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대한항공 승무원
코로나19와 대한항공 승무원
  • 정다솜 기자
  • 승인 2021.01.29 19:02
  • 수정 2021.01.30 1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 나은 환경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인터뷰] 편선화·정지은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항공업계는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다. 날개 꺾인 항공사들은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며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항공사의 위기는 협력업체로 번지며 산업 전반이 충격으로 흔들렸다. 이 가운데 대한항공 노동자들은 그나마 유급휴직으로 지금의 위기를 버티고 있다. 

‘그나마’라는 말 뒤엔 어떤 얼굴들이 있을까? 대한항공 객실승무원들은 그나마 반 토막 난 임금을 받는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유급휴직’이니 앓는 소리 말라는 ‘불행의 비교’ 앞에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힘들단 말 대신 혼자 앓고 있는 동료들과 함께 목소리 내고 싶다는 편선화, 정지은 대한항공 객실승무원을 지난 11일 만났다.

(왼쪽부터) 정지은, 편선화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왼쪽부터) 정지은, 편선화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승무원, 첫 꿈을 이루다

첫 꿈이었다. 항공기 조종사를 꿈꿨던 동생이 알려준 직업이 승무원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재밌었다. 상상은 자라 꿈이 됐다. 학창 시절 품어온 꿈은 인하공업전문대학교 항공운항과 입학으로 이어졌다. 22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특채로 대한항공 승무원이 됐다. 승무원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편선화 씨는 이제 19년차 베테랑 승무원이다. 

13년차 대한항공 승무원 정지은 씨도 그랬다. ‘승무원이 돼보는 건 어떻겠냐’는 고등학교 친구의 제안에 인하공업전문대학 진학을 고민했다. 하지만 ‘거긴 아무나 못 간다’는 선생님 말씀에 4년제 대학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게 한 번 포기했던 승무원의 꿈을 다시 만나게 된 건 대학 4학년 때다. 취업 준비 중 유니폼 입어볼 기회를 준다는 승무원 학원 광고가 눈에 띄었다. 상담 한번 받으러 갔더니 준비가 늦었단 말을 들었다. 이번엔 포기하지 않았다. 학원에 등록했다. 착, 착, 모든 게 맞아떨어졌고 그해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천직이십니다”

꿈은 삶이 됐다. 삶처럼 되게 가기 싫고, 너무 비행하기도 싫고, 잠도 안 오고, 일어나 세수할 때까지 출근이 싫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러다가도 공항에 도착하면 좋았다. 출국장엔 헤어지는 애틋함이, 입국장엔 만남의 기쁨이 흘렀다.

무엇보다 승객에게 잘해주기만 하면 되는 내 일이 좋았다. 내 미소가 무표정이던 승객의 얼굴로 옮겨갔을 때, 내 일을 하는 것뿐인데 승객들이 고맙다고 할 때, 해외로 입양 가는 아이가 내 품에서 안정을 찾을 때마다 기뻤다. 입양 가는 아이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하게 됐다. 승객을 통해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봤고, 내 세계도 넓어졌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순간도 뿌듯했다. 미국 서부를 향하던 보잉 747 비행기에서 탄 냄새가 나던 날이었다. 도착지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기장의 ‘다이버트(Diverted·긴급회항)’ 결정이 났다. 정지은 씨에게 남은 시간은 20분. 신속하게 움직였다. 승객을 모두 앉히고 안전벨트와 창문 체크, 갤리(GLY·비행기 주방) 정리 등을 10분 만에 마쳤다. 안전 점검을 한 뒤 최종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기내에서 갑자기 쓰러진 승객들을 응급처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던 편선화 씨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건가?” 스스로 물었다. “저는 육아휴직으로 쉴 때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쉬면서도 집에 있는 건 제 체질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미소로 듣던 정지은 씨가 답했다. “천직이십니다.”

(왼쪽부터) 정지은, 편선화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왼쪽부터) 정지은, 편선화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불확실한 스케줄에 ‘무력’ 

자부심으로 일한 만큼 내 노동이 존중받지 못할 땐 참기 어려웠다. 승무원은 월 단위 스케줄에 따라 근무하는데 특히 대기일에 갑자기 배정되는 스케줄 탓에 일정이 자주 어긋나고 보장된 휴가마저 마음껏 쓸 수 없는 상황이 힘들었다. 

저녁 7시 넘어서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다음 날 아침 비행을 가야 했다. 사실상 한 달 내내 스케줄이 바뀌었지만 거부할 권리는 없었다. 편선화 씨는 “내일 당장 어느 나라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지 알 수 없었다”며 “내 앞날에 내 의지가 반영될 수 없다는 무기력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그는 “입사할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며 “특히 승객 수 대비 승무원 수를 조정하는 정책이 생긴 뒤부턴 스케줄 변동이 더 심해졌다”고 말했다. 

빡빡하고 불확실한 스케줄 탓에 보장된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다. “못다 쓴 휴가를 일부분 돈으로 돌려받고 올해 코로나19로 4월 한 달 내내 휴가를 썼는데도 남은 휴가가 50일이 넘는다”는 정지은 씨는 “내 휴가가 이렇게 많은데 왜 못 쓰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에 분노가 커졌다”고 이야기했다.

둘은 2018년이 한계였다고 말했다. 승무원들이 연달아 과로로 쓰러졌단 뉴스가 쏟아지고 정부도 관련 정책을 내놓던 시기였다. 여기에 조현민 대한항공 당시 전무의 ‘물컵 갑질’이 터졌다. 

대한항공 승무원들은 그해 5월 가면을 쓰고 촛불집회로 뛰쳐나갔다. 두 달 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산하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가 만들어졌다. “집회 나가서 발언하고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온 거예요.” 노동조합이 뭔지도 몰랐던 편선화 씨는 이제 노조 여성부장으로서 목소리를 낸다. 정지은 씨는 객실조직부장이 됐다. 혼자 하는 불평을 넘어 노조를 통해 목소리를 내니 느리지만 현장이 조금씩 바뀌었다. 무엇보다 무력감이 해소됐다. 

코로나19로 다시 커진 불확실성

지난해 초, 코로나19로 공항이 멈추면서 불확실성은 다시 커졌다. 3월부터 휴가가 많이 남은 사람들부터 휴가를 소진했다. 이후 전 직원 순환 유급휴직에 들어갔다. 정비, 일반직 등 다른 직종은 6개월 유급휴직 중 3개월 일하고 3개월 쉰다면, 승무원은 한 달 일하고 5개월 쉬는 식이다. 회사는 무급휴직 신청도 따로 받았다.

임금은 반 토막 났다. 유급휴직인 경우 통상임금만 나오는데, 승무원은 다른 직종에 비해 통상임금이 적어서다. 그간 기본급이 낮은 월급은 비행수당으로 채워왔다. 

대한항공 승무원 7,000여 명의 상황이 각자 다르겠지만 대부분 수입에 맞췄던 소비를 줄여갔다. 보험 깨기는 물론 공항과 접근성이 좋은 강서구 방화, 송정, 발산 일대에선 집을 합치는 승무원들이 눈에 띄었다. 보증금이라도 빼서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다. 정지은 씨는 “방화, 송정 쪽 오피스텔을 둘러본 적이 있는데 정말 작다. 누울 자리 하나밖에 없는 방이 많다”며 “후배들 중 세를 못 버티고 합치는 경우가 있단 이야기에 정말 충격이었다”고 했다. 

관계도 위축됐다. 편선화 씨는 “수입이 줄어드니까 편하게 나가질 못한다. 누굴 만나면 뭐 하나라도 사주고 싶고 한데 다 돈이다. 그럴 처지가 안 되다 보니 위축되기도 한다”며 “또 밖에 나가서 이야기 들어보면 다른 직종은 이렇게까지 영향을 안 받는 것 같으니 나만 힘든가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나마 낫다’는 말 뒤,
혼자 숨게 되는 승무원들

유급휴직인 대한항공이 그나마 낫다는 사회적 인식은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더 깊숙이 숨게 했다. 바쁜 일이 곧 삶이었던 승무원들의 어려움을 말하는 기사에 ‘그거라도 받는 게 어디냐’, ‘더 힘든 사람 많다’, ‘그래도 승무원 하려는 사람 많다’며 불행을 비교하는 댓글을 볼 때면 숨이 막혔다. ‘그럼 진짜 나가 죽으라는 소린가? 그래야 뭐라도 얘기할 수 있는 건가?’ 절망이 싹텄다.

지난해 말에는 극단적 선택을 한 승무원의 소식이 들려왔다. 편선화 씨는 엉엉 울었다. “세상 더럽다”는 욕이 나왔던 그는 “이건 개인적인 일이 절대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고 다 같이 힘을 내서 이겨내야 하는데, 혼자 끙끙 앓다가 그런 선택을 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특히 연차가 낮은 승무원들이 마음에 쓰였다. 편선화 씨는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특히 젊은 친구들이 좋은 것만 올리는 SNS 문화를 경험해서인지 힘든 일이나 안 좋은 일을 말하는 데 익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노조를 통해서든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도움 받을 방법 자체를 모르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두 번째 꿈, 더 나은 일터 물려주기

코로나19로 인한 불확실성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두 사람은 이제 두 번째 꿈을 꾸고 있다. 자부심으로 청춘을 보낸 대한항공에서 이제 후배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

편선화 씨는 “내가 입사한 이후로 꿈을 안 꿨더라. 그런데 노조를 하고 코로나19도 겪으면서 다시 꿈을 꾸는 것 같다”며 “더 나은 환경을 후배들에게 만들어줘야겠다는 것이 두 번째 꿈이 됐다”고 했다. 정지은 씨도 “나도 사실 승무원이 되고 꿈을 안 꿨는데 2018년에 대한항공 집회에 나가고, 우리 노조가 생기면서 지금 보니 새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더 나은 환경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변화를 담보한 목소리의 힘을 경험한 둘은 사회적 관심, 공감, 이해는 물론 승무원 스스로 ‘자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지은 씨는 “산업 전반적으로 구조조정 움직임이 있고 정말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시기”라며 “지금 필요한 건 회사의 주인인 우리가 우리 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편선화 씨는 “물리적으론 비행기를 타고 하루에 지구 한 바퀴씩 돌지만 승무원들은 좁은 세상에 살고 있다”며 “나도 대한항공 기업문화가 폐쇄적이고 수직적이란 걸 밖에 나와서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승무원들을 빨리 깨우는 것이 숙제인데 내 의지론 안 되는 부분이 있단 걸 느꼈다”면서도 “한두 사람이 더 목소리 내는 건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의 힘이 생긴다. 더 많은 동료들과 함께 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더 많은 목소리의 수는 구체적이다. 편선화 씨는 “허무맹랑하지만 만 명 조합원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지은 씨가 “이야, 꿈 크다. 이천, 삼천만 돼도 좋겠다”며 웃었다. 편선화 씨는 “이삼천이 어렵지, 만 명은 쉽다”고 자신했다. 그가 어떤 에너지로 첫 꿈을 이뤘을지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후배들을 위해 더 나은 일터를 만들겠다는 꿈 끝엔 더 큰 꿈이 자리하고 있다. “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없다. 물려줄 건 사회밖에 없다. 이 사회가 나아져야 내가 뭐라도 주고 갈 수 있는 거다. 더 나은 사회를 물려주고 싶다.” 편선화 씨는 동료로부터 ‘오버한다’는 핀잔을 들었던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