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박싱] 이 주의 키워드 : 모두를 위한 화장실
[언박싱] 이 주의 키워드 : 모두를 위한 화장실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1.06.06 18:05
  • 수정 2021.06.07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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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권 #경계 #노동조합 #공공운수노조 #한국다양성연구소
경기도 과천시종합복지관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 팻말 ⓒ 한국다양성연구소 유튜브 갈무리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동조합(위원장 현정희)이 새로 입주할 강서구 등촌동 소재 건물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7층으로 지어진 건물 1층, 5층, 6층에 각 두 개씩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설치될 예정이며, 나머지 층은 기존과 같은 화장실이 들어선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나이, 장애 여부,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소외당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로 ‘경계없는 화장실’, ‘성중립화장실’ 등으로도 불린다.

공공운수노조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 결정은 ‘새 건물에 성중립화장실을 설치해달라’는 건의가 나오면서 이뤄졌다. 앞서 공공운수노조는 온라인을 통해서 사무처 활동가 100여 명을 대상으로 새 건물 입주 전 반영할 건의사항을 모은 바 있다.

국내 노동조합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하는 건 처음이다. 다소 생소한 사안이지만, 공공운수노조는 내부 논의 과정에서 큰 갑론을박 없이 결정됐다고 전했다. 하윤정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 여성차장은 “장애인, 성소수자 등에게도 화장실은 기본권이라는 취지에 크게 동의한 듯하다”고 했다.

“공공운수노조가 공공성을 지향하는 조직이잖아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그 지향점을 건물에 구현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4월 매입 이후, 입주할 건물에 답사를 갔는데 엘리베이터만 있을 뿐 이동 약자를 고려한 곳은 아니었어요. 사무처 사람들만이 아니라, 건물을 방문할 많은 사람 중 누구라도 이동과 사용 측면에서 불편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화장실에 담긴 오늘의 인권

현재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 캠페인을 주도하는 곳으로 한국다양성연구소가 있다. 공공운수노조도 이곳에서 제공하는 관련 자료를 참고해서 공사를 추진했다.

김지학 소장은 공공운수노조의 모두의 화장실 설치를 두고 “사회적 논란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양성이 실현된 사회를 보여주었다”며 “노동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명확하게 잘 알고 계신 노동조합이기 때문에 다른 소수자도 포함하는 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의 확장이 잘 일어난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한국다양성연구소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성소수자뿐 아니라 장애인, 활동보조가 필요한 노인, 성별이 다른 보호자의 도움이 필요한 아동나 장애인 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시스젠더 비장애인 성인 중심인 설계에서 벗어나 모두가 제약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여아와 함께 있는 아빠, 성별이 다른 활동보조인과 있는 장애인, 성별이분법이 불편한 사람 등이 화장실을 이용할 때 겪는 어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스젠더: 성기모양만으로 정해지는 '지정성별'과 '성별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화장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한 김지학 소장은 “여성, 장애인이 사회에 진출하는 등 점차 다양한 사람을 포함하는 사회가 되면서 화장실의 모습이 바뀌어왔다. 화장실에는 인권 확장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제는 영유아도 다닐 수 있는 화장실, 성별 구분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국내에 도입된 사례가 거의 없어서 그 모습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공용화장실과 비슷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보다는 통상의 가정용 화장실에 더 가깝다. 사용 시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천장부터 바닥까지 닫혀있는 방처럼 설계된 게 이상적인 형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김지학 소장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불법 촬영 등의 위험성을 높일 것’이라는 주장이 옳지 못하다고 반박했다. 

경기도 과천시종합복지관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 내부 ⓒ 한국다양성연구소 유튜브 갈무리
경기도 과천시종합복지관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 내부 ⓒ 한국다양성연구소 유튜브 갈무리

한국다양성연구소가 만든 ‘모두를 위한 화장실 체크리스트’는 그 형태와 취지를 보다 명확히 보여준다. ▲건물에서 전동 스쿠터 및 유아차 접근이 가장 편리한 곳 ▲2.5m x 3.0m 이상의 총면적 ▲물에 젖어도 미끄러지지 않는 바닥 재질 ▲높이 조절이 가능한 세면대와 기저귀 교환대 ▲장루‧요루 장애인을 위한 세면대 ▲변기에 앉아서 사용할 수 있는 응급비상벨 등으로 이루어진 43개 항목을 충족하려면 화장실 이용자와 보호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어야 한다. 현재 국내에선 과천시종합복지관 화장실이 이러한 요건을 가장 잘 반영한 화장실로 꼽힌다.

김지학 소장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를 때마다 ‘성범죄 우려가 크다’는 기사가 주를 이룬다”며 “마치 누군가의 인권을 올리기 위한 일들로 다른 누군가의 인권이 낮아질 것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넓은 면적과 여러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 화장실 설치가 쉽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다. 공공운수노조도 이번에 건물을 매입하지 않았다면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가 쉽게 이뤄지지 않았을 수 있다. 실제 민간건물에 입주한 몇몇 인권단체 등에서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하려고 해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에 김지학 소장은 공공영역에서부터 점차 늘려 가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백악관에 ‘성중립화장실(Gender neutral toilet)’을 설치했듯, 청와대나 국회의사당 등 공적 영역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만들고, 점차 늘려가야 한다는 얘기다.

“낯설게 인식되는 것들이 실제로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나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교육을 통한 의식의 전환도 필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동의한 다음에 만드는 건 실상 불가능한 일이에요. 청와대, 국회, 시·도·구청, 나아가 철도역 등 공공시설 설치 의무 규정을 만들어 시범적으로 설치하는 게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