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메타버스를 만난다면?
노동이 메타버스를 만난다면?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1.04.03 00:05
  • 수정 2021.04.05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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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 내 안전교육뿐만 아니라 숙련공 육성까지
디지털 기술과의 협업이 심화하는 시대가 온다

[리포트] 시공간을 뛰어넘는 노동이 온다

“시공의 폭풍에 온 걸 환영하네!”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중 주인공 파시발의 대사

요즘 메타버스가 급부상 중이다. 메타버스는 무슨 버스냐고? 3차원 가상 세계를 의미하는 메타버스(metaverse)는 운송수단이 아니다.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가 펴낸 《IT용어사전》은 “3차원 가상세계. 가공, 추상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 기존의 가상현실(VR)보다 진보된 개념으로 웹과 인터넷 등의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에 흡수된 형태”라고 설명한다.

웨어러블 기기를 통한 증강현실(AR) 및 가상현실(VR)과 관련 산업이 지속적으로 발전 양상을 보이면서, 소비자들은 더 실감나는 체험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도 한 몫 했다. 사람 사이의 대면이 어려워지자 대면 소통의 대체재로 주목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나아가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메타버스 기술이 노동을 만난다면 어떨까?

3월 18일 서울 용산구 소재 드래곤시티 호텔에서 열린 버넥트 사업설명회에서 참가자가 AR체험을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3월 18일 서울 용산구 소재 드래곤시티 호텔에서 열린 버넥트 사업설명회에서 참가자가 AR체험을 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어느 순간 일상에? 메타버스를 만나다

바야흐로 1996년, 초등학생이고 중학생이고 동네 구멍가게에 빵이 들어오는 시간만 죽치고 기다렸던 시기가 있었다. 빵 속에 있는 스티커 때문이었는데,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스티커를 얻기 위해 빵을 사려고 줄을 서기도 했다. 바로 포켓몬스터 열풍이 분 탓이었다. 한 때를 풍미하고 사라지는 유행을 따라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서 멀어지던 유년 시절의 추억은 2017년 ‘포켓몬 고’ 게임으로 돌아왔다.

게임 ‘포켓몬 고’에서는
AR기능을 사용해
포켓몬을 잡을 수 있다.

포켓몬 고 게임은 기존에 출시됐던 닌텐도 기반의 게임과는 달리 보편화된 스마트폰으로 즐길 수 있고, GPS를 기반으로 플레이어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포켓몬을 포획해 생동감을 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 카메라에 포착된 현실공간에 게임 속 포켓몬이 등장하는 증강현실(AR) 설정은 게임이 흥행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희귀한 포켓몬을 잡기 위해 몰두했던 플레이어들이 군사시설 같은 출입금지구역에 들어가거나 교통사고 위험에 노출되는 등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오히려 증강현실 기술이 주는 높은 몰입도를 증명하기도 했다.

당시 단순한 그래픽 조각(?) 따위에 생명의 위협마저 감수하는 이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게임이 거기서 거기’라고 했던 이들조차 잠들기 전 보유하지 못한 포켓몬이 집 근처에 출현하면 잠옷을 입은 채 집 앞으로 뛰쳐나가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할 만큼 빠져들었다.

증강현실(AR)도 이렇게 신기한데, 3차원 공간 전체가 인간의 상상력으로 구현되는 가상현실(VR)은 어떨지 상상해보라.

가까운 VR 센터를 찾아 가장 먼저 경험해본 건 ‘스키’였다. 체험을 위해서는 가상현실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하는 스마트글라스와 진동으로 생동감을 전하는 컨트롤러 등 웨어러블 기기 착용이 우선이다. 착용을 마치고 11자 모양의 발판 위로 올라가면 흰 눈이 덮인 가상의 산맥을 내려가기 위한 준비는 끝이다. 실제 체험해보면 어지러움을 느낄 만큼 생동감이 있다. 스마트글라스에 비춰지는 산맥의 경사에 따라 발판 기기가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폴대로 장애물을 스쳤을 때 전해지는 진동의 강도도 달라진다.

물론 현실에서 느끼는 체감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메타버스 기술이 이제 막 상용화되기 시작했음을 감안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과 동일하거나 이를 넘어선 경험을 제공할 수 있지도 모를 일이다.

ⓒ 유튜브 MBClife 영상 갈무리
ⓒ 유튜브 MBClife 영상 갈무리

백문불여일견, 현장에서는 어떤 시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경기침체에도 VR·AR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다. 대면 접촉이 불가능해지면서, 기업을 포함한 소비자층이 비대면 활동의 확장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물인터넷과 로보틱스, 블록체인 기술 등이 부각되는 4차 산업혁명의 흐름 속에서 미래 기술에서 뒤쳐져선 안 된다는 위기의식 때문인지 이미 산업 전반에서 사용을 고려하고 있다.

특히 게임, 방송, 교육 등의 분야에서는 VR·AR 콘텐츠 제작이 늘고 있다. 지난해 2월부터 MBC는 VR기술을 활용해 제작한 휴먼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를 방영해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가상현실과 특수영상기술로 복원해 유가족과의 재회를 돕고자 제작됐다. 특히 지난 2월에 방영된 <용균이를 만났다> 편에서는 2018년 11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 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한 故 김용균 씨와 당시 발전소의 현장을 복원해 시청자들이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와 열악한 노동현장의 실상을 인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산업현장에서의 활용 사례도 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가상현실을 활용해 도장 숙련공 육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훈련 시스템을 개발해 현장에 적용했고, 한국동서발전 당진발전본부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 예방을 위해 가상현실을 연계한 교육프로그램을 발 빠르게 도입했다. 한국동서발전 당진발전본부의 교육프로그램은 산업재해 발생 비율이 높은 추락이나 끼임, 감전 등이 우려되는 위험 상황을 가상현실로 구현하고,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수칙을 교육한다.

박민태 한국동서발전 당진발전본부 재난안전부 부장은 “발전소 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안전사고와 유사한 상황을 미리 체험하도록 해 근로자들의 안전의식을 제고하고 불안전행동의 차단을 유도하고자 했다. 강의식 교육에서 벗어나 체험 중심의 실질적인 교육을 통해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 최우선 일터 구현을 위해 도입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실제 교육을 받는 노동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다면 아무리 우수한 교육프로그램이라도 무용지물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한 당진발전본부의 한 노동자는 “이론으로만 배우던 안전교육을 실제처럼 실감나게 배울 수 있어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실제 위기상황에 닥친 것 같은 현장감을 느끼며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방안을 배우는 데 효과적이라 좋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노동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이다. VR교육프로그램은 4분 남짓의 짧은 체험으로도 1시간이 넘는 강의식 교육보다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김영훈 한국동서발전 당진발전본부 재난안전부 차장은 “(한국동서발전은) 현재 진행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계획예방정비공사 시 발생 가능한 복합위험작업 10개와 관련해 VR교육 콘텐츠를 추가 개발해 올해 중 도입할 계획”이라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교육생의 요구에 부합하는 콘텐츠 개선으로 교육효과를 극대화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에서는 도장 숙련공 육성을 위해 VR교육훈련 시스템을 개발했다. ⓒ 삼성중공업
삼성중공업에서는 도장 숙련공 육성을 위해 VR교육훈련 시스템을 개발했다. ⓒ 삼성중공업

시공간을 뛰어넘는 노동이 온다

미국의 정보기술 자문회사인 가트너(Gartner)가 2017년 발표한 하이프사이클(패턴분석 그래프)은 어떤 기술이 보편적인 일상으로 자리 잡기까지 과정을 5단계로 설명한다. 하이프사이클에 따르면, 2021년 현재의 메타버스 기술은 기술 안정화와 다수기업의 투자가 증가하는 4단계에 해당한다. 이는 곧 사회가 다양한 변화를 코앞에 두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메타버스 기술은 기존의 업무 방식도 변화시킨다. 화물분류 작업을 할 때 노동자가 착용한 스마트글라스가 화물을 직관적으로 분류할 수 있도록 돕는 건 물론이고, 5G 통신기술, 머신러닝, 통번역 기술과 결합되면서 글로벌 원격 협업에 기여하기도 한다.

플랜트 사업과 같이 진척 과정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선주와 엔지니어, 조선소 작업자 간 적극적인 의사소통 기반을 마련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더구나 해외출장 때 2주간의 자가격리를 거쳐야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시공간의 한계를 극복한 신속 대응으로 기업의 리스크를 줄이고, 쉽게 설명하기 어려웠던 숙련 노동자의 현장 노하우를 가상공간에 제공해 초보자의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점으로 작용한다.

증강현실 전문기업 버넥트의 하태진 대표는 3월 11일 열린 사업설명회를 통해 “드론이나 사족보행 로봇을 연결해, 원격으로 사용자와의 협업이 가능한 기술이 올 상반기에 출시될 수 있다”며 “먼 미래에는 2차원의 스마트폰보다 스마트글라스나 스마트콘택트렌즈를 활용해 세상을 접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보가 누적되면서 (메타버스 기술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날 사업설명회에서 권상준 IDC 이사는 “사람과 디지털 기술의 협업에 맞춰 역량을 강화해야 할 때”라며 “직원 교육을 통해 디지털 역량을 갖춘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기업의 과제 중 하나”라고 말했다.

‘시공의 폭풍’이 불고 있다. 앞으로 다수의 기업은 디지털·통신기술 기반의 실시간 상호 협업 구현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기술이 기업의 전유물은 아니며, 노동도 이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기류를 앞두고 다양한 준비가 요구되는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