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집단도, 전략도 없단 말인가 !
전문가 집단도, 전략도 없단 말인가 !
  • 승인 2004.10.10 00:00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준비없는 한일 FTA 협상 과정을 보면서 ‘칠레와의 협상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1. 실익 있다 없다, 오락가락
9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FTA 합동연구’ 세미나에서 산업연구원의 유관영 박사가 일본경제기획청의 자료를 인용해 3국간 FTA가 체결되면 우리나라의 경제적 이익이 가장 적다고 발표했다. 발표 직후 행사를 주관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는 취재기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이제까지 FTA 적극 추진을 주장해온 국책 연구기관이 FTA 반대로 입장을 선회한 게 아니냐’는 것.

KIEP와 외교통상부는 서둘러 개인의 견해일 뿐 정부 입장과는 관계없다는 해명자료를 발표했지만 혼란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후였다. 특히 외교통상부 등 FTA 추진 관계부처가 주요 행사 참석자들을 줄줄이 호출하는 등 서둘러 진화에 나서 의혹이 더 짙어지고 있다.


#2. 기업 82%, FTA 협상 내용 몰라
“벌써 5차 협상이 끝나고 6차 협상을 앞두고 있는데 아무것도 알려진 게 없어요. 협상 내용을 공개하라고 하면 협상 전략에 차질이 있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는데, 이미 협상 다 진행해 놓고 공개하면 바꾸고 싶어도 못 바꾸는 게 국제 협상 아닙니까” 전자산업진흥회의 한 임원은 여기저기서 피해 예상치가 나오고 있는 데 정부는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본지가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 주요 기업과 노동조합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FTA 협상 진행내용을 알고 있다’고 응답한 기업 관계자는 18%에 불과했다. 반면 ‘모른다’(66%)와 ‘관심없다’(18%)에 응답한 비율은 82%에 달해 이해당사자들의 의견 수렴과 논의 과정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FTA 체결로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산업계, 노동계 등 이해관계가 걸린 각계각층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3. 한 칠레 FTA, 협상전략 실패의 전형
지난해 11월 여의도 일대. ‘한칠레 FTA 저지’, ‘밀실협상 규탄’등이 쓰인 피켓을 들고 모여든 농민들로 한달 내내 홍역을 치렀다. 한칠레 FTA는 농민단체 대표들의 이어지는 단식과 시위, 찬반 논란의 가열 등으로 2003년 하반기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다.

한칠레 FTA 협상 당시 정부는 협상 내용을 전혀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비준안을 국회에 제출하고야 내용을 공개했다. 당초의 호언장담과 달리 농업부문의 피해가 예상보다 큰 것으로 드러났지만 비준안이 제출된 상태여서 협상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한칠레 FTA는 농업부문의 피해에 사회적 갈등 비용이라는 덤까지 떠안고 막을 내렸다.

6차까지 진행된 한일 FTA 협상을 두고 한칠레 FTA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깊다. 실무 협상의 내용이 거의 공개되지 않는데다가 한일 FTA 체결의 실익에 관해 민간 기관들 뿐 아니라 국책기관들도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충남대 경제학과 박진도 교수는 “이해 당사자들을 참여시키지 않는 밀실 협상과 문제가 생기면 사후적으로 대책을 수립하는 밀어붙이기식 정책이 또 다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8월 23일 한·일 FTA 체결을 위한 양국 정부간 5차 협상이 열리고 있는 경주보문단지 현대호텔 앞에서 민주노총은 ‘한일 FTA, 밀실 협상저지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정부 대표단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날 대회 참석자들은 ‘한국의 일방적 피해가 예상되는 데도 정부가 논의 봉합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협상 내용의 공개를 요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한칠레 FTA 체결 당시 국민 90%의 이익을 위해 10%(농민)를 희생시키는 게 옳으냐는 논란 속에서는 당연히 피해를 보는 10%와 함께 논의를 했어야 하는데 그 과정을 무시해 갈등만 키웠다”고 꼬집었다.
실무 협상을 시작해 보지도 않고 협상완료 시기부터 정한 것도 전략상의 오류를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철강업체인 D사의 한 임원은 “솔직히 우리보다는 급한 것은 일본인데 시한을 미리 정하고 협상을 진행하면 일본의 압력에 더 시달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이 관계자는 정부가 협상 타결 시한을 정해놓고 진행한 한칠레 FTA의 실패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며 혀를 찼다. 


손ㆍ발 따로 노는 협상
- 전문인력 부재, 부처간 불협화음
현재 우리나라의 FTA 추진위원회는 외교통상부의 통상교섭본부장을 위원장으로 관계부처 1급 임원들을 구성원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의 업무는 통상교섭본부에 집중돼 있다. 지난 한칠레 FTA 체결 당시 주무부처인 통상교섭본부 내 1개과가 시장접근, 투자 및 서비스, 무역규범에 이르는 전 분야를 챙기고, 협상을 이끌어나가느라 청사에 불이 꺼질 날이 없었다.

 

인하대학교 경제학부 정인교 교수는 “당시 칠레의 경우, 시장접근국과 다자통상국이 맡은 업무를 우리나라에서는 1개과가 담당해 부담이 과중됐다”며 “최소한 전담국을 신설하거나 FTA 팀으로 확대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일본의 경제산업성은 기존 5명이던 경제연대협상추진실 (FTA추진실) 정원을 한꺼번에 80명으로 대폭 늘렸다. 한국을 비롯한 멕시코, 필리핀, 타이 등과의 FTA 협상이 본격화할 것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다.

최근에는 경제산업성 외에 외무성과 농림수산성, 후생노동성 등도 FTA 전담 부서를 크게 강화했으며 작년 말 내각부 내에 관계부처 연락회의를 신설해 부처간 협의와 조정, 지원 기능을 촘촘하게 재설계했다. 
정계에서도 자민당이 FTA 특별 위원회를 설치했으며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비슷한 성격의 조직신설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이 관계부처간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부처간 이해관계를 둘러싼 잡음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산업자원부 FTA과의 한 사무관은 “FTA는 경제 논리로 접근해야 하는데 외교통상부는 외교논리에 정치논리까지 고민하다 보니 솔직히 산업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못한다”고 내심 불만을 털어놓았다. 외교통상부도 할 말은 있다.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는 “외교통상부 내에 통상교섭본부를 따로 설치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며 “산업문제에 관한 전문성이라면 우리 본부도 산자부 못지않다”고 반박했다. 

문제는 새로운 시스템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처간 갈등이 지속되면서도 이를 조정할 만한 확고한 리더십이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직은 있지만 권한은 없고, 권한을 행사한다고 해도 책임지지 않는 기형적인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FTA 추진단 재구성 시급
한일 FTA는 동북아의 경제 질서 재편의 가늠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동북아시아의 경제적 패권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경쟁에서 우리나라가 ‘캐스팅 보드’역할을 잘 하며 역내 분업구조의 조화와 경제 통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9월 18일 내놓은 ‘동아시아 FTA에 대한 중국의 접근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중국이 ‘대국주의(大國主義)’적 태도로 역내 FTA를 추진하고 있으며, 대국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할 경우 배타적 지역주의로 귀착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또 보고서는 동아시아 맹주 자리를 노리는 중국의 이같은 FTA 정책으로, 이미 일본과 FTA 협상을 시작한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세력대결 장소가 됐다고 지적했다. 현재 일본과 중국은 동남아를 대상으로 경쟁적 FTA를 추진하고 있어 수년 내에 동아시아 통합이 심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급부상은 우리에게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다. 현재는 대중 수출의 확대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의 낮은 인건비를 찾아 국내 기업이 떠날 가능성도 크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중국의 부상과 동아시아의 대응’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일간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기술의 고도화를 꾀하고 일본·중국간 경제 교류의 중개자로 역할하기 위해 물류, 금융, R&D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일 FTA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앞으로 우리경제와 동북아 경제질서에 중요한 잣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 정부와 국회는 우선 FTA를 통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산업계, 노동계, 농림어업계 등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하기 위한 협력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케임브리지대 장하준교수는 “협상에 관한 공개적 논의와 동시에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만한 시간이 필요하다”며 “협상시기를 최대한 늦춰가면서 영향을 분석하고 이해당사자간 합의를 이끌어낼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산업계 및 학계 일각에서는 정부부처 실무진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FTA 추진기구를 학계, 노동계, 산업계 등 각계각층의 대표로 확대 개편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FTA 협상에 대한 전략적 목표 설정과 관련 이해 당사자의 의견 수렴 없이 진행하다 결국 엄청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 과거의 오류를 더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