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럽게’ 기록하는 청년 여성 노동
‘소란스럽게’ 기록하는 청년 여성 노동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0.12.10 00:14
  • 수정 2020.12.10 0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로의 일터를 공유하며 얻는 용기
‘항상 있어 왔던, 잘 몰랐던, 어쩌면 놀랍고 약간은 불편한’

[리포트] 소란이 세상에 내놓는 청년 여성 노동 이야기

‘청년’ ‘여성’ ‘노동’이라는 키워드에서 각자가 떠올리는 기억은 조금씩 다르다. 각양각색의 청년 여성 노동을 설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단어들을 한데 묶어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려는 프로젝트가 있다. 청년 여성 노동기록프로젝트 ‘소란’이다. 소란이 기록하는 청년 여성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청년 여성 노동기록프로젝트 소란 운영자 현정(사진 왼쪽), 태린(사진 오른쪽)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청년 여성 노동기록프로젝트 소란 운영자 현정(사진 왼쪽), 태린(사진 오른쪽)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청년 여성의 노동을 딱 반으로 자를 수 있나요?
반은 청년이고 반은 여성인 것도 아니고”

발단은 한 카카오톡 채팅방에서였다. 소란의 운영자인 태린현정은 아르바이트를 끝낸 새벽 친구들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 접속했다. 일터에서의 여러 상황이 메신저를 통해 오갔다.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태린과 현정은 문득 ‘나도 겪었고 내 친구도 겪은’ 우리의 노동을 기록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올해 4월 청년 여성 노동기록프로젝트 ‘소란’이 시작됐다.

“알바 갔다 와서 있었던 일 이야기하면서 징징댔거든요. 제가 징징대니까 다른 친구도 징징대요. 힘든 걸 털어놓는데 ‘아 이렇게 이야기하면 뭐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소한 이야기로 치부되잖아요.”

“청년 여성 노동이라고 하면 뭔가 노동의 하위 카테고리인 것 같았어요. 우리가 하는 것은 다 노동인데 아무도 노동으로 보지 않아요. 또 여성이라서 받는 차별, 비정규직 노동자라서 받는 차별이 중첩돼서 큰 부담으로 다가와요. 이 소란스러운 이야기를 밖에 내놓으면서 세상을 소란스럽게 해보고 싶었어요.”

현정
현정

현정은 ‘사소함’으로 평가받는 여러 고충들을 드러내고 싶었다. 처음에는 알음알음 인터뷰를 진행했다. 보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해보고 싶다는 결심 후에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 등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청년 여성으로 노동하는 태린과 현정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20대 대학생인 그들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사람들은 청년 여성 노동이라고 하면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젊음과 미모를 이용해 잠깐 일하는 것만 생각해요. 실제로는 시민단체 상근자, 바이럴 마케팅, 보육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하는 청년 여성들이 있어요. 저는 물류센터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건데 또래 여성들이 되게 많았어요. 거긴 정말 사람을 쥐어짜서 일하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 총알배송이 아니라 총알착취라고 농담하기도 했어요.”

“분위기 살리기 위해서 온 여성 알바, 또는 일시적인 부품으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업무량이나 업무강도는 정규직과 다를 바 없는데도. ‘사장님 마인드’로 일해야 하지만, 고용은 매우 불안정해요. 애초에 부려먹고 무시하기 편한 애들이라고 생각해서 청년 여성을 채용하는 거 같아요.”

현정은 아무도 청년 여성을 노동자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터에서 겪는 성희롱과 성추행은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었다. 일하는 청년 여성은 그저 젊은 여성으로 소비됐다. 노동은 지워지고 ‘젊은 여성’만 남았다. 배려와 친절로 포장된 무시 속에서도 사근사근함을 장착해야 했다.

“어린 여성은 어디 가도 대상화를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건가…. 성희롱 성추행은 기본이고. 서비스직에서도 컴플레인이 들어오는 게 확실히 많아요. ‘어 쟤는 싸가지 없게 한다’, ‘야 너는 입술이라도 바르고 오지. 왜 그렇게 해서 와 보기 안 좋게’. 근데 같은 시간대의 남자 알바한테는 절대 안 그런다는 거죠. 무시와 멸시, 반말은 일상적이에요.”

“코로나19로 20대 여성들이 10만 명이 넘게 실직을 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뭔가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우리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제일 먼저 잘려도 상관없는 사람들이고. 우리가 일하는 건 잠깐 스쳐지나가는 일일 뿐이고.”

태린
태린

태린도 자신이 살아내고 있는 노동자로서의 삶을 말하고 싶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궁금했다. 그래서 소란은 페이스북 페이지와 브런치, 인스타그램을 통해 여러 직종의 청년 여성 노동자 인터뷰를 공개했다. 처음 소란의 설명글은 ‘20대 여성 비정규 노동’이었지만, 지금은 ‘청년 여성 노동기록프로젝트’로 정의한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다. 청년의 기준을 넓게 잡고, 정규직 노동도 포함시켰다.

“30대의 정규직 여성분이 소란을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죠. 20대 비정규직에 갇힐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은 뒤늦게 했어요. 최근에는 초등 교사 인터뷰를 했어요. 사회에서 볼 때는 여자들에게 좋은 직업이고, 안정적이라고 이야기를 하잖아요. ‘교사는 나중에 애 낳아서 기를 때 편하다. 일찍 퇴근하고 방학도 있다’는 인식도 있어요. 그래서 교대에 여자들이 많이 몰리기도 하죠. 하지만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서, 노동자로서의 투쟁은 우리가 몰랐던 부분인 거예요.”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꾸밈노동·성희롱의 피해자’ 이렇게만 정의를 하잖아요. 물론 그런 일이 빈번하고, 소란에서 인터뷰한 대부분이 겪은 문제이기도 해요.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일하는 사람으로 존재해요. 집에 올 때의 풍경이 좋아서 일을 계속 하러 간다는 사람도 있고, 맨날 진상 손님에 시달리지만 그걸 다 해결했을 때의 뿌듯함이 나를 노동하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딱 하나의 상으로 우리의 노동을 정의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소란의 궁극적인 목표예요. 힘들게 쓰러져가는 어떤 20대 여성들로만은 보이고 싶지 않아요.”

“청년 여성으로 노동한다는 건
투쟁의 연속이에요”

“일터에서의 차별이나 성범죄가 없어야 내가 신고를 안 할 텐데. 법이 먼저냐 인식이 먼저냐 이런 걸 따질 때가 아니죠. ‘야 우리는 최저임금도 주고 주휴수당도 주잖아. 우리만한 데가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곳이 많아요. 원래 줘야 하는 건데. 근로기준법이 최소한의 기준이 아닌 것 같잖아요. 요즘 입법기관에서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최대한 의견 들어보는 척 하려고 이것저것 열잖아요. 사실 있는 법도 제대로 안 지키면서.”

“요즘 청년정치, 청년 노동 등의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득권이 정의하고 있는 ‘청년’의 삶에 우리를 끼워 맞추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청년 노동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당신이 이 시대의 전태일이다’ 같은 말보다는, 우리가 직접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소란을 시작한 이유도 거기에 있고요.”

노동법은 지켜지지 않았고, 부당한 일이 벌어졌을 때 안심하고 찾아갈 수 있는 곳도 부족했다. 태린은 “일터에서 성폭력을 당하면 다른 성별의 사람이나 모르는 노무법인에 찾아가서 말하기 어렵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며 “노동조합을 포함한 전문가집단이 조금 더 청년 여성에게 열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동하는 청년 여성은 항상 있어왔는데, 노동의 주체로 여기진 않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하는 거죠.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서 받은 부당한 대우나 여성 노동자이기에 겪은 차별, 거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한 이야기, 일을 하며 힘들었던 순간, 그럼에도 일을 해서 기쁘고 뿌듯했던 이야기. 어떤 모습이든 존재하고 버티는 것만으로 대단한 투쟁이라고 생각해요. 그 모습들을 계속해서 기록하고 싶어요.”

“청년 여성으로 노동한다는 건 차별과 고정관념에 맞서는 투쟁의 연속인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씨앗이 아닐까요.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편함, 어려움 등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아, 내가 과하게 예민해서 불편했던 게 아니구나’, ‘이렇게 노동하면서 사는 나의 삶이 잘못된 게 아니구나’,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구나’라고 누군가 생각할 수 있다면요.”

소란은 청년 여성 노동자가 ‘말할 공간’이 되고자 한다. 소란을 찾아온 작은 용기들은 차곡차곡 모이는 중이다. 소란이 풀어내는 글은 당사자에게는 ‘나’의 이야기이고, 누군가에겐 지나간 시절이다. 이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불안정한 노동과 성적 대상화는 그들이 ‘청년’, ‘여성’, ‘노동자’이기 때문이었다. 이 중 무엇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다. 어느 시대나 나이와 성별로 인한 일터에서의 차별은 만연했다. 청년 여성 노동자만의 언어로 풀어놓는 노동 이야기가 많아져야 하는 이유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