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형공으로 44년, “그냥 열심히, 순리대로 여기까지 온 거지”
목형공으로 44년, “그냥 열심히, 순리대로 여기까지 온 거지”
  • 이동희 기자
  • 승인 2021.02.03 20:25
  • 수정 2021.02.03 2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계천·을지로 일대 마지막 목형(木型) 업체 ‘대우목형’을 만나다
[인터뷰]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목형(木型).

나무 ‘목’과 거푸집 ‘형’을 쓴다. 나무로 만든 모형을 말한다. 주물(鑄物) 작업에 쓰이는 거푸집이 바로 이 목형이다.

서울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에 자리 잡은 ‘대우목형’은 이 일대에 마지막 남은 목형 업체다. 이곳을 운영하는 장종일 씨는 40년 넘게 목형공으로 살아왔다. 우리가 흔히 장인(匠人) 또는 명인(名人)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대우목형’ 네 글자에 담긴
그의 기술과 자부심의 시작

장종일 씨(63)가 목형공의 삶을 시작한 건 18살 주물공장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첫 직장으로 주물공장을 선택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렸을 적 친구들에게 썰매도 직접 만들어줄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고 나무로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18살 소년이 공장에서 먹고 자며 기술을 배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종일 씨보다 나이도, 기술도 많은 선배들은 공장의 천장만큼이나 높았고, 실수할 때마다 내려치는 매질은 매서웠다. 기술이 곧 돈이고 경쟁력이었기에 기술을 쉬이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장종일 씨가 기억하는 70년대는 그랬다.

그래도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을 익히고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즐거웠다. 남들보다 느리고 더딘 실력에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던 또래 동료가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때도 묵묵히 일하고 하나하나 깨우쳐 나갔다. 언젠가는 내 자산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틈나면 책방에 가 설계도 보는 방법을 공부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실력으로 동료를 앞질렀을 때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나보다 앞선 친구들은 6개월 배우니까 기계를 돌리더라고, 나는 기계 돌리기까지 3년 걸렸는데. 그때 내가 받은 월급이 3만 원이었는데 그 친구들은 6만 원을 받았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술을 터득하니까 내가 앞섰지.”

그렇게 10년. 독립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첫 주물공장과 헤어졌다. 이후 주물공장을 차려 운영했다. 장종일 씨 표현으로는 ‘잘 나갔던’ 때다. 그러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부도를 맞았다.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공장에 낙담하는 것도 잠시, 목형을 전문으로 하는 ‘대우목형’ 문을 열었다.

“대우그룹 회장이었던 김우중 씨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잖아. 그 말처럼 내가 내 공장을 열면 이름을 대우로 짓고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해보자고 예전부터 생각했지. 누구는 이름이 너무 센 거 아니냐고 하는데, 나는 그런 거 안 믿어. 여태까지 30년 넘게 대우목형이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잖아.”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목형,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일…
전수자 없어 사라지는 것 마음 아파”

앞만 보고 달려왔더니 목형공으로 산 세월이 벌써 44년이다.

장종일 씨의 남다른 기술력 덕분일까. 다른 업체에서는 거절당한 작업이 대우목형에만 오면 뚝딱 해결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언젠가는 졸업 작품 제출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대학생이 급하게 찾아와 제발 도와 달라며 작업을 맡긴 적도 있었다. “다른 곳에 3개월 맡겼는데 안 된다고 거절당하고 나한테 찾아왔더라고. 내가 일주일 만에 해줬지. 지금까지 다른 데서 못한다고 했다는 거 나한테 맡기면 다 해줬어.”

장종일 씨가 아쉬운 건 이렇게 갈고 닦은 기술을 전수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 “우리 기술이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내 후배들도 이제 나이가 오십이야.”

그동안 장종일 씨에게 기술을 전수받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열흘을 못 버티고 집에 가는 뒷모습만 남았다. “옆에서 볼 땐 재밌어 보이지. 근데 이게 앉아서 배울 수 없는 직업이라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거든. 대패질도 해야 하고, 여러 종류의 *끌도 다 사용할 줄 알아야 해. 단기간에 깨우치기 힘들어서 고전(苦戰)해야 하는 일이지. 젊은 친구들이 힘들어하더라고. 전수해주고 싶어도 본인들이 못하겠다는데 어떡하겠어.”

*끌 : 망치로 한쪽 끝을 때려서 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겉면을 깎고 다듬는 데 쓰는 연장

비단 장종일 씨만의 고민은 아니다.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기술자들이 모두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장종일 씨는 기술자들이 기술을 전수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이 일대의 기술자들은 일감을 소개해주며 상부상조했던 가족들이다.

“여기서는 탱크도 만든다는 게 그냥 나온 말이 아니야. 없는 것 없이 다 만들 수 있어. 여기는 손님이 일을 맡기러 왔을 때 내 분야가 아니면 소개해주는 게 잘 되어 있거든. 하나의 공동체지. 누군가는 필요로 하는 일인데 이런 곳이 하나하나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장종일 대우목형 사장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정년 없는 ‘나만의 기술’,
몸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파”

장종일 씨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만드는 물건이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손님이 맡기는 물건은 그때그때 다 달라. 물건이 다양하니까 만드는 재미가 쏠쏠하지. 맨날 똑같은 것만 만들면 지루해서 못해.” ‘새로움’은 장종일 씨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물건이 잘 팔리거나 맡긴 물건이 잘 나왔다며 손님이 감사를 표할 때도 즐겁다.

이제는 어떤 주문이 들어와도 도면만 보면 ‘이렇게 하면 되겠군’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장종일 씨는 이렇게 되기까지 대단한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열심히 한 거 말고는 없어. 순리대로 여기까지 온 거지. 안 될 때도 있어. 그때는 고민하다 보면 구상이 떠올라. 남한테 의지하지 않고 그렇게 다 해결해왔어. 내 기술이 곧 자존심이니까.”

장종일 씨는 목형 외에 일로는 단돈 1원도 벌어본 적 없다. 앞으로도 그럴 테니 몸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과거 번듯한 회사에 다녔던 친구들도 지금 나이가 되니 자신만의 기술로 정년 없이 일할 수 있는 그를 부러워한다. “대학 다니고 대기업 다녔던 내 친구들 지금은 집에서 다 놀고 있어. 나 만나면 기술자가 최고라고 부러워해. 나는 정년이 없잖아. 하기 싫을 때까지 이 일 하는 거야.” ‘천만 재산이 서투른 기술만 못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