요. 우리 집은 전화 안 하고 와도 된다고. 왜? 늘 작업하고 있으니까.

- 하루의 시작은?

보통 아침 7시 정도에 집에서 나와요. 그렇게 아침에 작업장 들어가면 오후 5시 30분~6시까지 채우고 나오죠. 특별한 일 없는 한 계속 일만 하는 겁니다. 하루에 10시간은 일하죠. 물레에 딱 앉으면 점심에 밥 먹을 때 잠깐 엉덩이 떼요.

- 혼자 일하면서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그게 처음부터 가능하던가요?

어휴, 처음에는 갑갑증이 나서 죽죠.(웃음) 일어나고 싶어서 다리에 쥐가 나요. 밖에 나가서 놀고 싶고, 술도 먹고 싶고 그런 마음이 굴뚝같지. 근데 그것도 어느 정도 극복을 하니까 마음이 안정되더라고. 이 일은 내 숙명이다, 참아야 한다 하고.

이 일이 노동이죠. 제조업이고 가내수공업이니까. 물론, 다른 제조업보다는 반경이 좁기는 하지만. 근데 이걸 노동이라고 생각하고 힘들게 일하면 안 돼. 이렇게 표현하는 게 어떤가 싶기는 한데 스릴을 느끼면서 일을 해야 해. 그래야 힘이 안 들어. 어차피 해야 하는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웃으면서 해야지. 근데 나도 그런 마음은 간절한데 하다 보면 잘 안 돼.(웃음)

- 지난 30년 동안 한길만 걸어왔습니다. 도자기 만드는 일이 어떤 일인지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런 질문은 또 처음 받아보네.(웃음)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하나…. 도자기를 만들 때 중요한 건 완성도죠. 결국 완성도를 어떻게 표현하고 높일 수 있느냐를 고민해야 해요. 나 자신과의 싸움이죠. 집념이 없으면 이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끊임없는 노력과 집념이 있어야 그나마 내가 원하는 작품에 가까운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네, 굳이 말하면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나 자신이 흐트러지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어요. 저도 30년간 그릇을 만들었지만 불 땔 때마다 불안합니다. 똑같은 흙, 똑같은 기술, 똑같은 유약을 발라도 결과가 그때그때 다 달라요. 기계적인 장치는 아무것도 없고 제 경험과 눈을 믿어야 하니까. 방법은 하나에요. 모든 공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는 것. 뭐 하나 귀찮다고 소홀히 하면 티가 납니다.

- 도예가로서 남은 꿈이 있다면?

도예가의 꿈이 뭐 있겠습니까. 벼슬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이제 30년 됐어요. 처음 시작할 때는 정말 형편없었죠. 10년쯤 지나고 ‘아 이제 좀 괜찮다’ 싶었는데 또 시간 지나서 보면 형편없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10~20년쯤 지나서 지금 작품 보면 형편없다고 하겠죠. 지금도 미비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흙 만지는 사람이 뭐 다른 꿈이 있겠습니까. 좋은 작품 만들어내는 게 꿈이죠.

 

조선요(朝鮮窯)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4길 212
전화 : 054-571-2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