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8.12.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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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를 말하다>를 기획, 취재하며

성지은 jesung@laborplus.co.kr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고 말했다. 어느 한 ‘노무쟁이’는 눈물까지 글썽였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는 것으로 위로를 해야 하는 건지, 씁쓸하다고 털어놓았다. 지난 11월호에 특집으로 다뤄졌던 <노무를 말하다>에 대한 이야기다.

노무관리부서 책임자를 비롯한 팀장급 전원에게 기사를 스크랩해 메일을 보냈던 한 대기업 노무팀 간부는 “이 내용으로 따로 이야기하자”는 답변을 받았다고 전했다. 함께 토론을 하기 위해 따로 파일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문의도 받았다.

이제 내 고백을 더하자면

취재를 하면서, 혹독한 현실 속에 있던 사람들이 전했던 마지막 이야기는 “뭐, 어쩌겠나”라는 것이었다. 떠나거나, 견디거나. 얽히고설킨 상황 속에서 스스로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자조적인 고백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래, 그렇게 있는 대로 다 써 놓고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노사관계의 이슈들을 취재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때가 많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더욱 그렇다.

어려운 일이다. 해결 방안에 대한 확신은 없고, 사람들은 불안정하고 해야 할 과제들은 첩첩산중이다. 사실 나도, 아니 나 역시 잘 모르겠다. 어쩌자는 건지.

그런데 일이 좀 커지고 있다. 후속기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두려운 마음이 크다. ‘노무쟁이’들의 고민은 그들 스스로의 변화만으로 해결해 낼 수 없다. 그렇다고 시스템을 바꾸면 된다? 그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현장 중심, 현안 중심으로 이뤄져 온 노무 업무는 그 현안을 해결해 내는 땜질식 업무로 이뤄져 왔다. 철학의 부재, 노사관계를 대하는 경영의 자세에서부터 노사관계 관행, 그리고 고착화된 봉합식 노사관계로부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전문가의 조언이나 다른 나라의 사례로 ‘해결 방안’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부분이다. 나는 이 고민에 대해, 조금 다른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면 편하다. 그러나,

얼마 전에 사무실 화장실의 전기 스위치가 고장이 났다. 스위치를 켜도 형광등이 들어오지 않는다. 포기하고 며칠을 보내다가 우연히 접촉이 문제인 것을 알게 됐다. 스위치의 어느 한 부분을 요령 있게 누르면 불이 켜진다. 그리고 우리 내부의 사람들은 몇 날을 그저, 요령을 익혀 불을 켜고 살고 있는 중이다.

마감을 앞둔 늦은 저녁 불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몇 번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던 중에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관리실에 전화 한 통을 해서 설명하면 되는 것을….

어느 날 다가온 불편함을 자기 나름대로 극복한 사람은, 그 원인을 고치는 것보다 그냥 내가 화장실에 한 번 들어갈 때 불이 켜질 수 있게 요령을 습득하는 것이 편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화장실에 들어갈 때, 나는 불을 켜고 들어갈 수 있으니 굳이 내가 나서서 전화하고 어쩌고 하는 것이 귀찮은 것이다.

뭐, 화장실 불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라고 요란인가. 그럴 수도 있다.

누구나 ‘고장난 스위치’가 있다

그래도 얘기 나온 김에 좀 더 들어가 보자.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다가 나는 문득 ‘고장난 스위치’가 비단 그것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문제로 다투다 괜스레 불편해진 회사 상사와의 관계, 오랫동안 미뤄왔던 기획과 보고서. 늘 한 번은 말해야지, 싶었던 상사의 나쁜 버릇?

화장실 스위치처럼 불편한 사람은 안 마주치면 되고, 기획과 보고서는 말만 안나오게 하면 되고 상사의 나쁜 버릇은, 비위 좀 맞춰주면 되는 건가?

자, 그리고 이제 다시 물어보자. 우리 회사 화장실의 스위치는 ‘우리’가 아니면 못 켠다. 즉, 다른 사람은 그 ‘요령’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화장실은 영원히 우리만 그렇게 쓰면 되는 것인가?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인정을 했다. 죽을 지경이지만 일단 이번 임단협만 넘겨보자. 일단 이번 선거만 치러보자. 일단 올해까지만 하고 다른 부서로 발령만 받으면 된다.

그럼 그 스위치는 누가 고치는 건가? 다음 임단협 때 내 자리에 있을 불쌍한 영혼이? ‘어쩌라는 거냐’는 말이, 꼭 그걸 내가 고쳐야 하는 것이냐는 뜻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이라고 말씀들을 하시려나.

이제 불 좀 켜 보자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막상 내가 팔을 걷고 나서서 내 안의 ‘고장난 스위치’를 고쳐 나갈 수 있을지 자신하기는 어렵다. 나도 사람이기에 일을 크게 만들기 싫다. 눈 딱 감고 외면해 버리면 그래, 오늘은 일찍 퇴근할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일이 커지고 있다는 것은 일면 좋은 의미라 할 수 있겠고 일면 한숨이 나오는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덮어버리면 모두가 편하다. 그것을 외면하는 순간만큼은.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고장난 스위치는 ‘요령’이 아니라 그것을 고쳐야 모두가 편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이제 나도, 그 스위치 한번 켜 봐야겠다. 후속기사 쓰려면 고장난 화장실 스위치 관리실도 들여다봐야 하고 스위치 켜는 요령도 한번 배워 봐야 하고. 갈 길이 창창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안고 있는 ‘노사관계’의 스위치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고 드러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 ‘실행’이 남았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 못하게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당신 말고는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

이제 모두가 그 스위치를 켤 수 있도록, 당신이 먼저 나서주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후속기사 준비를 약속한다. (칼럼 나가면 준비할 수밖에 없겠다) 많은 지원과 도움을 주시길 바란다.

2009년이 코 앞이다. 우리 모두 내일은 그 빌어먹을 스위치, 짱짱하게 한 번 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지은의 <뚜벅또박>
  뚜벅뚜벅, 걸어가듯 글을 쓰고. 또박또박, 내가 마주한 시간을 되짚으며 살기