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노래인생, 남진이 말하는 ‘운명’ ​​​​​​​
56년 노래인생, 남진이 말하는 ‘운명’ ​​​​​​​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1.03.11 09:30
  • 수정 2021.03.1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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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은 내 몫, 그 이상은 하늘이 만들어준 것”
​​​​​​​“고난 끝에 축복이 있다”… 실패에 낙담만 하진 말라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이 모든 것이 운명인 것 같아요.”

한국 트로트계의 살아있는 전설. 가수 남진(75)은 자신의 노래인생을 ‘운명’이라 표현했다. 그에게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후회 없는 노력과 우연이 빚어낸 결과에 가깝다. 남진은 매순간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하늘은 남진을 도왔다. ‘천운(天運)’이었다. 영화 같은 그 순간이 쌓이면서 남진의 우연은 운명이 됐다. ‘우연’과 ‘인연’에 유독 감사하는 남진에게 그가 쌓은 업적과는 걸맞지 않는 겸손함이 엿보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노래로 대한민국을 울고 웃게 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1월 31일 오후 4시 경기도 광주시 팔당호 근처에서 진행했다.

 

“그때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못했죠”

남진은 ‘타고난 예술인’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포함한 예체능 전반에 취미와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남진이 처음부터 트로트 가수를 꿈꾼 것은 아니다. 예체능에서도 가수보다는 배우 쪽이었다. 즐겨 부르고 듣는 것도 트로트보다는 미8군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었다.

무엇보다 ‘호적 팔 각오’ 없이는 연예인을 생각할 수도 없는 시대가 있었다. 남진의 아버지, 고 김문옥 씨는 제5대 국회의원이자 목포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했고, 목포일보의 발행인이기도 했다. 부유했지만 엄하디 엄한 가정에서 남진은 자랐다.

“지금은 연예인을 사회에서 관심 있게 보고 젊은 친구들이 지향하는 직업이지만, 그때는 연예인 한다고 하면 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에요. 오죽하면 우리 아버지가 풍각쟁이, 굿쟁이라고 그랬겠어요. 엄한 집안은 호적에서 빼고요. 하여튼 그때는 음악을 좋아만 했지 ‘가수가 돼야 겠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남진이 가수로 데뷔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목포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과 함께 들린 서울 우이동의 어느 클럽에서 남진의 노래를 눈여겨 본 밴드마스터가 그의 전화번호를 따갔다.

“몇 달 만에 진짜 전화가 왔어요. 그 분(밴드마스터) 만난 게 첫 번째 인연이에요. 그 분 안 만났으면 내 운명이 어떻게 됐을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 분이 한동훈 선생님을 소개해줬죠.”

남진은 약 1년 반 동안 한동훈 음악학원에 들어가 트레이닝을 받고 1965년 1월 ‘서울푸레이보이(Seoul Playboy)’를 발표했다. 재즈를 곁들인 스탠다드 팝 장르였다. 1950년대 미8군 밤무대에서 활동하다 인기를 얻은 패티김, 한명숙, 현미, 최희준 등의 가수가 부르던 장르였다.

“우연한 기회에 노래를 하게 됐는데 가요를 몰랐어요. 매일 팝송만 들었으니까요. 우리 고등학교 때가 나미자 선생님 시대예요. 그런데 나는 ‘삐빠빠룰라’밖에 안 들었으니까. 듣고 ‘뭐지?’ 이렇게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미8군에서 노래하다가 가수된 분이 많았어요. 그 중에 남자 가수가 최희준 선배예요. 그 분 노래는 들으니까. 이게 맛이, 기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희준 선배를 모창하기 시작했어요. 최희준 모창대회하면 내가 금상 탈 자신이 있어요. 그렇게 가수의 길을 가게 된 거죠.”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트로트’가 다가오다

하지만 서울푸레이보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최희준과 너무나 똑같았던 게 화근이었다. 야심만만하게 데뷔했던 남진은 낙심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남진은 1년 후 한동훈 작곡가의 소개로 만난 오아시스레코드와 함께 다시 도전했다. 남진을 포함한 신인가수 4명이 3곡씩 1개 음반을 만드는 형식이었다. 3곡 중 남진이 마음에 들어 했던 곡은 ‘연애0번지’였다. 1966년 12월 발매 이후 연애0번지에 대한 반응은 서울푸레이보이 때와 사뭇 달랐다. 그런데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난데없이 ‘금지곡 처분’을 받았다.

“그때는 무서웠어요. 왜색. 퇴폐. 금지곡은 무조건 대한민국에서 두 번 다시 못 나와요. 그때는 그랬어요.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연애0번지였는데 ‘0’자 들어갔다고 해서 퇴폐라고 하더라고요. 진짜 이유는 모르죠. 곡이 금지돼서 활동을 관뒀죠.”

더군다나 연애0번지를 준비할 무렵인 1966년 7월 남진은 부친상을 당한다. 4년 여간 병상생활을 했던 고 김문옥 씨는 세상을 뜨기 몇 달 전에서야 아들이 가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철썩 같이 대학에서 공부만 하는 아들인 줄 알았다.

“아버님은 한 4년을 병원에 계셨어요. 문 밖에 못 나올 정도니까 학교만 다니는 줄 알지 가수 준비하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다가 TV에 아들놈이 나오는 걸 본 거예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래서 불려갔죠. ‘예끼 놈. 이 세상에 하고 많은 직업 중에 할 게 없어서 풍각쟁이를 하려고 하냐. 당장 목표 내려가서 몸방하라’라고 하셨죠. 우리 공장 문지기 하라고요. 그러고 몇 달 있다가 돌아가셨어요.”

두 번째 실패는 더욱더 아팠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주 두 병씩 먹고 뻗어 버리기”가 일상다반사였다. 그렇게 지내는 와중에 남진의 어머니는 연애0번지와 함께 수록된 곡 중 ‘울려고 내가 왔나’가 좋다며 남진에게 재기를 권했다. 트로트여서 녹음 당시 내지키지 않았음에도 곡 수를 채우기 위해 마지못해 부른 노래였다.

“상심해 있었는데 어머님이 오셔서 ‘진아, 나는 판 나온 것 중에서 그 트로트 노래가 좋더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노래 한 번 해봐’ 하시면서 용돈을 주고 가셨어요. 그런데 그게 대박이 나버렸어요. 우리나라 전체에서 최고 히트곡으로요.”

얼마 지나지 않아 ‘울려고 내가 왔나’도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한차례 히트 이후 금지곡 지정은 남진을 더욱 성공가도에 오르게 했다. 방송에서 들을 수 없으니 레코드판이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남진을 찾는 행사장은 셀 수가 없었다. 이렇듯 ‘트로트 가수’로서 남진의 인생은 우연과 실패와 성공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시작됐다.

“결국 인생은 다 만남이잖아요?”

‘울려고 내가 왔나’(1966) 이후 남진은 ‘가슴 아프게’(1967), ‘우수’(1967), ‘마음이 고와야지’(1968) 등 히트곡을 연이어 만들어낸다. 남진이 1968년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한 건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남진은 제대 후 곧바로 ‘님과 함께(1971)’를 발표하면서 3년의 공백을 무색케 했다. 1970년대가 남진과 나훈아의 시대라고 하지만, 가수로서 명성을 떨친 건 남진이 먼저였다.

오르막 이후에는 내리막이 있듯 남진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크게 1980년대 초 미국 생활 복귀 후와 1990년대 건강악화 등이었다. 남진을 슬럼프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또다시 ‘인연’이었다.

“나이 들고 장가가고 하니까. 인간이 슬럼프가 있잖아요? 미국 가서 몇 년 살다 오니까 슬럼프가 왔어요. 그때 ‘빈잔(1982)’이라는 노래로 다시 컴백했어요. 박춘석 선생님이 몇 년의 공백을 채워주신 거예요. 그러다 연예인은 인기가 영원하지 않으니까 또다시 슬럼프가 와요. 몸도 나빠지고요. 그 당시 노래를 관둬야 할까 생각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어요. 그때 ‘둥지(1999)’의 작곡가 차태일 씨를 만나요. 당시 무명의 작곡가였고 정말 우연히 만난 거예요. 남들이 만류해도 끝까지 둥지를 밀고 나갔는데 대박이 났죠. 방송국 PD도 성공할 줄 몰랐대요. 이후에 차태일 씨와 인연이 돼가지고 ‘나야 나(2008)’, ‘이력서(2012)’가 다 나왔죠.”

위기 때마다 남진을 구해주는 ‘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남진은 “하늘이 다 만들어준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노력은 기본”이라고 덧붙인다. 노력은 나의 몫이고 그 이상의 결과는 모두 하늘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젊을 때 성공해서 교만했다”는 남진은 오히려 지금 관리를 더 철저히 한다. 체력관리를 위해 수영과 자택 앞 천변 걷기를 빼먹지 않는다. 바쁜 스케줄 중에도 기량 유지를 위해 하루 3~4시간씩 차 안에서 ‘노래방앱’으로 연습한다. 그 때마다 한동훈 작곡가와의 인연이 떠오른다. 청년 남진은 발성 연습이 싫었다. 굳이 안 해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왜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한동훈 작곡가는 호흡부터 발성까지 차근차근 남진에게 가르쳤다. 그 때의 가르침은 남진의 노래인생에 단단한 뿌리가 됐다. 서울푸레이보이가 인기를 얻지 못했음에도 그가 한동훈 작곡가를 ‘하늘이 주신 인연’이라고 감사히 여기는 이유다.

남진은 자기 노력 이상으로 찾아오는 ‘우연과 인연’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혹여나 인연이 다해도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남진 본인의 ‘운명’을 덤덤히 받아들일 뿐이다.

“‘울려고 내가 왔나’가 히트 친 건 운이에요. 틀림없잖아요? 물론 노래를 잘 불러야 하는 건 기본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부르면 뭐해요? 운이 안 따르면 못해요. 물론 노력 없이 행운을 바라는 사람은 도둑놈이죠. 결국 인생은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부모와 형제를 만난 것도 내가 한 게 아니잖아요? 하늘이 다 만들어준 거죠. 또 때가 돼서 인연이 여기까지라고 하면 살다 죽는 거고요. 나이를 먹어보니까 그것을 더 간절히 알겠더라고요. 잘 못 만나면 악연이고 좋게 만나면 출세하잖아요? 인생은 참 그런 거 같아요.”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노래는 영(靈)이 부르는 것”

한국 트로트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려도 남진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흔들릴 때가 있다. 남진 역시 ‘인간’이기에 때때로 외로움과 두려움이 찾아온다. 남진은 매일 밤 기도로 하루를 마친다. 남진에게 노래는 목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목소리도 결국 생각이 내는 것, 즉 ‘영(靈)’이 내는 것이라고 남진은 말한다.

그는 매일 밤 그가 지닌 영(靈)의 감성이 더 깊어지기를 신에게 기도한다. 신에게 하는 기도이지만 남진은 그 기도를 “나의 삶을 생각하고 정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남진은 기도로써 본인의 삶을 다잡는 힘을 얻는다. 그렇기에 남진은 스스로 당당하다. 인간이기에 느낄 수밖에 없는 두려움도 잠시 뒤로 미뤄둘 수 있다.

“인간이라는 게 나이 들면 병들고 다 떠나야 하잖아요? 그거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 같이 화려한 생활도 해보고 인기도 가져본 사람은 일반 사람들보다 더 허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믿음이 있으니까 굉장히 큰 힘이 되요. 인생이 이런 거라는 걸 믿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더 열심히 일할 수 있고, 더 노력하고, 더 준비할 수 있는 믿음을 준 거예요.”

“노래는 결국 감성이에요. 감성은 안 보여요. 그렇잖아요? 목소리도 생각이 만들어주는 거예요. 결국 영(靈)이 움직이는 거라고 봐요. 얼마 전에 방송에서 혼자 4시간을 노래해봤어요. 내가 나를 보고도 놀랐어요. 내 나이에 이렇게 할 수 있나 하고요. 그런 게 영(靈)이라고 봐요. 결국은 내가 어떻게 내 삶을 생각하고 살아가느냐. 어떻게 정의하느냐. 그 싸움이죠. 장담하는데 그 싸움에서 나만의 힘으로는 못 이겨요. 이길 수가 없어요. 그 영(靈)이 있어야지만 이겨지는 것이지요.”

“고난이 축복입니다”

하지만 인생사가 흔히 그러하듯 노력을 많이 기울여도 운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성공보다는 실패라고 말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하지만 남진은 실패했다고 낙담만 너무 하지 말라고 전한다. 그에게 고난은 동시에 축복이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넘는 노래인생을 살면서 남진이 깨달은 한 가지 삶의 지혜다.

“경연대회에서 후배들이 떨어질 때 다 울어요. 떨어진 친구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고난을 잘 이기면 큰 축복이고 발전이에요. 저는 노래자랑 나가서 준준결승도 못 나가고 떨어진 적도 있어요. 지금 아무리 힘들어도 잘 이겨내고 견뎌내서 잘 받아들여야 해요. 내가 왜 떨어졌는지, 왜 더 잘하지 못 했는지 생각하면 10배 더 노력하잖아요? 그러면 그날 우승한 사람보다 10배 더 올라갈 수 있어요.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면 분명히 축복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