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도, 노동도 모두 ‘삶’이라지요
노래도, 노동도 모두 ‘삶’이라지요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1.04.16 19:35
  • 수정 2021.04.25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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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펴고 살 만한 세상을 위한 노래‘
[인터뷰] 민중가수 최도은을 만나다

봄이 완연한 4월의 아침, 판교역 3번 출구 앞에서 민중가수 최도은 씨를 만났다. 볕이 좋다고 인사한 그는 자연스럽게 야외 의자에 앉았고, 인터뷰는 어느새 ‘소풍’이 됐다. IT기업이 두루 포진한 판교에서 이 같은 여유라니. 과연 ‘노동자가 다리 쭉 펴고 살 만한 세상’을 노래하는 ‘최도은’다웠다.

밤이면 밤마다 자유를 그리워하던 지난날, 농성장의 노동자들이 가족 같아 명절조차 걸렀다는 최도은 씨. 그는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도 공장 화재로 오갈 곳 없는 노동자 70여 명에게 달려갔다. 노래운동 30여 년, 변함없이 지친 노동자를 위로하는 그의 삶은 어떻게 흘러왔을까.

민중가수 최도은 씨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민중가수 최도은 씨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 노래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꽃잎처럼/금남로에/뿌려진/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잘리워진/어여쁜/너의 젖가슴

들어보면 어때요? ‘두부처럼 잘려진 너의 젖가슴’이라는 가사가 있다는 게 무섭지 않아요? 1980년 5월의 광주를 말한 노래예요. 생전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대학가서 들었어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어요.

대학이 청파동에 있어서 남영역으로 통학했어요. 남영역 플랫폼에서 2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대공분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박종철이 죽은 거예요. 저는 그저 봄이 오면 교내 진달래 밭에서 사진 찍고, 벚꽃 휘날리면 꽃바람 밑에서 사진 찍던 학생이었는데, 어떤 학생은 나랑 같은 거리에서 운동하는 선배를 숨겨줬다는 이유로 끌려가서 물고문으로 죽었어요. 빚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노래밖에 없었죠. ‘임을 위한 행진곡’과 ‘오월의 노래’가 저를 노래운동으로 이끈 계기였어요.

저희 때는 민중가수라는 직업도 없었어요. 단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고, 인천에 노동자들의 쟁의가 많았는데 그곳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러 갔어요. 그때는 어디에 가서 밥을 먹고, 어디에 가서 노래를 가르칠까 그러면서 살았죠.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조합에 가서 노래랑 율동 가르치면서 무상으로 레크리에이션을 한 건데, 그게 일할 수 있는 터전이 된 거예요. 1988년부터 1994년까지 한 7년간은 뭐 거의 봉사활동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우리 딸은 만날 봉사만 다닌다’고 했었죠(웃음).

- 첫 무대의 기억은?

무대도, 마이크도 없었어요. 그냥 노래를 부르는 거죠. 노래를 부르면 조합원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만날 지루한 농성현장에서 노래도 시원시원하게 부르지, 말도 시원시원하게 하니까 연세가 많은 조합원은 동생 같다고 좋아하고 고등학교 다니는 동생들은 언니 같다고 좋아하고.

저도 이렇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아 미치죠. 도대체 집에 갈 수가 없어요(웃음). 농담이 아니라 명절에 집에도 안 갔어요. 농성장에서 먹고 자면서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안 하니까 어머니, 아버지께서 인천에도, 명동성당에도 저 찾으러 오셨죠. 그땐 농성장의 조합원들이 친구 같고 가족 같더라고요.

- 최도은에게 ‘불나비’란?

제가 지금도 좋아하는 학교 친구한테 배운 노래였는데,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불렀어요. 그런데 효성물산노조위원장 출신 언니가 저를 붙잡고 이 노래가 무슨 뜻인지 아냐고 묻는 거예요. 그 가사에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는 거예요. 저는 국화꽃이나 백합꽃인가보다 했는데 그 언니가 하는 말이, 과거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보면 옷감을 나르는 수레를 주는데, 수레에 옷감을 가득 쌓고 좁은 통로를 지나가다보면 그 옷감이 꽃처럼 보여서 그렇게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중학생이 알바를 해도 부모 동의서를 받아야 하지만, 예전에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다가도 공장가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70년대 어린 여공들이 하얀 천을 수레에 가득 쌓아서 옮길 때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아동노동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부릅니다.

또 ‘불나비’라는 노래가 점점 고조되잖아요? (조합원들은) 그때 막 희열이 느껴지나 봐요. 어딜 가나 그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앵콜’하면서 뒤집어지는 거예요. 이 노래가 제가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그 노래를 부르면 다들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어요.

- 작곡한 노래 중 가장 사랑하는 노래는?

‘방 빼라’라는 노래가 있어요. 박근혜 정부 시절에 저희 남편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갔어요. 그 이유가 ‘노동자의 책’이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는데 거기에 불온서적, 국가보안법 위반 서적을 올렸다는 거였어요. 우리나라 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서울대도서관에 다 있는 《자본론》, 《녹슬은 해방구》가 국가보안법 위반 서적이래요. 남편이 잡혀갔는데 3일 동안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남편이 잡혀가니까 11차 촛불집회 때 노래 한 번 부르라고 연락이 오더라고요. 저도 그냥 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잠을 안 자면서 ‘방 빼라’라는 노래를 만들었죠.

삼성에게/연금 바친/대통령/필요 없다
재벌과의/뒷거래/대통령/필요 없다
입만 열면/말 바꾸는/대통령/필요 없다
온 국민이/등 돌렸다/탄핵이다/방 빼라

저는 이 노래가 가장 좋아요. 촛불시민들이 그 추운 겨울에 나와서 손발이 꽁꽁 얼어가면서도 부른 노래잖아요. 우리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팔다리 잘리는 세상이 반복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그 노래를 좋아해요.

민중가수 최도은 씨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민중가수 최도은 씨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 1980년대 당시 노동의 모습은?

정말 말할 수 없는 정도였죠. 당시 노동자들의 일터는 지금으로 치면 양계장과 다를 바 없었어요. 제 기억에 남는 회사 중 한 곳은 여름에 비가 오니까 화장실 똥물이 넘쳐서 공장 작업이 중단됐어요. 공장 노동자들은 방수된 신발을 신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을 하겠어요. 노동자의 인권은 중요하지 않았던 거죠. 노조를 만들면 회사가 문을 닫아버리기도 했어요. 폐업한 날, 사장실에 가니까 공기청정기가 있더라고, 저런!

- 현재 바라본 노동의 모습은?

편의점에서 일하시는 분들 야간수당 있나요? 직영은 몰라도 가맹 편의점은 야간수당 거의 없어요. 게다가 휴일수당 줘야 한다니까 일을 나흘만 시키잖아요? 그 사람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어떨까요? 배달노동자는 어떨까요? 배달 한 건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하다가 죽잖아요. 상식이 없는 사회예요. 전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나라처럼 24시간 문을 열까요? 그건 야간 노동하는 노동자의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겠죠. 해외에서는 오후 6시 넘으면 다 문을 닫아요. 우리나라는 밤새 문열어 놓는 걸 정당화하지만, 밤새 서있는 사람의 삶은요?

우리나라는 편차가 정말 커요. 주 40시간 노동이라는 건 규모가 있는 사업장에서 일하는 이들만의 이야기예요. 그 외의 사람들은 쉬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주말에 일하기도 하죠. 이러한 편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업장 힘만으로는 어려워요. 그래서 정치가 바뀌어야 하는 거고요. 단군 이래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살아본 적 없잖아요. 세계 최빈국이던 나라가 이렇게 변화한 건 노동하는 사람들의 힘 덕인데, 그 대우는 아직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지 못하는 수준이에요. 이들의 희생에 의해 우리 사회가 굴러가는 거 아닐까요?

유럽은 주당 28시간 노동으로 가고 있어요. 1930년대 존 메이너드 케인즈 같은 사람도 100년 후면 우리가 주당 15시간만 일해도 될 거라고 말했어요. 모든 노동자의 휴식이 소중한 만큼, 노동시간을 줄여도 먹고 살 수 있는 임금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봐요. 경제가 발전하면 노동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보낼 수 있는 구조가 갖춰져야겠죠.

- 가수와 활동가 중 본인에게 더 가까운 말은?

구분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 생각에 가수는 제사장과 같다고 보거든요. 원시시대에 제사장은 원시인이 잡아온 고기를 나눠주면서 노래도 부르고 위로도 해주잖아요. 평상시엔 ‘인간 최도은’이지만, 노래하는 동안은 제사장의 마음으로 영혼을 달래고 마음을 규합하는 활동가이자 가수인 거죠. 무대나 골목 구석에서 노래하는 단 10분만큼은 내가 아닌 거예요. 노래를 하면서 듣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마음에 용기를 주기도 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같이 나누는 거죠.

민중가수 최도은 씨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민중가수 최도은 씨 ⓒ 참여와혁신 강민석 기자 mskang@laborplus.co.kr

- 배우자 이진영 씨와 동반하는 삶?

1991년 동양 엘레베이터 소속 노동자들이 저한테 노래를 배운 적 있어요. 그때 저희 남편은 노동조합 투쟁에 연대하러 온 활동가였고요. 그때부터 친구처럼 알고 지냈죠. 그러다가 한두 번 사라지는 거예요.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감옥 갔다 왔다고 하고(웃음). 그렇게 함께 나이 먹으니까 정이 들고, 그렇게 마음을 나누고, 가정을 꾸리게 된 거죠. 서로 각자의 삶을 터치하지 않아요. 자유로워서 좋아요.

최근 조금 안타까운 건, 저희 남편이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서 병가로 2년을 쉬었어요. 회사에서 주어진 병가가 최대 2년이거든요. 그래서 복직했는데 일을 하자마자 억- 하고 주저앉은 거예요. 남편은 일하다 다친 거로 판단해서 근로복지공단에 산재신청을 냈는데 근로복지공단은 교통사고에 의한 퇴행성 사고기 때문에 산재가 아니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지금 2년 넘게 행정소송 중이에요. 우리 사회가 사고를 당한 사람이 육체노동을 해서 먹고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거예요.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사회, 좀 씁쓸하네요.

- 노동운동 속에서 예술의 역할?

노동은 공동이 해야 하잖아요. 그 어떤 노동도 혼자 할 수 있는 노동은 없어요. 앞서 살았던 세대가 축적한 지적 자산, 물적 자산이 모여서 현재의 노동을 만들어낸 거죠. 그 의미를 북돋아주고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현재는 노동자들의 여건이 열악하니까 다리 펴고 살 만한 세상 좀 만들어보자, 아이들과 건강하게 살 만한 세상 좀 만들어보자는 메시지를 예술이 던진다고 생각해요.

- 최도은에게 ‘노동’이란, 그리고 ‘노래’란?

노래도 노동도 모두 삶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노동 없이 생존할 수 없죠. 인간이 이 지구라는 별에 와서 평균 70~80년 살고 가는데, 사는 중에 자신을 건강한 사람으로 생활하게 만드는 게 노동이잖아요. 노동은 뼈도, 살도, 뇌도 튼튼하게 해줘요. 다만, 과하면 안 되겠죠. 노래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 속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고 자연과 공감하게 하면서 마음을 치유하고요.

지구별에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노래합니다. 노동자들이 조금 더 의견을 개진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조화할 수 있도록 고민하면서 살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