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
“대한민국 경제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
  • 안상헌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 승인 2008.11.07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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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불균형 해소책은 짱돌?
희망 잃은 세대를 향한 따뜻한 메시지

안상헌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

지난 91년, 시골집에 사는 노부부의 겨울 일상을 보여 주며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다는 며느리의 따뜻한 멘트로 큰 인기를 모았던 경동보일러의 광고가 오랜만에 부활했다. 예전의 따뜻한 마음씀씀이는 그대로지만 이번엔 보일러가 시골집 구들장이 아닌 도심 한 복판에 놓여 있다.

마음을 데우는 보일러

이번 새 광고는 총3편으로 만들어졌는데 생활 속에서 마음이 싸늘하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우선 ‘시험’편을 보면 시험을 망친 딸과 딸의 성적표를 들고 있는 엄마가 등장한다. 이 때 싸늘하기만 한 이들 모녀 사이로 “얼어붙은 성적표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라는 멘트가 흐르며 ‘따뜻한 세상을 꿈꿉니다’라는 자막이 뜬다.

이 외에도 ‘생일’편에선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린 남편과 아내의 냉랭한 신경전 사이에 “싸늘한 집안분위기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라고, ‘부모’편에선 막내딸을 시집보낸 부모의 허전한 마음을 배경으로 “막내의 빈자리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라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보일러란 건 따지고 보면 ‘물을 가열해 고온, 고압의 증기나 온수를 발생시키는 장치’에 불과하지만 생각하는 관점에 따라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울 수도 있는 것이다. 이십여 년 전 시골집의 쌀쌀한 날씨가 아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느끼는 ‘체감’온도를 아이디어로 풀어 낸 점이 이 광고의 관전 포인트다.

88만원 세대의 희망 보일러는 어디에?

요즘 말 그대로 ‘체감’되는 것이 또 있다. 바로 우리나라 경제다. 실제 몸으로 느끼는 경제 상태를 말하는 ‘체감경기’가 어느 해보다 춥다. 그 중에서 가장 추운 사람들이 바로 ‘88만원 세대’다.

88만원 세대란 소장경제학자와 전직 기자가 우리나라의 20대가 처하게 될 현실에 대해 분석한 동명의 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책에서 88만원이란 비정규직의 평균임금인 119만원에 20대 급여의 평균비율인 74%를 곱해서 나온 수치다.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이 숫자는 20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주소를 대변하는 슬픈 키워드가 되고 있다. 프로야구 투수 방어율과 견줄 만한 낮은 학점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골라가며 취직을 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지금의 20대는 무한경쟁시대를 살고 있다.

이력서에 단 한 줄이라도 더 적기 위해 서류전형이라도 통과하기 위해 스펙(specification : 구직자들 사이에서 학력, 학점, 영어시험 점수 등을 합한 것을 이르는 말)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규직으로 안정적으로 사회에 데뷔하기란 이들에게 점점 힘든 통과의례가 되고 있다.

이런 세대간 불균형은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독점화가 진행되면서, 자기 보호 능력이 없는 지금의 20대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고 저자들은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유럽의 1000유로 세대(Generazione 1000 euro :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하며 1000유로, 월 100만원 가량의 소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는 신조어), 미국의 빈털터리 세대(Strapped : 대학 학자금과 결혼 자금, 아이 양육비 등을 융자 받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부채를 짊어진 채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젊은 세대) 현상과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빠르고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세대 균형을 되찾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토플 점수가 아니라 바리케이드와 짱돌이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과연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야만 할까? 이런 싸늘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 일간지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이들 88만원세대의 80%가 ‘나의 미래는 낙관적’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20년 뒤 자신의 삶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고(84.2%),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89.8%)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열악한 조건에서도 뜨거운 20대의 희망, 우리 사회와 경제가 힘을 내서 이들의 마음속에 보일러를 놔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들의 희망이 데워지도록, 그리고 식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