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경영, 돌다리 두들겨보듯 가라
ESG 경영, 돌다리 두들겨보듯 가라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1.04.01 11:24
  • 수정 2021.04.05 13: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업은 결코 사회적 책임에서 멀어질 수 없다
지속적 이윤 창출에 매몰되기보단 근본적 이유에 집중해야

[리포트] ESG 경영? 이 또한 놓치지 말지어다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마치 유행이라도 되는 듯 ‘ESG’를 경영전략으로 걸고 나섰다. ESG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의 알파벳 첫 글자를 딴 단어다. 그동안 대다수의 기업은 경영전략을 수립하는 데 위 세 가지 요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경영과 관련해 회계·재무적 관점에 매몰돼 있던 탓이다.

그렇다면 지금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로벌 경영 환경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부터 시작해 미국까지 기업의 ESG 경영을 독려하고 있다. 글로벌 경영 환경의 큰 틀이 변화하는 가운데,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기업은 지속가능한 이윤 창출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제 막 출발선을 지난 ESG 경영전략에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지점은 무엇일까?

이미지 = 참여와혁신 디자인

[ 논픽션 ] 직장인 A씨의 하루 살펴보기

#1 몇 년 전부터 새벽배송을 즐겨 찾았던 직장인 A씨는 출근 전 현관문을 연다. A씨는 대형마트나 시장을 찾지 않게 된 지 꽤 됐다. 언제부턴가 문 앞에 놓여있던 누렇고 투박한 종이박스가 해당 업체의 보냉가방으로 바뀌었다는 걸 깨닫는다. 일일이 종이박스에 붙어 있는 박스테이프를 떼고 분리수거하던 일을 떠올린 A씨는 잘 됐다고 생각한다. 분리수거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근데 분리수거는 왜 해야 했더라? 맞다, 재활용을 위해서다. A씨는 주문한 상품의 파손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과도하게 쓰이는 포장재나 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품을 칭칭 둘러싼 에어캡을 벗겨내는 것도 일이다.

#2 A씨는 버스로 출퇴근한다. 서둘러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A씨 앞에 곡선이 도드라지는 전기버스 한 대가 도착한다. 버스를 보면서 ‘아기공룡 둘리’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기존 버스보다 넓은 내부는 물론이고 소음이 덜해 좋다.

#3 정시 출근한 A씨는 숨 고를 틈 없이 아침회의에 들어간다. 정오가 다 돼서야 끝난 회의 이후에는 팀 단위 점심식사가 남아있다.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은행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로 먼저 일어난다. 길어진 아침회의에 지친 탓인지 사거리 건물 지하에 있는 단골카페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에 달달한 조각 케이크를 먹었으면 싶다. 카페로 이동해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니 못 보던 일회용 포크와 빨대가 함께 나온다.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생분해성 플라스틱 소재 포크와 종이 빨대다. 포크는 일회용 포크와 별다른 차이가 없고, 음료를 오래 두고 마시는 경우가 아니라면 종이 빨대도 나쁘지 않다.

#4 고된 하루를 마치고 머리도 식힐 겸 거리를 걷기로 한다. A씨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거리가 종종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눈앞에 자판기처럼 큰 조형물이 보인다. 일반 자판기와는 다르게 녹색 불빛을 발한다. 가까이 가보니 조형물을 둘러싼 건 이끼다. 찾아보니 미세먼지와 이산화탄소 저감 효과가 있단다. A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서울주택도시공사 마곡지구 벽면 녹화 사례 ⓒ SH공사
서울주택도시공사 마곡지구 벽면 녹화 사례 ⓒ SH공사

ESG 경영, 왜 이제야 떠오르나

① 환경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전 세계가 기후변화에 주목해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첫 합의에 이른 건 1992년 5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채택된 유엔기후변화협약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 협약은 이산화탄소 배출 제한에 대한 강제성이 없었고, 탄소 배출과 관련한 내용을 정의하기 위해 1997년 12월 교토의정서가 채택됐다. 미국, 캐나다, 일본과 유럽연합(EU) 회원국을 포함한 37개국이 이행하기로 했던 교토의정서는 2008~2012년까지 1990년 탄소 배출 수준 대비 평균 5.2% 감축을 목표로 설정했다. 그러나 2001년 당시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30% 가량을 차지했던 미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이유로 탈퇴했고, 탄소 배출에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들이 불참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흐른 2015년, 파리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각국의 반응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탄소 배출에서 비롯된 온도 상승으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투발루나 몰디브와 같은 작은 섬나라들은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당시 참여했던 195개국은 앞서 교토의정서에서 설정했던 탄소 감축 목표를 넘어서 최초로 온도 상승 제한 목표에 합의했다. 지구 평균온도의 상승폭을 산업혁명기와 비교해 섭씨 2도, 더 나아가 1.5도까지 제한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에 기후변화에 관련한 정부 간 협의체인 IPCC는 온도 상승 억제를 위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이 필요하며, 2050년까지 현재 사용하는 총 전력 생산의 70~85%를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현재 유럽을 필두로 탄소중립을 선언하는 국가들이 점점 늘고 있으며, 지난 1월 임기를 시작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친환경·저탄소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언급하면서 전 세계적인 변화의 흐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사용하겠다는 RE100(Renewable Energy 100)에 가입하는 굴지의 글로벌 기업이 늘고 있는 추세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내 기업들도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와 지속적인 이윤 창출을 위해 RE100 선언에 동참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SK그룹 8개사(SK(주), SK텔레콤, SK하이닉스, SKC, SK실트론, SK머티리얼즈, SK브로드밴드, SK아이이테크놀로지)가 최초로 가입했다.

또한 해외 주요 연기금은 오염물질 배출 산업에 대한 투자를 지양하고 있다. 실제로 네덜란드 연기금의 경우 석탄 산업을 투자 대상에서 제외했다. 한국에서도 국민연금이 책임투자 전략의 일환으로 석탄 산업을 투자배제 대상 후보로 구분해 검토하고 있다.

윤순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기업의 거대 투자자인 연기금이 탄소중립을 선언하는 시대에 계속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은 좌초자산을 만드는 것이고, 이에 따라 투자에 대한 수익을 돌려받지 못할 것으로 인식하면서 투자를 지양하고 있다”며 “요새 주식시장에서 소액 주주들의 재생에너지 기업에 대한 투자가 많아지는 만큼, 소비자도 RE100 선언에 동참한 기업 제품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② 사회+지배구조

기후위기로 인한 세계적 변화와 함께 사회(Social) 및 지배구조(Governance)의 변화도 요구되고 있다. 경영 환경의 대전환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 또한 높아졌기 때문이다. 약 10년 전 경영의 화두로 떠올랐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CSR은 기업이 성장을 거치면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회계·재무적 책임에서 나아가 사회적 책임까지 고려한 경영활동을 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사회적 책임을 위해 고려되는 지표로는 고용, 노사관계, 지역사회, 다양성 존중, 기회 균등, 인권 등이 대표적이다.

윤순진 교수는 “(기업이) 노동조합 활동을 인정하고 노동자들의 작업 여건과 복지 등에 얼마나 관심을 갖느냐가 특히 중요하다”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 특히 노사관계에 주목한다.

노사관계의 변화는 기업의 지배구조 변화로 이어진다. 그동안 기업의 의사결정은 이사회에 참여하는 소수의 이사진에 의해 불투명하게 운영돼 왔다. 하지만 변화된 노사관계에서 목소리가 커진 노동계는 CEO 선임 절차와 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오너의 의사결정에 거수기 역할을 했던 이사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사외이사의 독립성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내 주요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주주행동을 촉구하거나 노동이사제 도입을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5년 11월 30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한 기후변화협약 총회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각국 정상들 ⓒ UNFCCC
2015년 11월 30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막한 기후변화협약 총회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각국 정상들 ⓒ UNFCCC

경영계, 이것만큼은 놓치지 말아야

경영계 역시 ESG 경영이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지난 3월 9일자 <한국경제>에 칼럼을 기고한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상근부회장은 “기업의 정기 주주총회에서 ESG 관련 안건이 오르고, 관련 조직을 신설·강화하는 등 기업들이 분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며 변화된 경영 환경과 기업들의 대응을 밝히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한 걸음 더 나아가 3월 11일 ESG와 관련한 글로벌 공시와 평가, 법적 쟁점 등을 논의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은 “최근 한국 기업의 ESG 대응수준은 선진국을 10점으로 보았을 때 대기업은 7점, 중소기업은 4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ESG 경영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ESG 경영이 떠오르면서 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적인 것처럼 위장하는 ‘그린워싱’ 같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2015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도가 오용되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12년 5월 ‘온실가스 배출권의 할당 및 거래에 대한 법률’이 제정돼 2015년부터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가 시행됐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각 기업들에게 연 단위로 온실가스 배출권을 할당하고, 각 기업은 할당된 한도 내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게 됐다. 이때 실제 배출량을 평가해 각 기업들이 부족분이나 여분을 서로 거래할 수 있게 허용하는 제도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다. 그런데 제조업을 주력으로 하는 모 대기업의 경우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지만, 정부로부터 지급받은 배출권이 남아 타 기업에 이를 판매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윤순진 교수는 ESG 경영의 출발단계인 현 시점에 경영계가 ‘상생’이라는 키워드를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기업이 벤처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을 인큐베이팅 하면서 ESG 경영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도, 노사관계 활성화를 위해 수평적 소통구조를 갖추고 논의된 사안을 경영 목표에 반영하는 것도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건 진정성이에요. 흐름을 미리 읽고 선제적으로 자발적 목표를 세워서 실천하는 거죠. 이제는 규제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세계시장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