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는 멈췄지만, 삶은 멈출 수 없다
경기는 멈췄지만, 삶은 멈출 수 없다
  • 최은혜 기자
  • 승인 2021.03.11 09:28
  • 수정 2021.03.11 18: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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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중단으로 달라진 그들의 삶
국가가 운영하는 레저산업 노동자의 지속가능한 삶 고민해야

[리포트] 안개 속의 경마·경륜사업

코로나19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버렸다. 3밀(밀접·밀집·밀폐) 환경이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수의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면서 여가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코로나19로 인해 경기장에 모여서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나 팀을 응원하던 운동경기는 대부분 중단되거나 무관중 경기로 전환됐다. 경마와 경륜경기 역시 코로나19 확산 직후 경기를 중단했다. 경기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말 산업 종사자를 위해 한국마사회는 6월부터 무관중 경마경기를 시작했지만, 경륜경기는 코로나19가 잠시 소강세를 보이던 올가을을 제외하면 경기중단을 이어갔다.

말 산업 종사자와 경륜선수는 경기상금으로 먹고 산다. 경기가 중단되면 자연스럽게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다. 말 산업 종사자와 경륜선수는 오늘도 달리고 싶다. 강제로 경기가 중단되더라도, 이들이 계속 달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

김유승 한국경륜선수노동조합 위원장(왼쪽)과 신동원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동조합 위원장(오른쪽)이 각각 경륜선수 기본급 제도 도입과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 허용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김유승 한국경륜선수노동조합 위원장(왼쪽)과 신동원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동조합 위원장(오른쪽)이 각각 경륜선수 기본급 제도 도입과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 허용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코로나19로 달라진 삶의 궤적

2002년 경륜선수로 데뷔한 한기봉 씨는 지난해 여름부터 운동에 전념하지 못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경륜경기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20년 동안 경륜선수로서 자전거를 탔지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훈련을 하지 못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봉 씨는 중학생과 초등학교 5학년생, 두 자녀의 아버지다. 기봉 씨는 경륜경기를 위한 팀 훈련을 하는 대신 배달과 대리운전을 통한 생계유지에 전념하고 있다. 20년 동안 탄 자전거를 기봉 씨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경륜선수의 임금구조 때문이다. 경륜선수는 경기에 출전해 그 결과에 따른 상금을 임금으로 받는다. 경륜경기가 없다면, 임금 역시 없다.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경륜경기를 위해 수입 없이 몸만 만들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코로나19 터지고 처음 3~4개월은 운동에 전념했어요. 모아놓은 돈 까먹으면서요. 근데 애들이 크니까 수입 없이 모아놓은 돈만 까먹으면서 운동한다는 게 어렵더라고요. 배달이랑 대리운전을 시작했어요. 배달이랑 대리를 시작하니까 운동할 시간이 전혀 없네요. 훈련 못한 지 5개월 정도 된 것 같은데요?”

기봉 씨의 하루는 오전 9시에 시작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도 오전 9시에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하루 일과는 이전보다 더 늦게 종료된다는 점이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에는 오전 9시부터 11시 반까지 오전 훈련하고, 점심 먹고 2시부터 5시까지는 오후 훈련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하남시 소속이라 미사리에서 팀 훈련을 했어요. 지금은 똑같이 오전 9시에 하루를 시작해요. 오전 9시에 배달하러 나와서 저녁 7시 반이나 8시까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요. 그리고는 또 대리운전을 하러 가야하니까, 집에 와서 얼른 씻고 요기를 하죠. 그래서 한 8시나 8시 반부터 대리를 타면 하루에 한두 콜 정도 타고 집에 와요. 집에 오면 밤 11시 정도 되고요. 종일 이렇게 일해도 한 달을 살기 위해서는 아끼고 아껴야 해요.”

경륜선수인 기봉 씨의 하루 일과는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크게 변했다. 하지만 말 산업 종사자의 경우 코로나19 이전과 지금의 하루일과가 큰 틀에서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고광용 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말관리사지부장은 “코로나19가 터지고 한국마사회에서 ‘무고객 경마’ 그러니까 상생경마를 하고 있어 수입이 많이 줄었지만, 하루일과에서 큰 변화는 없다”고 설명했다. ‘살아있는 말’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고광용 지부장은 “경마가 없어도 말을 훈련하고 말의 건강을 체크해야 한다”며 “보통 오전 6시에 출근해 말을 운동시키고 마구간 청소와 부상당한 말 치료, 훈련, 장제 등의 업무를 11시까지 한다”고 설명했다. 오후에는 오전에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말 관리와 함께 서류 업무를 이어가는 게 말 조교사와 마필관리사, 경마기수 등 말 산업 종사자의 하루 일과다.

이해경 전국경마장마필관리사노동조합 정책실장에 따르면, 코로나19 이전에 비해 서울지역의 마필관리사 임금은 30% 정도 삭감됐다. 이해경 실장은 “오전 6시부터 오후 3시까지가 소정근로시간이지만, 마필관리사의 업무 특성상 잔업이 많았다”며 “코로나19로 한국마사회가 경영난을 겪게 되자 초과근무를 안 하거나 대체휴일을 쓰거나 시차출근제 등을 통해 소정근로시간만 준수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각종 수당이 사라지고 임금에 포함된 경마경기 상금이 줄어들면서 임금 삭감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퇴근 이후 배달과 택배 등 아르바이트를 통해 삭감된 임금을 메우는 마필관리사가 늘어났다.

불어나는 적자에 꺼내든
‘온라인 배팅’ 카드

코로나19로 경마·경륜경기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하면서 경마경기를 개최하는 한국마사회와 경륜·경정경기 허가권한을 가진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했다. 한국마사회에 따르면, 2020년 경마매출은 2019년보다 6조 2,700억 원가량 감소했다. 한국마사회의 당기순손실액도 4,300억 원대로 예상된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이 밝힌 2020년 경륜매출은 2019년보다 1조 3,600억 원이, 경정매출은 약 5,310억 원 감소했다.

결국 경마·경륜경기를 주관하는 기관인 한국마사회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은 경기장과 허가된 장외발매소(경마경기 장외발매소 30곳, 경륜경기 장외발매소 20곳)에서만 발권할 수 있는 승마·승자투표권의 ‘온라인 발매’ 카드를 들고 나왔다. 승마·승자투표권의 온라인 발매는 온라인을 통해 어디서든 경마와 경륜경기에 배팅이 가능하도록 하는 제도를 말한다.

현재 국회에는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를 허용하도록 하는 한국마사회법 일부개정법률안 4건과 승자투표권 온라인 발매를 허용하도록 하는 경륜·경정법 일부개정법률안 2건이 발의돼 있다. 6건의 일부개정법률안에서는 코로나19의 장기화로 경마·경륜경기가 정상적으로 열리지 못해 한국마사회와 국민체육진흥공단, 경마·경륜산업 종사자의 피해가 막심하기에 다중이 운집하는 현재의 승마·승자투표권 발매 형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삶 고민해야

승마·승자투표권 온라인 발매 허용에 대한 입장은 분분하다. 한국마사회와 한국마사회노조, 마사회전임직노조, 마사회경마직노조, 마필관리사노조, 한국경주마생산자협회 등은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역시 승자투표권 온라인 발매에 적극적이다. 승마·승자투표권 온라인 발매를 통해 온라인 불법도박을 막을 수 있고 경마·경륜산업을 통해 먹고 사는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다.

2월 15일,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 허용을 촉구하며 국회 앞 1인 시위에 돌입한 신동원 마필관리사노조 위원장은 “경마경기가 중단되면서 한국마사회뿐만 아니라 말 조교사, 마필관리사, 경마기수, 승마투표권 발매노동자 모두 타격을 입었다”며 “이들의 타격으로 말 생산 농가와 경주마 수의사, 사료업계, 장제사 등이 잇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말 산업의 연쇄적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안이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광용 공공운수노조 부산경남말관리사지부장은 “현재 상황에서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가 가장 좋은 대안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면서도 “그렇지만 미성년자의 접근 제한 등 이용자 보호 방안과 경마산업 특유의 무한경쟁체제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한국마사회가 먼저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유승 한국경륜선수노동조합 위원장 역시 고광용 지부장과 비슷한 의견을 냈다. 승자투표권 온라인 발매를 위해서는 먼저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벌어진 상금 격차를 줄여 경륜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승 위원장은 “사행산업으로 분류되는 경륜산업이 좀 더 국민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사업을 경륜선수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함께할 필요가 있다”며 이를 통해 경륜경기가 없어도 경륜선수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사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019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 등록된 자전거는 13만 대가 넘어요. 2010년엔 전국 10개 도시를 자전거 거점도시로 지정하는 등 자전거는 우리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요. 대부분 잘 모르시지만, 저희 경륜선수는 1년 동안 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아요. 이때 자전거 정비나 자전거 관련법에 대한 교육을 필수로 이수해야 해요. 전국에 있는 4만 2,000㎞의 자전거도로도 다 경험해봤죠. 경륜선수는 자전거 전문가입니다. 이런 자전거 전문가와 함께 자전거도로 활용법, 안전 강좌, 자전거 조종술, 체형별 자전거 세팅 등 국민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자전거 활용 방안을 알리는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승마투표권 온라인 발매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신동원 위원장 역시 김유승 위원장처럼 경마산업을 레저산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사업 구상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신동원 위원장은 “경마산업을 단순히 도박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고용을 창출하는 산업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마사회가 지난해 2월 발간한 2019년 ‘말산업실태조사’에 따르면, 2018년 기준 국내 말 산업에서 경마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0%가량 된다. 경마산업의 직·간접 취업인원은 1만 2,000명에 달하고 말 산업 전체로 확장하면 2만 5,000명의 노동자가 말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신동원 위원장은 “소규모 승마교육 같이 국민과 말 산업이 가까워질 수 있는, 또 그것을 통해 말 산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국마사회법은 한국마사회 설립을 통해 공정한 경마경기 시행과 말 산업의 육성에 관한 사업으로 축산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국민의 복지 증진과 여가선용을 위해 제정됐다. 경륜·경정법 역시 공정한 경륜 및 경정경기 시행을 통해 국민의 여가선용과 청소년의 건전 육성 및 국민 체육 진흥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동안 경마·경륜산업 등은 레저산업이 아닌 사행산업의 측면에서 접근·관리됐다. 그렇기에 경마·경륜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코로나19로 경마·경륜경기가 정상적으로 시행되지 못하면서 경마·경륜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어려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온라인 배팅’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온라인 배팅 역시 경마·경륜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다. 이는 경마·경륜경기 개최로 수입이 발생하는 현재의 구조를 탈피하지 못하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경기가 없어도 경마·경륜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삶은 이어져야 한다. 신동원 위원장의 말처럼, ‘고용을 창출하는 산업’이라는 관점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레저산업 노동자의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해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