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직장’은 어디에요?
‘신의 직장’은 어디에요?
  • 정우성 기자
  • 승인 2008.10.2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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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노동자에 대한 마녀사냥식 일방책임론 경계해야

지난 22일 시중은행장들은 외화차입금에 대한 정부 보증에 대해 ‘최근의 금융시장 불안과 관련한 은행권 결의’라는 자구책을 발표했다. 은행장을 포함한 임원들의 연봉 20% 삭감과 직원들의 임금 동결, 중소기업 대출만기 연장, 주택담보대출 만기 연장과 분할 상환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이번 자구책 발표 이후 각종 경제신문과 국감장에서는 은행권을 ‘신의 직장’이라 부르면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주문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은행,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장은 평균 연봉 9천만 원으로 방만한 운영을 일삼았다며 은행들에 대한 성토장이 되었다.

실제 국책은행을 비롯한 시중은행의 평균연봉이 대기업과 비슷하거나 높은 수준인 것은 사실이다. 일반 시민들은 각종 수수료 부과로 수익을 높이고 있는 은행들에 대해 오래전부터 불만을 표시했으며 오전 9시 30분에 개점해서 오후 4시 30분에 폐점하는 은행의 직원들이 이렇게 높은 연봉을 받고 다양한 복지혜택을 누리는 것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을 은행 직원들에 대한 책임문제로 집중하는 것이 전체적인 위기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 보인다. 우선 이들이 어떠한 업무 환경에 있는지 정확히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시간 하루 12시간은 기본

시중은행에 재직하고 있는 직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개점에 맞춰 오전 8시경 점포에 출근해 개점까지 오전 회의를 진행한다. 오후 9시 30분부터 고객 방문에 따른 업무를 진행하고 오후 4시 30분 창구 업무를 종료해야 하지만 늦게 도착한 고객들로 인해 대략 오후 5시 창구업무를 종료한다.

이후 시제 정리 및 전표 마감으로 1~2시간을 소모하면 곧바로 고객관리 업무에 돌입한다. 이때 연체관리, 대출심사 자료 정리 등이 진행되며 실적을 위해 우편물 발송(DM)이나 전화상담(TM) 등이 계속된다. 이러한 업무가 종료되면 퇴근이 가능하지만 지점 실적이 미비할 경우 곧바로 지점장 주최로 대책회의에 들어간다. 고객관리계획(CRM)을 정리하고 실적 향상을 위한 계획서를 제출한다.

이러한 업무가 모두 끝나는 시간은 빠르면 오후 9시 늦으면 오후 11시가 된다. 대략 하루에 12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간외수당을 지급하는 은행은 거의 없다.

그런데 연체관리, 고객관리 등은 낮에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금융노조 하나은행지부 조선학 부위원장은 “창구 업무가 진행되는 시간에 대출 심사 자료 정리, 고객 관리를 못하게 한다”며 “요즘은 CS(고객서비스)가 강화돼 창구 업무 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하면 지적을 당해 손님이 없어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늘어만 가는 ‘자폭계좌’

은행 직원들의 업무는 이것만이 아니다. 직원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은행에서 판매하는 상품에 대한 할당량이 주어지고 판매실적에 따라 업무고과가 결정되기 때문에 하루하루 피말리는 경쟁 대열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판매 할당량은 개인별로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점(점포)별로 할당된다. 은행에서 판매하는 상품은 대략 예금, 적금에서부터 방카슈랑스, 펀드, 카드 등이며 새로운 상품이 개발될 때마다 약 10개 이상의 판매 할당량이 지점에 내려간다.

여러 은행 직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 달에 내려오는 할당량은 대략 12~15개 상품이며 이는 120~150계좌를 새로 개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점의 인원이 보통 10~12명 수준이라면 한 명의 직원에게 할당되는 양은 평균적으로 10개 정도의 신규 계좌가 되는 것이다.

은행 직원을 가족이나 친구로 두고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예·적금이나 펀드, 신용카드의 개설을 요구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카드는 신청만 했다가 나오면 가위로 잘라라”는 이야기에 신청했다가 발급되면 휴지통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한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평균 카드 수가 4장을 넘어선 이유이기도 하다.

K은행 김모 부장은 “은행 창구에 근무하며 외부 영업까지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관계로 창구를 방문하는 손님 중심으로 판매에 집중한다”며 “그러나 은행에 오는 손님은 편차가 커서 한마디로 재수가 좋으면 실적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 결국 나머지 물량 해소는 가족이나 지인관계를 이용하며 이마저도 해결하지 못하면 본인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적이 부진한 지점의 경우 대책회의에서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직원 본인의 계좌를 개설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실적을 맞추지 못해 본인이나 가족이 개설하는 계좌를 은행업계에서는 일명 ‘자폭계좌’라고 부른다.

S은행 박모씨는 “평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저만 하더라도 자폭계좌로 한 달에 적어도 150만원 정도 들어간다. 다른 직원들도 대부분 이 정도”라며 “지점으로 내려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지점장부터 고과 반영에 불이익이 생기니까 직원들을 닦달할 수밖에 없고 이를 채우기 위해 실적 좋은 직원에게 사정해서 실적이 나쁜 직원에게 밀어주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금융불안으로 이중고에 시달려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은행 직원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고객의 입장에서야 은행 직원들이 장황하게 상품 설명하며 판매해 놓고 주식 폭락과는 상관없이 수수료 챙기면서 이익을 낸 것이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할 수 있다. 특히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KIKO(Knock-In, Knock-Out)로 막대한 손해를 본 중소기업은 위험성에 대한 충분한 경고 없이 마구 상품을 판매한 은행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은행 직원들은 자신들이 판매한 상품이 고객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과 함께 펀드 수익률 급감으로 자신들의 자폭계좌도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대부분 은행 직원들이 새로 나온 상품이 출시되면 은행측에서 지점을 통해 일명 ‘밀어내기’를 시도하니까 실적을 맞추어야 하는 직원들은 일단 자신들이 가입한 경우가 많다. 그 이후에 고객에게 이를 선전하고 판매에 나선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손해는 어디다가 하소연할 곳도 없는 입장이라 속이 까맣게 탄다고 말한다.

S은행의 이모씨는 “주위 직원들 중 천만원 정도의 손해를 본 직원이 있지만 화를 낼 수도 없고 누구를 붙잡고 이야기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한숨만 쉬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각 점포 VIP 담당의 경우 대부분 온 가족의 자산을 관리하는 형태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산 가치 감소 부분도 클 수밖에 없다. 인적 네트워크 관리가 핵심인 VIP 관리에서 직원들은 개인 돈을 이용해 일정 부분을 보상해주는 상황도 종종 발견된다.

여기에 판매 상품의 경우 은행 마음대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에 대해 금융감독원 등 정부의 허가가 떨어져야 판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물환 펀드, KIKO 등은 정부가 장려한 상품이기도 해 은행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함을 감출 수 없다.

W은행 김모씨는 “밖에서 보기에는 임금·복지조건, 근무환경 등이 좋아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노동강도가 매우 높다”며 “판매 실적이 임금과 연동되어 있어 초과달성하면 봉급을 더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회사 입장에서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적이 좋지 않은 직원의 봉급을 깎아 초과달성한 사람에게 주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직원 상호간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식 책임추궁은 도움 안돼

일부 언론과 정치권이 고임금을 이유로 은행 직원에 대한 십자포화를 쏟아내고 있지만 이는 경제위기 해소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다. 오히려 직원들의 반발을 불러와 협력을 통한 문제해결의 여지조차 꺾어놓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금융노조 하나은행지부 조선학 부위원장은 “도대체 신의 직장이 어디인지 알려 달라”며 “구성원들이 전부다 그렇게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연봉에 대해서는 남의 일처럼 들리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직원이 많다”고 밝혔다.

금융노조 양병민 위원장은 “금융위기로 고객들이 손실을 보고 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면 여러 경비절감 차원에서 임금을 동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있다”며 “그러나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전 정부에서 메가뱅크를 만들겠다며 발행한도를 늘리고 과당경쟁을 유발한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며 “금융노조에서도 여러 차례 은행간 과당경쟁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은 반성한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결국 어느 한쪽 일방의 문제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 어느 한쪽을 몰아붙여 두건을 씌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